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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申潤福]

풍속화로 조선을 그리다

1758년(영조 34) ~ 미상

신윤복 대표 이미지

미인도(신윤복)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가계와 생애

조선 후기의 화가 호는 혜원이며 본관은 고령이다. 1758년(영조 34) 생이며 화원이었던 한평의 아들이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과 더불어 대표적인 풍속화가로 칭송받는다. 그에 대한 기록은 관찬사료에는 전무하다시피 하며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등에서 위에서 언급한 인적 사항 등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부친 신한평(申漢枰)은 화원이며 모친은 홍천 피씨이다. 동생 신윤수와 여동생이 있으나 신윤복 자신의 부인 및 자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너무나 비속한 것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문일평(文一平)의 언급 외에는 야사로도 전해지는 사실이 많지 않다.

신한평과 신윤복이 고령 신씨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나, 그들이 서출로서 신윤복이 신말주(申末舟)의 11대손임이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신말주의 손자인 신공섭의 다섯째 아들, 즉 혜원의 8대조가 되는 신수진이 서자이기 때문에 이후 이 집안은 중인으로 떨어져 수십 명의 역관과 율관을 배출하였고 신말주의 8대손인 세담, 9대손인 일흥, 10대손인 신한평, 그리고 11대손인 신윤복 등 적어도 4대에 걸쳐 화원이 배출되었다.

신씨 문중은 일찍부터 서화에 출중하였고 신씨가에서는 서맥(書脈)의 기원을 고려말 신덕린(申德隣)에게서, 화맥(畵脈)의 기원을 11대조인 귀래정 신말주의 정부인인 설총(薛聰)의 28대 손녀 순창 설씨에게 두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신씨 문중에 있어서 서화에 관련해서는 이외에도 신장, 신숙주, 신준, 신용개 등이 유명하며, 이중 신말주의 형인 신숙주(申叔舟)는 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 소장의 회화 목록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평소 안평대군은 그림을 몹시 좋아하였다. 좋은 그림이 있으면 반드시 값을 후하게 쳐서라도 구입하여 애지중지 보관하였는데, 10여 년간 모은 그림들이 백 수십여 점이었다. 어느 날 이것들을 모두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역대의 그림들의 장단점을 평가하게 하였다. 동진 고개지의 그림부터 조선의 안견까지 무릇 5대에 걸쳐 35가의 그림 222축이었는데, 신숙주는 각 그림을 주제별로 분류하고 간단한 설명을 붙이기도 하였다.

신숙주의 증손인 신잠(申潛)은 시와 서예, 그림에 두루 능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신말주의 7대손인 신유(申濡)의 경우 그의 문집 『죽당집』과 아우 신혼의 문집인 『초암집(初菴集)』 등의 내용으로 보건대 글씨에 능했고 그림을 즐겨 그리는 문인화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혜원의 부친인 신한평은 아들에 비하면 오늘날 유명세는 덜하지만 활동을 알려주는 문헌상의 기록이 적지 않아 생전에 화단에서 점한 위치는 아들 신윤복을 능가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 허필(許佖)과 심사하(沈師夏) 사이에 신한평이 게재되어 있다. 그 외에도 변상벽(卞相璧), 최북(崔北), 조영석(趙榮祏), 송민고(宋民古) 등의 인물들과 같이 나열되어 있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의 성격과 그들의 그림의 특징 및 철학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신한평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이로써 신한평의 위상이 당대에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관찬사료에 나타난 신한평의 기록들에서 그가 영조어진과 정조어진의 어진 제작에 참여했으며 각종 규장각 소장의궤 제작에도 참여하여 적어도 30년 넘게 화원직에 봉직했음을 알 수 있다. 1781년 정조는 과거 어진을 모사했던 전례에 대해 언급하면서 굳이 별도의 도감을 설치할 필요 없이 처리하면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신하들은 매우 중요한 일인만큼 가급적 도감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정조는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별도의 도감을 설치하는 대신 한종유, 신한평, 김홍도에게 한 부씩 모사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신한평의 활동은 의궤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776년 영조혼전도감의 화원으로서 신한평은 김홍도 등과 더불어 5월 6일 선정되었다. 당시 도화서 화원으로서 신한평의 명성이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신한평은 그 외에 여러 의궤에서도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궁중화가로서의 왕성한 활동들 외에도 간송미술관에 〈자모육아(慈母育兒)〉와 같은 풍속화를 남기고 있어 그의 아들의 풍속화의 연원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신한평은 초상화가로도 활동하여 이광사의 그림을 남긴 것이 확인된다. 그림의 우상단에 ‘朝鮮國光山李公諱匡師字道甫圓嶠先生遺像 … 此本卽 先生七十歲甲午冬畵師申漢枰所寫……’라고 쓰여 있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제작시기, 화가 등 내력을 알 수 있다. 기록을 토대로 1775년에 이광사 말년의 모습을 신윤복의 아버지로 유명한 화원화가 신한평이 그린 것임이 확인된다.

표암 강세황(姜世晃)의 장서 중 『청구화사』 내에 혜원에 관한 언급이 존재하며 이에 따르면 그는 방외인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했고 여항인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김홍도와는 달리 도시 양반을 비롯한 각 계층의 생활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이며, 특히 한량이나 기녀들의 낭만적 생활이나 애정을 잘 나타냈다. 섬세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잘 구사했으며 살림이나 복식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후대의 화가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주어 그의 화풍을 본뜬 풍속화나 민화가 많다.

신윤복이 남긴 그림은 연기(年記)를 밝힌 작품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작품의 정확한 모사시기나 화풍의 변화를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의 그림에 남아있는 화기를 통해 부분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처네 쓴 여인〉이라는 그림에 남긴 관지에 적혀있는 고갑자 등으로 추정해보건대 이 그림은 1805년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또한 신윤복의 그림에는 짤막한 찬문(贊文)이 곁들여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전모를 쓴 여인〉이라는 작품에는 혜원의 낙관과 더불어 ‘옛 사람들이 도달하지 못한 경지이니 기이하다고 할 수 있다(前人未發 可謂奇)’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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