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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燕山君]

포악한 왕, 나라를 흔들다

1476년(성종 7) ~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 대표 이미지

서울 연산군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걸, 주라 불렸던 국왕

연산군은 1494년부터 1506년까지 13년간 재위하였던 조선의 10대 임금이다. 사극이나 영화에서 많이 다뤄진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연산군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재위 기간 내내 행했던 황음무도하고 엽기적인 행동들이 그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파란만장한 삶과 얽혀 한 편의 드라마를 쓰기에 충분한 소재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 반정으로 축출된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光海君) 두 명이 있다. 이들 두 임금은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묘호나 능호 대신 단지 왕자의 군호로 기록되어있고, 이들에 대한 기록도 ‘실록’이 아닌 ‘일기’라고 명명된다. 광해군의 경우 그의 폐위가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결여나 폭정에 의한 것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역학관계나 지향성의 차이에 의한 것도 있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연산군의 경우 광해군과는 다르게 폐위의 원인은 일관되게 그의 실정과 타락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당시 언관들이 연산군을 중국 고대의 대표적 폭군인 걸임금과 주임금에 빗대기도 하였다.

연산군이 이처럼 폭군의 대명사가 되는 데에는 어머니에 관한 개인사, 성군으로 칭송받았던 부왕 성종[조선](成宗) 대의 정치적 유산이 크게 작용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 대에 일어났던 사림(士林)과 언관들의 피화사건이었으며, 이러한 사건들과 연산군 개인의 방종이 결국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인한 폐위를 불러왔다.

2 비밀에 부쳐진 모후

연산군은 1476(성종 7)년 11월 7일 부왕인 성종과 관봉상시사 윤기견(尹起畎)의 딸인 폐비 윤씨(廢妃尹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융(㦕)이다. 연산군의 탄생은 왕실의 큰 경사였다. 그가 태어났던 시기는 조선이 나라 안팎으로 큰 우환 없이 안정기를 구가하고 있던 때였으며, 부왕인 성종도 만 19세의 성년을 맞아 할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에 의한 수렴청정(垂簾聽政)과 재상들의 원상(院相)를 끝내고 막 친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성종은 이 때 정희왕후의 공표를 빌어 비어있던 중전의 자리에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었던 숙의 윤씨를 간택하였다.

연산군은 어머니가 중전이 된 지 8개월 만에 태어났다. 정상적이라면 연산군은 왕실의 여러 할머니들과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일국의 왕이 될 준비를 순조롭게 수행하는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나 어머니인 윤씨에게 닥친 불행은 그의 인생을 크게 흔들었다.

중전 윤씨는 성종의 후궁들을 투기하여 그들을 저주하고자 굿하는 방법을 적어놓은 책과 비상을 몰래 숨겨놓았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성종의 노여움을 샀다.

성종은 이와 같은 중전의 행동은 국모의 자격을 크게 잃은 행동이라면서 빈으로 강등하여 별궁으로 내치라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윤씨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갖가지 패행을 저질렀으며 왕을 독살한 뒤에 직접 정치를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이유로 약 2년 뒤 성종은 윤씨를 폐서인 시키고 출궁시키는 조처를 취했다.

이후에도 성종의 윤씨에 대한 분노는 풀리지 않아, 그녀의 궁 밖 생활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건의한 권경우(權景祐)를 벌주는 등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윤호(尹壕)의 딸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왕비로 간택한 뒤 좌부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비상을 가지고 윤씨의 집으로 가 그녀를 사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폐비 윤씨에 관한 어떠한 일도 세자에게는 비밀에 부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모든 일에 비밀은 없는 법, 연산군은 세자 시절 내내 궁금해 하던 모친에 대한 이야기를 즉위 직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연산군을 다뤘던 많은 드라마나 소설들에서는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이 충격에 휩싸여 그 이후 역사상 유례없는 폭군으로 변해간 모습을 공통적으로 그리고 있다.

모후가 폐서인 되어 사사되었음에도 연산군은 7살에 순조롭게 세자에 책봉되어 후계자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습능력은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학문을 좋아했던 성종이 보기에는 더더욱 그러하여 성종은 자주 연산군을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학습에 전념하게 하도록 부탁하였다.

