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유득공

유득공[柳得恭]

발해는 우리나라

1748년(영조 24) ~ 1807년(순조 7)

유득공 대표 이미지

발해고

국립민속박물관

1 유득공이 살았던 시대상황

영조(英祖) 즉위당시 붕당간의 갈등과 반목이 심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즉위 이후에 탕평책(蕩平策)을 시행하여 노론(老論), 소론을 비롯하여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인물까지 다양하게 등용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어, 백성들의 군포(軍布) 부담이 줄어들었다. 이 밖에 17세기 이후, 이앙법의 보급과 수리시설의 발달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넓은 면적을 농사짓는 광작(廣作)이 유행하였고,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사를 짓는 부농(富農)이 발생하였다. 또한 상업도 크게 발달하여, 개성(開城)의 송상(松商), 의주(義州)의 만상(灣商), 동래(東萊)의 내상(萊商), 한양의 경강상인(京江商人) 등 전국 각지에서 사상(私商)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 가족관계와 성장배경

유득공은 조선후기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이다.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등을 사용하였다. 1748년 11월 5일 유춘(柳瑃)과 남양홍씨 사이에서 남양 백곡 외가집에서 태어난 유득공은 증조할아버지 유삼익(柳三益)과 외할아버지 홍이석이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신분상 서자였다.

유득공의 증조할아버지인 유삼익은 함평 이씨 이온(李溫)의 딸과 결혼하였다. 유삼익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유하상(柳下相), 둘째 아들은 유주상(柳周相), 셋째 아들은 유한상(柳漢相)이며 딸은 김원갑(金遠甲)과 결혼하였다. 유하상은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아들 2명을 두었다. 첫째 아들은 유충(柳珫)인데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 유인(柳璘)을 두었으나 자식이 없어 결국 대가 끊어졌다. 유주상은 평산 이씨와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어 유한상의 둘째 아들 유민(柳玟)을 입양하였다. 셋째 아들 유한상은 유득공의 할아버지이다. 유한상은 평산 신씨 신소(申紹)의 딸과 결혼하여 유춘(柳瑃), 유민(柳玟), 유련(柳璉), 유곤(柳璭)을 두었고, 딸 1명을 두었는데 나중에 심현(沈鉉)과 결혼하였다. 유춘은 유득공의 아버지이다. 유민은 작은아버지 유주상에게 입양되었으나 결혼 전에 사망하였다. 유련은 1776년 서호수(徐浩修)의 수행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때 건륭시대에 발간된 『고금도서집성』구매에 간여하였다. 그는 홍대용(洪大容)과 친한 사이였고, 기하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유련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재능을 필 기회를 잡지 못하였고, 결국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1788년에 사망하였다. 이 때 양근군수였던 유득공은 유련이 만든 동척과 철규필을 부장품으로 넣었다.

유곤은 18세에 의령 남씨와 결혼하여 유득공의 어머니인 남양 홍씨, 유득공 등과 남산기슭의 집에서 10년 동안 살았고, 『산방사어록』을 남겼다.

유득공의 어머니인 남양 홍씨는 홍시주(洪時疇)의 서자인 이원현감 홍이석의 2남 1녀중 외동딸이다. 그녀는 막내여서 17세에 유득공의 부친과 결혼할 때 막대한 혼수를 마련할 만큼 부모로부터 유별난 애정을 받았다. 그 뿐 아니라 딸을 염려해서 옷감을 염색하는 염전국을 설치하고 노비를 상주시켜 딸의 친정나들이나 자신이 상경할 때 편리하게 이용토록 하였다. 유득공의 부인 전주 이씨의 증조부는 이상충(李相忠), 할아버지는 이정옥(李廷玉), 아버지는 이채휘(李釆徽)이다.

