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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元均]

조선 수군,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다

1540년(중종 35) ~ 1597년(선조 30)

원균 대표 이미지

원균 선무공신교서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임진왜란 때의 무장.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당시 경상우수사로서 수군을 이끌었으며,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충청병사, 전라좌수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사하였다.

2 임진왜란 이전의 행적

원균(元均)은 1540년(중종 35) 1월 5일 평택에서 원준량(元俊良)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며, 형제로는 임진왜란 때 진사(進士)로서 의병을 일으킨 원연(元埏)을 비롯하여 원용(元墉)·원전(元㙉)·원지(元墀)가 있고, 아들로는 원사웅(元士雄)이 있다. 그의 아버지 원준량은 무관으로서 선전관을 거쳐 전라우수사, 경상좌수사, 경상좌병사, 전라좌수사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는데, 재임기간 여러 차례 대간에 의해 탄핵을 받은 바 있다.

원균은 28세 때인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式年) 무과에 을과(乙科) 2위로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 원균은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부령부사(富寧府使)로 승진하였다고 한다. 이후 종성부사(鐘城府使)로 옮겨 49세 때인 1588년(선조 21) 북병사 이일(李鎰)의 휘하에서 시전부락(時錢部落) 정벌에 참가하였다.

이후 원균의 활동 무대는 남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을 통일한 이후 조선을 침공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고, 조선 조정은 1591년(선조 24) 초부터 요해지에 성을 쌓고 경력이 있는 장수들을 남쪽으로 내려 보내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는데, 원균 역시 남방을 방어할 장수의 일원으로 포함된 것이다. 원균은 1591년(선조 24) 품계를 뛰어넘어 전라좌수사에 제수되었으나, 전에 수령으로 있을 때 현대의 인사고과에 해당하는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뒤에 전라좌수사에 제수된 것이 문제가 되어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그 대신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 초 원균은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다.

3 임진왜란 초기의 실패와 성공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대거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 앞에 순식간에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동래성 구원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가 도주하였으며, 경상좌수사 박홍(朴泓)도 휘하 군세를 결집하지 못하고 본영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경상우수사 원균 역시 적절한 초기 대응을 보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원균은 전쟁이 발발하자 급한 대로 전선을 이끌고 출진하였으나, 자신의 휘하 수군을 결집하는 데 실패하였다. 결국 그는 본영을 우후(虞侯) 우응진(禹應辰)에게 맡겨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고, 자신은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 이영남(李英男) 등의 휘하 장수들과 함께 4척의 배를 거느리고 곤양(昆陽) 해구(海口)로 물러났다. 이로 인해 경상우수영 관할 지역의 방어체계는 와해되었다. 비록 이순신보다 늦게 부임하여 경상우수영을 정비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휘하 세력을 결집하지 못한 것은 명백히 그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원균은 남해(南海)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피해 상륙하려 하였으나, 이운룡의 진언을 받아들여 이영남을 보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청하였다. 이후 원균은 한산도(閑山島)로 이동하였다가, 5월 6일 판옥선(板屋船) 1척을 타고 이순신과 합세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남해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미조항첨사(彌助項僉使) 김승룡(金勝龍),평산포권관(平山浦權管) 김축(金軸), 사량만호(蛇梁萬戶) 이여념(李汝恬),소비포권관 이영남,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 한백록(韓百祿) 등 그의 지휘 하에 있는 장수들도 각각 배를 타고 이순신 함대와 합류하였는데, 그 전력은 총 판옥선(板屋船) 3척과 협선(挾船) 2척이었다. 전라좌수영 함대와 합친 연합함대의 전 병력이 판옥선 28척, 협선 17척이었음을 감안하면, 원균의 함대는 매우 열세였음을 알 수 있다.

5월 6일 이순신 함대와 합류한 이후, 원균은 소수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이끌고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에 참여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이때 경상우수영에 속한 여러 장수들 역시 옥포해전에서 5척의 적선(敵船)을 격파하는 등 활약하였다. 이후 5월 9일 이순신 함대가 일시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함으로써 전라·경상 연합함대의 1차 출동은 끝이 났다.