조지서(趙之瑞)는 연산군이 세자였을 때 선생님이었는데, 매번 세자에게 엄한 태도로 대하여 연산군이 ‘소인’이라 칭하며 미워하다가 갑자사화 때 사사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3 조정에 부는 피바람, 두 번의 사화

연산군은 18살이 되던 1494년(연산 즉위) 12월 29일 창덕궁에서 부왕 성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10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25년간의 치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성종이 붕어한 지 5일 뒤이다. 성종은 조선 전기 국왕 중에서도 호학군주로 꼽히는 만큼 국가의 각종 문물제도 정비는 물론 특히 유학의 진흥과 학자의 양성에 힘을 기울여 후의 사림이 성장할 수 있는 단초를 열어 주었다. 성종 자신이 직접 경연에 열심히 참여함은 물론, 성균관[조선](成均館)과 전국의 향교에 경전을 보급하고 재정확충을 위해 힘을 썼으며,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악학궤범(樂學軌範)≫ 등 치국에 필요한 다양한 책들이 간행된 것도 이 시기이다. 특히 조부인 세조 때의 공신들이 대신이 되어 대거 조정에 포진해 있던 상황에서도 삼사를 중심으로 언관들을 집중 육성한 것은 큰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왕의 빛나는 업적은 후계자에게 부담으로, 또는 콤플렉스로 다가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왕이 궁궐 정원에서 기르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연산군은 부왕에게 모종의 감정이 있었다.

연산군은 즉위 초부터 자신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언관들의 행태를 몹시도 싫어하고 무시하였다. 연산군은 부왕을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그것이 불교 의식이라며 반대하는 유생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들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왕실의 종친과 외척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거나, 자신의 유모에게 노비와 토지를 과도하게 하사하려 할 때 반대한 삼사의 행동에 대해서는 ‘장차 임금을 아무 행동도 못 하게 만들어 신하들이 스스로 사무를 처리하려는 의도’라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와 같은 연산군의 성향은 그의 모친인 폐비 윤씨를 추숭하려는 시도에서 삼사의 신하들과 격렬히 부딪혔다. 다만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유자광(柳子光) 등 대신들은 연산군의 입장을 이해하고 국왕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폐비의 추숭은 대략 연산군이 의도하던 대로 마무리되었다. 이시기의 정국에 대하여 국왕과 대신이 한 편이 되어 삼사의 언관들과 대립구도를 형성했다고 본 견해도 있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는 신하들의 간언을 참지 못하였던 연산군의 성향은 부왕이 키운 삼사의 언관들에 대한 악감정으로 이어졌고, 당시 대신과 삼사의 대립적인 정국의 구도도 한 몫을 하여 재위 초반부터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이른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가 그것이다. 이 사건의 시작은 1498년(연산군 4) 7월 1일에 노사신 등의 대신들과 도승지 신수근(愼守勤) 등 몇 명만이 비밀리에 왕과 면담한 후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들을 즉각 압송하여 추국하게 하였다. 게다가 4일 뒤에는 유자광에 의해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지었다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더욱 확대되었다. 김일손은 물론 김종직의 제자라고 지목된 25명이 잡혀와 추국을 당했다. 결국 김종직의 문집이 전부 소각되고 관련자들의 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유배, 파직, 좌천 등의 처분으로 김종직과 연관된 인물들과, 이들의 처벌에 미온적이었거나 비호의 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피화를 당했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제자들을 필두로 한 사림들이 화를 입었다는 일반적인 인식 외에도 연산군이 자신의 견해와 의지를 조정에 폭력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행한 물밑작업의 의도도 있었다. 즉, 연산군은 이 사화를 계기로 전부터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거나 잔소리를 했던 삼사의 언관들을 비롯한 신료 집단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피화인 중에는 홍귀달(洪貴達), 이극돈(李克墩) 등 김종직의 부류들과는 무관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삼사를 비롯하여 신료들의 간언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국왕의 그릇된 행위에 제동을 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화로 신료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 연산군은 표면상으로 강력하고 전제적인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시급한 국가의 사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치, 사냥, 잔치, 음행 같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만 물자와 시간을 쏟았다. 이러한 왕의 행동이 계속되자, 다시 삼사의 간언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들에게 “술이나 마시고 가라”는 조롱을 하거나 대간들은 매번 윗사람을 의심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급기야는 언관들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던 한치형(韓致亨), 성준(成俊), 이극균(李克均) 등의 대신들까지 나서서 나라에 재정이 고갈되고 있으니 사치와 포상을 줄이고 사냥을 중지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쏟아지는 비난에 왕은 매우 불만을 느꼈으며 이제는 대신들까지 자신을 무시하며 능멸한다고 생각하여 신료들의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연산군은 양로연에서 자신이 하사한 술을 엎질러 옷을 적신 예조판서 이세좌의 행동에 자신을 어리다고 무시한 처사라며 광분하였다. 얼마 뒤, 연산군은 홍귀달의 손녀를 후궁으로 입궐시키라고 했지만, 병을 핑계로 따르지 않자 자신을 능멸한다며 국문을 지시한다.

