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영조

영조[英祖]

탕탕평평하리라

1694년(숙종 20) ~ 1776년(영조 52)

영조 대표 이미지

영조 어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탕평과 민생의 안정을 통해 조선의 중흥을 이끌어내다

18세기에 이르러 청나라가 강희, 건륭의 융성기를 맞으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안정되었고, 이에 조선은 내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은 붕당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던 시기로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왕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게 되었다. 숙종대 ‘환국’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환국은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통해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국 운영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전반에 이르면 붕당간의 갈등이 충역(忠逆)의 시비로 비화되어 결국은 피비린내 나는 옥사를 야기하였다. 그 결과 당을 막론하고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다. 영조는 그 시절 세제(世弟)의 위치에서 잔인한 옥사를 직접 경험하였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불안정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간의 대립에 심각성을 인지하며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초월적인 군주 상을 수립하고, 이에 근거하여 ‘탕평책’을 정책화한 것은 이러한 영조의 강력한 왕권 강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영조는 탕평을 통한 국정의 안정을 기반으로 민생의 안정을 도모한 결과 조선의 국력과 문화수준은 높아지게 되었고, 사회경제의 발전과 안정이 증진되면서 조선의 중흥을 이끌어내었다.

2 붕당의 첨예한 대립과 탕평군주의 등장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과 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숙종[조선](肅宗)은 45년간 장기집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이라 하였다.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숙종초반에 집권한 남인은 1680년(숙종 6)에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축출되고, 이후 서인이 집권하였다. 9년간 집권한 서인은 1689년(숙종 15) 남인계 후궁인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에서 몰락하였고, 그 과정에서 재집권하였던 남인은 1694년(숙종 20)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사사하였던 갑술환국(甲戌換局)을 통해 다시 몰락하였다. 이것은 숙종이 붕당의 대립을 일소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택한 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역시 붕당간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충역(忠逆)의 문제로까지 비화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낸 옥사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후왕은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은 이후 영조가 탕평책을 추진한 동력이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18세기 조선은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국가라는 자부심이 팽배했고, 이러한 문화적 자존감을 바탕으로 문예 부흥을 일으킬 수 있었다. 1705년(숙종 31) 숙종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와준 신종(神宗)을 제사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창덕궁 내에 설치하였다. 이로써 멸망한 명을 대신해 조선이야말로 명나라의 유일한 후계자임을 자처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더 이상 변경이 아니라 중화문화의 적통이자, 유교문화의 중심으로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단종(端宗)의 복위와 문묘(文廟)의 정비, 서원과 사우의 설치 등은 이러한 문화적 자존감에서 기인한 성리학 이념의 보급현상이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대동법(大同法)의 확대, 삼남지방의 양전 사업의 완료 등 민생의 안정에 기여한 결과 토지 확보량도 늘어났고, 인구도 증가하였다.

문화사업의 측면에서도 각종 국가 통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편찬사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대전속록(大典續錄)』, 『열조수교』 등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 통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편찬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숙종시대는 전란의 피해복구와 국가재정비사업이 일단 마무리되어 중흥의 기틀을 다진 시기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중흥은 이후 영조에 이르러 궤도에 오르게 된다.

3 혼란한 정국의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다

영조의 성은 이(李), 이름은 금(昑), 자(字)는 광숙(光叔), 현종[조선](顯宗)의 손자이고 숙종의 둘째 아들이며, 모친은 숙빈최씨(淑嬪崔氏)이다. 1694년(숙종 20)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났을 때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태어나기 사흘 전 붉은 빛이 동방에 뻗고 하얀 기운이 위를 덮었으며, 궁인들은 꿈에 흰 용이 보경당에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또한 영조는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오른 팔에 잇따라 용이 서린 것 같은 무늬 아홉 개가 있었다고 한다.

영조의 특이한 행적과 관련한 일화로 겨우 걸음을 배웠을 때에 숙종께 나아가 뵈면 반드시 무릎을 모아 바르게 앉고 숙종께서 물러가라고 명하지 않으시면 하루해가 다 가더라도 어려워하시는 빛이 없으므로, 숙빈이 왕께서 오래 꿇어 앉아 있느라 발이 굽을세라 염려하여 넓은 버선을 만들어서 힘줄과 뼈를 펼 수 있게 하였다.

1699년(숙종 25) 9세에 연잉군(延礽君)으로 봉해졌으며, 1702년(숙종 28) 9세에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맞아 정성왕후(貞聖王后)으로 삼았으며, 1712년(숙종 38) 19세에 궁을 따로 짓고 나가 살게 되었는데, 숙종이 양성(養性) 이라는 건물명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영조의 생애도 파란만장한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1721년(경종 1) 사간원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발언을 계기로 연잉군(영조)의 세제 책봉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정소는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아직 후사가 없으니, 선왕의 혼령도 근심하고 답답할 것이니 일을 의논해 대계를 정할 것을 청하였다.

경종의 즉위 후, 후계를 미리 세워야 한다는 노론계 신료들의 발언과 이를 지지해주는 인원왕후(仁元王后)의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이며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으로는 주상(主上)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라는 발언에 따라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의 허락과 인원왕후의 승인으로 드디어 연잉군은 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제 책봉 2개월 만인 1721년(경종 1) 10월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를 기폭제로 삼아 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경종은 “자신의 병세가 점점 심해져서 나을 기약이 없고, 세제는 젊고 영명하니 그로 하여금 국사를 청정케 한다면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대소 국사를 막론하고 모두 세제가 결재하도록 하라.”는 의중을 밝힘으로써 연잉군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령하였다.