원균은 이후 일본 배 10여 척이 사천(泗川)·곤양 등지로 육박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함대를 노량(露梁)으로 이동시키고, 이순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순신은 원균의 통지를 받고 23척의 전선을 끌고 출정하여 5월 29일에 노량에서 3척의 전선으로 이루어진 원균의 함대와 합세, 2차 출전에 나섰다. 2차 출전에서 연합함대는 동진하면서 5월 29일 사천해전, 6월 1일 당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6월 4일 전선 25척으로 이루어진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가 합류함으로써 51척의 전선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연합함대는 6월 5일 당항포해전, 6월 7일 율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기세를 이어 가덕도까지 진출했다가 귀환하여 6월 10일 해산, 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상우수영 함대는 기효근, 이영남 등이 돌격전에서 활약하는 등 개별적으로 분투하였으나, 원균 자신은 “군사없는 장수[無兵將]”로서 작전을 지휘하기 어려워 전투에 직접 공헌하지는 못하였고, 전투가 끝난 뒤 화살이나 탄환에 맞아 죽은 일본군의 수급을 수습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즉 아직까지 경상우수영 소속 장수들이 개별 전함을 타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함대의 지휘통솔이 복구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연합함대가 재정비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다시금 가덕도·거제도 등지에 출몰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와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7월 6일에 출전, 노량에서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였다. 원균은 부서진 전선을 수리하여 7척의 전선을 마련한 상태였다. 연합함대의 전력은 전선 56척에 거북선 3척, 소형선 50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3차 출전에서 연합함대는 7월 8일 유명한 한산도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7월 10일 안골포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이후 연합함대는 동래 근처까지 나아가 해상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7월 13일에 해산하였다. 이때 규모가 커진 원균의 함대는 여전히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안골포해전에서 후미를 맡아 참전하는 등 함대 단위로 전장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때에 이르러 경상우수영 함대가 원균의 지휘통솔 하에 하나의 함대로서 다시금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연합함대는 전선과 무기를 준비하는 등 전력을 확충하는 한편, 8월에 4차 출전을 감행하였다. 원균은 8월 25일 자신의 선단을 이끌고 전라도 수군과 합류하였다. 연합함대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 일본 군선 470여 척에 총공격을 감행해 100여 척을 격파하는 등 대승을 거둔 뒤 9월 2일 해산하여 각자의 본영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경상우수영 소속 장병들도 일본 수군을 격파하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이렇게 일본 수군 격파에 공헌한 결과, 이순신은 정2품 상계(上階)인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고, 원균과 이억기 역시 종2품 하계(下階)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에 휘하 병력을 수습하지 못하여 소수의 병력으로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지만, 이순신·이억기와 함께 일본 수군과 싸우면서 점차 경상우수영 수군을 재건하고, 나아가 일본군 격파에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4 이순신과의 갈등과 선조의 신임

원균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도 경상우수사로서 임무를 수행하여, 한편으로는 전력을 복구·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군을 치기 위해 출전하였다. 원균은 1593년 7월 기준으로 20여 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 수군 전체가 그러했듯이 전염병과 군량 부족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특히 경상우도 지역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어 수군을 유지하는 데 더욱 난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원균은 2월 8일에는 이순신·이억기와 한산도에서 모여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3월까지 웅천(熊川) 등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이 틀어박혀 해전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큰 전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에 따라 5월부터는 전라좌수영·전라우수영 함대와 함께 한산도로 이동해 주둔함으로써 일본 수군이 서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1594년(선조 27) 3월에는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이동을 포착한 연합함대가 30척의 정예 병력을 선발하여 일본 수군 31척을 격파하였는데, 그 가운데 경상우수영에서는 원균 스스로가 중선(中船) 2척을 불태우는 등 10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울러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윤두수(尹斗壽)가 주관한 거제도 공격에도 참가해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부터 원균은 이순신과 갈등을 빚고 있었고, 이순신이 1593년 10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원균의 상관이 된 이후에도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에는 원균이 주로 원인을 제공하였다. 공식적으로 조정에 보고된 사안만 보더라도 원균은 옥포해전 당시 이순신 휘하 장수들이 사로잡은 일본 전선을 자신의 부하들이 활을 쏘아 빼앗아가면서 아군 부상자를 발생시킨 사안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으며, 한산도해전 당시 한산도에 상륙한 일본군 패잔병 400명을 도망치게 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또한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격파한 31척을 모두 자신 휘하의 장수들이 불태운 것처럼 공문을 만들어 보냄으로써 전과를 독차지하려 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1593~1594년 동안 원균과의 불편한 관계가 약 30여 회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성격이 흉악하고 음험하다는 등 개인적인 내용도 있으나, 고립된 아군을 내버려두고 구하지 않는다든지, 잘못된 공문을 보내어 군대를 동요하게 했다든지, 적을 치러 가자는 공문을 보내 놓고 답장을 보내자 취했다는 이유로 살펴보지 않는다든지, 자신의 전력은 따로 빼놓고 적을 치러 출동하자고 독촉하는 등 장수로서 결격사유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영남, 이여념 등 원균의 부하 장수들이 이순신에게 와서 원균의 비리를 고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이렇듯 이순신과 원균 사이에는 불신이 쌓여, 이순신은 원균의 보고를 불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순신의 기록임을 감안하더라도 원균이 공적·사적으로 크고 작은 실책을 저질렀으며, 이것이 이순신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한 원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원균 자신이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다섯 살이 많았으며, 무장으로서의 경력상 이순신보다 선배였다. 또한 원균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소수의 전선이었다고는 하나 자신도 이순신과 함께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자신보다 높은 관작을 받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순신이 자신의 상관이 되자 부정적인 감정이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1594년(선조 27) 거제도 공격 이후에는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체로 원균이 용맹하고 쓸 만한 장수라는 긍정적인 인식이 퍼져 있었다. 특히 국왕 선조가 원균에 대해 높이 평가했으며, 원균과 친척 관계에 있는 윤두수·윤근수(尹根壽)를 비롯한 서인 다수가 원균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남인인 정탁(鄭琢) 역시 원균을 쓸 만한 장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하려 하였지만, 결국 원균의 직임을 충청병사 선거이(宣居怡)와 서로 바꾸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다. 원균은 결과적으로 이순신에게 밀려 수군을 떠나게 되었고, 그는 이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원균은 충청병사로 재임하면서 탐욕·포학하고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는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또한 원균은 농번기에 대규모로 인력을 동원하여 상당산성(上黨山城)을 쌓아 물의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1596년(선조 29)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수습 차원에서 원균을 전라병사로 임명하였고, 그에게 말을 내려주는 등 그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였다.