유득공은 1748년 11월 5일 남양의 백곡 외가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염병으로 그의 집안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가 5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유춘이 사망하자 집안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그의 어머니 남양 홍씨는 유득공을 데리고 남양 백곡의 친정집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유득공이 10살이 되는 해에 주변환경이 교육에 좋지 않고, 시동생인 유민이 미혼에 죽어 유득공에게 집안을 경영할 책임이 떠넘겨지자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유득공은 남산의 본가로 돌아 온 뒤에 곧 경행방으로 이사하여 오랫동안 생활하였다. 경행방에서 유득공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였다. 유득공은 “서울에는 온갖 물건을 수선하는 장인이 있으니, 나와 자네(이덕무)는 늙었고, 글공부에도 재주가 없으니, 굶어 죽기 전에 시 수선공이나 되었으면 한다”는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유득공은 이채휘(李采徽)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2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첫째 아들은 유본학(柳本學)으로 연천현감을 지냈으며, 윤가기(尹可基)의 딸과 결혼하였다. 윤가기의 며느리가 박제가의 딸인 점을 고려하면, 유득공과 박제가, 그리고 윤가기는 서로 아들과 딸을 혼인시킨 것이다. 둘째 아들은 유본예(柳本藝)로 단성현감을 지냈으며 『한경지략(漢京識略)』을 저술하였다. 유본학과 유본예도 검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유득공의 막내딸은 성대중(成大中)의 손자 성익증과 혼인하였다.

3 북학자들과 교류하며 시를 쓰다.

1768년 경행방(지금 경운동)에서 작은아버지 유련과 함께 살면서, 백탑(지금 파고다 공원) 주변에 살고 있던 북학파 학자인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원중거(元重擧), 백동수(白東脩), 성대중, 이희관(李羲觀), 윤가기(尹可基) 등과 어울렸다. 유득공이 북학파 학자들과 친하게 지낸 사실은 박제가가 박지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박지원, 이서구, 이덕무, 서상수 등이 원각사 옛터의 북쪽에서 함께 살았고, 유득공과 유련이 경행방에서 살았다’고 한 언급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은 신분과 연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문과 학문을 같이 하면서 우정을 쌓아갔다. 특히 유득공은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시문의 창작과 연구에 열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백탑동인이라는 일종의 동호회를 결성하여, 사람들과 자주 만나 시문과 학문에 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주위에 큰 영향을 미쳐 그들의 글을 소위 검서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의 시는 형식주의에 빠진 당시의 시와는 달리 간결한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들이 나중에 검서관이 되었으므로 검서체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들은 다양한 시의 소재를 얻기 위해 오래된 책과 특이한 물건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유득공은 호랑이에 관한 글을 써서 『속백호통(續白虎通)』이란 해학적인 이름을 붙인 책을 편찬하였다. 또한 여러 종류의 집비둘기에 관한 책인 『발합경(鵓鴿經)』, 『동연보(東硯譜)』등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유득공은 이서구가 자신이 기르는 푸른 앵무새에 대한 시문을 모아 『녹앵무경(綠鸚鵡經)』을 편찬하자, 이덕무와 함께 평을 하기도 하였다.

유득공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감상을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1773년 이서구와 함께 북한산(北漢山)을 구경하였고, 3월 25~4월 8일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평양을 구경하였다. 이 때 「서경잡색(西京雜絶)」(15수), 「송경잡색(松京雜絶)」(9수) 외에 14수의 기행시를 남겼다. 이 무렵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등은 시문 등을 모아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을 편찬하였다.

이들이 지은 시는 청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명성이 있었다. 유득공이 29세 되던 1776년 11월 그의 작은아버지인 유련이 서호수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가게 되자, 유득공과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의 시를 100편씩 모아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편집하였다. 이 책에는 이덕무의 시가 맨 앞에 실렸고, 그 다음은 연령순으로 유득공, 박제가, 그리고 이서구의 시가 실렸고, 덧붙여 약간의 설명과 작가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 책은 청나라의 이조원과 반정균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4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다.