세제의 대리청정의 소식을 듣고, 위기의식을 느낀 소론 측에서는 급진파인 김일경(金一鏡) 등 7인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김일경은 대리청정을 제기한 조성복과 이를 강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이건명(李健命)을 역모로 공격했다. 이는 소론 측에서 노론의 경종에 대한 불경, 불충죄를 최대한 부각시켜 세력의 반전을 기도한 것이다. 그 결과 소론의 정치 보복이 시작되어 조성복과 노론 4대신이 위리 안치되는 등 50-60명의 노론이 처벌받았다.

1722년(경종 2) 3월 27일에는 소론계인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 측에 다시금 피바람이 불었다. 그 내용은 노론 명문자제인 김성행(金省行), 이기지(李器之), 이희지(李喜之), 이천기(李天紀), 김용택(金龍澤) 등이 환관 궁녀들과 결탁하여 왕을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일로 인해 170명의 노론계 인사들이 살육되거나 형벌을 받았다. 위기의 순간들이었지만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영조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4 탕평과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다

영조는 붕당이 연합 정권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충역(忠逆)으로 나누어 상대 당을 공격하며 피비린내 나는 옥사를 야기하는 행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영조는 ‘경종 연간 화를 당한 끝에 당론(黨論)이 살육(殺戮)의 근본이 되고 살육이 망국(亡國)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깊이 아시어 붕당을 없애고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것을 정치를 하는 요체로 삼았다.’

고 할 만큼 당론이 살육으로 번지는 세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는 이러한 붕당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숙종대 제기된 탕평론을 정책화시켰다. 영조는 80 평생 자신이 뜻을 두고,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탕평’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런 만큼 탕평은 영조의 정국 운영 방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탕평은 『서경(書經)』「홍범(洪範)」조의 정치이념을 빌려온 것으로, 중국의 고대 제왕인 요순(堯舜)이 초월적인 성군(聖君)의 위치에서 편중되지 않고, 당파를 짓지 않는 탕탕평평의 정치를 이끌었다는 뜻이다.

영조는 요순과 같은 고대 성왕을 자처하면서 임금인 동시에 군사(君師)가 되어 초월적인 군주의 모습을 수립하였다. 영조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주도한 무신란[이인좌의 난](戊申亂(李麟佐─亂))과 1755년(영조 31) ‘을해옥사[나주괘서사건](乙亥獄事(羅州掛書事件))’로 인해 소론 세력의 도전을 받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762년(영조 38) 소론과 관련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노론의 주장에 따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는 사도세자 사건(思悼世子事件)을 겪는 등의 정치적 파란도 있었지만 영조는 일관되게 탕평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영조가 추구한 것은 ‘완론탕평(緩論蕩平)’으로, 노론과 소론 사이의 탕평에서 벗어나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이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오광운(吳光運), 채제공(蔡濟恭) 등의 남인과 남태제(南泰齊)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영조는 다른 한편으로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배후세력인 재야 산림의 공론(公論)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공론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던 이조낭관과 한림이 자신의 후임을 스스로 천거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결과 매년 숙종대에 도를 넘어 10여 개씩 설립되던 서원이 일시 중지 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탕평을 통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영조는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이 국민의 의무를 대신하여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均役法)을 제정하여 세금 제도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민중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다. 1729년(영조 5)에는 궁전 및 둔전에도 정해진 분량을 초과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세하도록 하는 등 탈세방지에 힘썼다. 이외에도 영조는 일반 백성의 여론을 직접 정치에 반영시키기 위해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형벌제도에 대해서도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키거나,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三審制)를 엄격하게 시행하여 형살(刑殺)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켰다. 또한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사치·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으며, 배고픈 민중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구제하였고, 서울의 주민 15만 명과 역부 5만 명을 동원해 청계천을 준설함으로서 서울 시민의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학문의 숭상과 문물제도의 정비를 통해 문예 부흥의 기반을 닦았다. 법과 의례를 조선후기 실정에 맞게 재정비하기 위해 『속대전(續大典)』,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편찬하였으며, 백과사전류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만들었다. 이 외에도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良役實摠)』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함으로써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외에도 영조는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천명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적을 반포하였는데, 1751년(영조 31) 『천의소감(闡義昭鑑)』이 대표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문물정비용 서적 외에도 영조 스스로 군사를 자처할 만큼 성리학적 지식과 학문이 뛰어난 그는 스스로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을 비롯하여 『어제경세문답(御製磬世問答)』 등의 글을 짓기도 하였다.

5 정조(正祖)의 영조 계승과 문화적 전성기의 실현

영조는 1776년(영조 52)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 재위기간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영조는 역경을 딛고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으며, 탕평에 의한 정국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치세의 시기부터 현저해지는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문제의 해소를 통해 민심을 추스르며,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국왕이었다. 영조의 제반 정책은 정조에게 계승되었고, 그 결과 정조대에는 경제적으로 강력해지고, 문화적으로도 청의 강희 건륭 문화와 쌍벽을 이루는 문화대국 즉 조선의 전성기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