이후로도 선조는 한산도에 주둔하면서 수군의 유지·증원 및 일본 수군의 진로 차단을 수행하는 이순신에 대해서 소극적이고 태만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품으면서, 상대적으로 원균이 성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에 대해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은 원균이 전투에 임해서는 용맹하지만, 성격이 과격하여 평상시에 군사를 거느리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원균에 대한 신뢰를 계속 유지하였으며, 그를 이순신의 대체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5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과 칠천량에서의 대패(大敗)

1596년 11월, 강화교섭의 결렬로 인해 정유재란이 일어날 것이 확실시되었다. 조선 조정은 수군으로 하여금 일본군의 도해를 차단하는 해로 차단 전술을 채택하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전부터 수군의 적극적 역할을 주장하던 윤근수가 원균을 수군에 재기용할 것을 제안하였고, 원균을 조만간 재기용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선측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이를 격파하라는 정보를 흘렸고, 가토 기요마사가 도해에 성공한 이후에는 때를 놓쳐서 안타깝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 정보는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직전에 들어온 정보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이 제때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실제로 이순신은 명령에 따라 부산포로 수군을 이끌고 출동하였으나, 이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도해하고 난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선조를 중심으로 제때 조치하지 못했다 하여 이순신을 비판하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일본군의 이간책에 조선 조정이 말려든 것이다. 이러한 때에 원균은 수백 명의 수군이 절영도(絶影島) 밖에서 시위하면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조정에서 원균의 주가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윤두수·김응남(金應南)·이산해(李山海) 등의 대신들이 원균의 재기용을 주장하였고, 선조는 원균으로 하여금 이순신을 대신하게 할 뜻을 드러내었다. 선조는 원균을 경상우수사겸경상도절제사로 임명하였다가, 사헌부의 이순신 탄핵을 계기로 하여 이순신을 체포하고 원균을 대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선조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원균은 이순신을 대신하여 수군을 통솔하게 된 것이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았다는 데 기뻐하며 통제사로 부임하였으나, 특별한 묘책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균은 원래부터 용맹하기는 하나 과격한 성품 탓에 지휘관으로서 부적합하다는 평을 들어왔는데, 통제사로 임명된 이후에도 그러한 성격이 빌미가 되어 휘하 장병들의 장악에 실패했고, 나아가서는 주요 장수들과 반목하게 되었다.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군이 적극적으로 해상에 나가 일본군을 견제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었지만, 그가 제안한 것은 어디까지나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를 막기 위한 소규모 무력시위였고, 수군 단독으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부산포로 출전할 생각은 없었다. 당시 한산도에서 부산포로 가려면 일본군이 주둔한 안골포와 가덕도를 지나야 했으며, 부산포 앞에는 정박할 만한 곳이 없어 장시간 작전이 어려웠다.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전하는 것을 자제하고, 한산도를 봉쇄하는 전략을 취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원균은 수륙 양군이 동시에 출전하여, 우선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점령한 연후에야 수군이 부산포로 나가 활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 및 조정 신료들, 그리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도체찰사 이원익은 정박이 어렵더라도 수군이 자주 부산 앞바다를 왕래하면서 일본군을 견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래로는 장졸들이 반발하고, 위로는 조정과 대립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한 직후인 3월 8일 소규모 일본 수군을 포착하고 출진하여 수급 18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고성현령(固城縣令) 조응도(趙凝道)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6월 18일에 재차 부산으로 출항하여 6월 19일 안골포와 가덕도에서 소규모 해전을 치러 일본 군선 몇 척을 포획하였으나, 회군할 때 역습을 당하여 평산만호(平山萬戶) 김축이 부상을 입고 보성군수(寶城郡守) 안홍국(安弘國)이 전사하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돌아왔다. 