이세좌와 홍귀달의 사건을 계기로 연산군은 왕에게 불경하게 대하는 풍습을 고치기로 마음먹고 죄가 있다고 생각되는 신료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갑자사화이다. 특히 이 사건에는 모친의 폐비 사건에 조금이라도 가담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이 대거 연루되어 하옥과 국문을 당했다. 갑자사화로 피화된 사람들의 규모는 매우 거대했다. 전현직 신료들은 물론 이미 사망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 화를 입은 사람들은 본인들만 약 230여 명이며, 가족들까지 더하면 그 수는 몇 배로 불어날 것이다. 갑자사화는 유례없는 무자비한 정치적 숙청이었다.

4 폐위를 부른 연산군의 폭정

연산군이 행한 각종 기행들과 폭정은 정사뿐만 아니라 ≪소문쇄록(謏聞鎖錄)≫, ≪송와잡설(松窩雜說)≫, ≪대동야승(大東野乘)≫ 등 여러 야사에서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이 중에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만큼 연산군의 행적이 당시로서도 믿기 힘들만큼 지나쳤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연산군의 폭정은 대체로 재위 8~9년부터 본격화되어 갑자사화 이후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어 폐위의 원인이 되었다.

연산군의 행적 중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뿌리는 여색을 탐하는 것과 연희를 자주 열어 물자를 낭비하는 것이었다. 잔치에 동원되는 흥청들의 꾸밈 비용과 진귀한 음식을 마련하느라 내수사의 재정은 텅텅 비었으니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겼다고 한다. 여색을 심하게 밝혀 신료의 부인들과도 염문설이 나돌았으며, 백부인 월산군(月山君) 부인 박씨와도 스캔들이 날 정도였다. 사냥을 너무 좋아해서 매번 인원과 장소를 동원하는 데에 애를 먹었으며, 사냥터를 위해 민가를 철거하게 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했다. 가장 큰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 극도로 위축된 신료들이 아무도 그의 행동을 제어하거나 간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이 이런 각종 유희에 빠지면서 국사를 멀리하는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당시에는 유독 가뭄과 수해 등 자연재해가 심하게 들어 민생이 도탄에 빠졌는데도, 해결하려는 의지는 없었고 도리어 자신의 놀이비용 마련에 골몰하였다고 한다.

5 중종반정과 연산군의 죽음

연산군의 황음무도한 재위 말의 행적을 고려하면 반정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결과였다. 중종반정은 치밀하게 준비되었다기보다 다소 즉흥적으로 시작되었다. 반정의 핵심 주동자인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 등이 같이 모의할 사람이 없어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일단 거사가 시작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506년(연산 12) 9월 1일 저녁 반정군은 흥인지문(興仁之門) 부근의 훈련원에 모여 정현왕후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조선](中宗)에게 추대 의사를 밝힌 뒤 3경에 창덕궁을 포위하여 연산군을 폐위하겠다는 대비의 윤허를 받고 이 날 오후에 진성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어 두 달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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