유득공은 1779년 이덕무, 박제가, 그리고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奎章閣)의 초대 검서관으로 등용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규장각은 정조 즉위 직후인 1776년 3월에 착공해서 그 해 7월에 완성되었다. 여러 건물을 건립하여 관원을 두고 규장각 업무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같은 해 9월부터였다.

규장각은 역대 군주들의 어제와 어서 등을 정리 보관하였다. 그리고 각종 도서를 수집하고 편찬하였으며 소장된 도서를 절차에 따라서 출납하였고, 한편 규장각의 각신들은 국왕의 곁에서 자문을 하기도 하였다.

검서관은 1779년 홍국영의 제안에 따라 재주 있는 서얼들을 각신이 시험을 쳐서 선발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거쳐 6월에 초대 검서관으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가 발탁된 것이다.

검서관은 일정한 녹봉이 없었지만, 편찬이나 교정 등의 업무가 끝나면 왕으로부터 하사품을 받았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지방관이나 경관직에 임명되었다. 검서관은 잡직 9품에 불과하였지만, 국왕의 신임을 받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유득공은 검서관으로 있으면서 『고금도서집성』의 부목을 베끼고, 『궁원의』와 『동방인물고』등을 교정하는 한편 궁궐에 소장된 서적을 관리하였다. 유득공은 검서관으로서의 일정기간을 지낸 후에 지방관 임명되었으나, 편찬이나 교정할 일이 있으면 수시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에도 유득공은 『사서삼경』, 『정리통고도설』, 『충무공전서』, 『육진약선』, 『무경칠서』, 『양대사마실기』, 『홍재전서(弘齋全書)』간행에 간여하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799년에 박제가와 함께 영원히 규장각 검서관을 겸대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유득공은 금정찰방, 포천현감, 양근군수, 가평군수, 풍천부사를 지냈고,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우선 포천(抱川)에 부임했을 때 양정(良丁)을 조사하는데 큰 성과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양정은 국가에 대해 각종 의무를 져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양정은 국가의 의무를 의도적으로 피하였다. 이로 인해 명부에는 양정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고, 그나마 명부에 실린 양정들조차도 가난하여 국가의 의무를 부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전들의 농간까지 겹치면서 고을 전체가 텅비는 일도 비일비재 하였다. 유득공은 양정을 조사하기 위해 환곡을 이용하였다. 가난한 백성들이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자들의 보호를 받아, 국가의 의무를 피하는 것이 대개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인 상황에서 국가에서 곡식을 나누어 주면 양정 조사가 수월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득공은 양근(楊根)에 부임하여 지방호족들이 양근 지역민에게 행패를 부린 일을 조사하였다. 그는 『대전통편(大典通編)』의 법조문대로 지역민을 폭행한 양반들을 처벌하였다. 이 일로 그의 명성은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5 세 번의 중국여행으로 견문을 넓히다.

유득공은 북경을 2번, 심양을 1번 모두 3차례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유득공은 다른 북학파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공무를 수행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중국의 학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를 통해 역사·지리·정치·풍속 등의 지식을 주고받았다. 또 귀국 후에는 그 동안의 경험을 시문으로 기록하였고, 이는 『난양록』과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유득공은 1778년 7월 건륭제 문안을 위해 가는 사신단의 정사 이은(李溵)의 수행원으로 처음 중국에 가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유득공은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전부터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를 자주 읽고 있었는데, 이때 중국에 다녀오면서 한반도의 북부와 만주일대에서 일어난 고구려와 발해 등의 역사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발해고(渤海考)』를 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790년 유득공은 부사 서호수의 수행원이 되어 건륭제의 팔순절에 참가하는 사신단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유득공은 이 때 이전에 조선 사신단이 가보지 않은 길로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목적지가 북경에서 열하로 바뀌면서, 처음 가는 길로 심양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심양에 도착한 후에 열하로 가면서 유득공은 함께 사신단의 일원으로 가게 된 박제가와 이전에 조선사람이 간 적이 없는 길로 열하로 가게 되었다. 이전에 열하를 방문한 사람은 박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열하에서 심양까지의 길을 가지 못하였고, 다만 그 노정을 물어 정리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유득공이 처음으로 그 길을 따라 열하에 가게 된 것이다. 열하에서 일정을 마친 유득공은 연경으로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유득공은 박제가의 안내로 중국 학자를 만나게 되었고, 반정균에게 세시풍속 연구도 권유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세시풍속을 관한 책인 『경도잡지(京都雜志)』저술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비록 고생은 많았지만 이전부터 역사지리에 관심을 가졌던 유득공에게는 북방의 요로를 직접 경험할 수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이는 한사군의 역사에 관한 『사군지(四郡志)』 저술의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중국여행은 1801년 사은사 조상진을 따라 주자서를 구하기 위해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 당시 유득공은 풍천부사에서 파직되어 있었다.