원균은 7월 초에 자신은 한산도에 머물면서 다시 수군 일부를 출전시켰는데, 7월 8일 일본 군선 10여 척을 격파하였으나, 수백 척에 이르는 대규모 함대를 만나 일단 철수하였다. 이때 풍랑이 일어 전선 5척은 두모포(豆毛浦)에, 7척은 서생포에 표착하였고, 서생포에 표착한 조선 수군은 전멸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 수군은 소극적으로 출전은 했으나 적지 않은 피해를 당하고 있었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원균에게 돌아갔다. 특히 도원수 권율은 원균이 지체하고 직접 출전하지 않는다 하여 원균을 곤양으로 소환하여 7월 11일 곤장을 치기까지 했다. 이는 단순히 도원수 권율의 독단이 아니라, 조정 및 선조까지도 원균에게 출전을 독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원균은 최대한 출전을 회피하려고 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원균은 7월 14일 함대 전체를 이끌고 출전하여,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와 해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의 기세를 보고 대결을 회피하였고, 원균은 이들을 추격하다가 전선의 운용이 어려운 지점까지 이르러 함대 일부가 표류하여 흩어지는 상황에 처했다. 원균은 간신히 함대를 수습하여 가덕도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자 하였는데, 이미 하루 종일 노를 젓고 전투를 시도했던 병사들은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이런 마당에 가덕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기습하였고, 조선 수군은 400여 명의 군사들을 잃고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로 이동하였으나 여기서도 일본군의 매복을 당하였다.

다음날인 7월 15일, 원균 함대는 풍랑을 무릅쓰고 영등포에서 칠천량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조선 함대의 이동을 파악하고 야간에 조선 함대를 포위하였고, 7월 16일 새벽에 공격을 감행하였다. 조선 수군은 피로로 지쳐 경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일본 수군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수군은 포위망을 뚫고 몇 갈래로 나뉘어 도주를 시도하였는데, 원균은 일부 함대를 이끌고 추원포(秋原浦)로 물러나 상륙하여 적을 피하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칠천량해전은 조선군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이로 인해 전라우수사와 충청수사 최호(崔湖)를 비롯한 많은 주요 장수들이 전사했으며, 이순신이 파직될 당시만 해도 전선 130여 척, 병력 13,000여 명에 이르던 조선 수군은 철저히 괴멸하였고, 한산도의 통제영(統制營)에 쌓여 있던 물자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조선 수군에 남아 있던 것은 탈출에 성공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이끌고 있던 십여 척에 지나지 않았으며, 살아남은 장병들도 흩어져 버렸다. 바닷길을 막고 있던 조선 수군이 말 그대로 사라지면서, 일본군은 수륙 양면으로 서진하였으며, 전라도가 직접적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근본적으로는 무리한 전략을 고수한 조정의 잘못도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원균이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원균은 무리한 수군 운용을 지시하였고, 가장 기본적인 경계를 소홀히 하였으며, 장병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해 많은 병력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가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잘못된 대처를 연발했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접한 후, 선조는 패배를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돌렸으며, 패배의 책임을 원균에게만 돌릴 수 없음을 강변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이후 논공행상을 할 때도 선조는 원균의 공을 이순신, 권율과 같은 반열에 올렸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2등으로 올라간 원균을 1등으로 올리는 등의 배려를 하였다. 그 결과 1603년(선조 36)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최종적으로 책록되었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崇錄大夫議政府左讚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의 관작이 추증되었다.

조선 후기 내내 원균은 이순신과 비교되어 장수로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에는 분명 지나친 면이 있으며, 원균이 주위 상황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원균은 주어진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최악의 사태를 초래했으며, 그 점에 본인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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