그는 북경에 도착해서 지인을 통해 주자서 선본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청나라의 학풍이 주자서를 보지 않은 지 오래되어 결국 구할 수 없었다.

6 역사와 지리에 관한 저술을 남기다.

유득공은 다양한 분야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현재 전하는 유득공의 저서는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발해고』, 『난양록』, 『연대재유록』, 『경도잡지』, 『사군지』,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영재집(泠齋集)』등이 있다. 그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점을 고려하면, 『발해고』, 『사군지』, 『경도잡지』는 그의 생각을 이해함에 있어 특히 중요하다.

검서관으로 있으면서 유득공은 규장각에 소장된 많은 책을 보면서, 역사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북방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발해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이러한 결과로 1784년 『발해고』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발해고』는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를 참고하였다. 이를 통해 유득공은 발해사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남북국시대론으로 정리하였다. 『발해고』에서 유득공은 발해와 고구려의 관련성을 강조하였으며, 발해와 신라가 양립된 남북국시대를 한국사 체계에 도입하였다.

『발해고』는 서문 이외에 군고, 신고, 지리고, 직관고, 의장고, 물산고, 국어고, 국서고, 속국고 등 9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고는 발해 왕에 대한 기록이고, 신고는 발해의 신하와 학자, 외교관에 대한 내용이다. 지리고는 발해의 지형에 관한 내용, 의장고는 품계에 따른 복식 및 의장, 물산고는 특산물, 국어고는 발해의 언어, 국서고는 주로 일본에 보낸 국서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끝으로 속국고는 발해가 거란족에 의해 망한 후에 발해의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정안국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하면서 『신당서』 이외에 『구당서』를 비롯한 17종의 중국서적과 『고려사(高麗史)』,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등 한국의 역사서, 『속일본기』, 『일본일사』등의 일본사서를 참고하였다.

『이십일도회고서』는 유득공이 지은 한시로 단군의 왕검서에서 고려의 송도에 이르기까지 21개의 수도를 읊은 작품이다.

『이십일도회고서』는 유득공이 31세였던 1778년에 문과에 급제할 가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동국지리지』를 읽다가 문득 생각나는 내용을 읊조리자 그것을 듣고서 어린아이와 계집종들이 따라 외웠다고 한다.

유득공은 이 시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졌고, 어린이 교육용으로 쓸모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사군지』는 한사군에 관한 역사서이다. 구성은 지리지 형식을 참고하여 표, 연혁, 산천, 사실, 명환, 인물, 봉작, 방언, 토산, 고적, 제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유득공은 한사군이 삼국으로 이어지는 원인을 한인(漢人)에 대한 토착세력의 저항에서 찾고 있다. 그 결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조선시대를 거쳐, 4군시대 2군시대, 그리고 3군시대를 지나 삼국의 정립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러한 유득공의 견해는 조선후기 한국사의 무대를 북방 만주대륙으로 확대한 일부 역사가의 역사인식체계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이 밖에 유득공은 『경도잡지』를 저술하였다. 『경도잡지』는 24절기에 따라 치르는 명절행사와 서울 사대부의 의식주와 각종 의례를 기록한 내용이다. 이 책은 역사학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민속학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