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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柳成龍]

임진왜란을 극복하다

1542년(중종 37) ~ 1607년(선조 40)

유성룡 대표 이미지

유성룡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안동 명문 가문의 후예

유성룡(柳成龍)은 1542년(중종 37)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07년(선조 40)에 세상을 떠난 조선 중기의 대표적 관료이며, 이황(李滉)의 학맥을 계승한 남인 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난 곳은 외가인 경상도 의성현의 사리촌이다. 유성룡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선대는 본래 고려의 향리였는데 그의 6대조인 유종혜(柳從惠)가 안동 풍산읍의 하회마을에 정착하면서 넓은 농장을 경영하며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되었고, 증조부인 유자온(柳子溫)이 진사에 합격하면서 사림의 일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부인 유공작(柳公綽)은 서울로 올라와 관료생활을 하면서 그 아들인 유중영이 관찰사, 승지 등의 요직을 역임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유성룡의 호는 서애(西厓)인데, 이는 안동 하회마을을 흐르는 강 옆의 절벽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생활을 서울에서 있으면서 수학하였는데, 4세에 글을 읽고 6세에 『대학』을, 8세에 『맹자』를 읽는 등 어릴 때부터 학문에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21살에는 예안의 도산서당으로 가서 퇴계 이황을 방문하여 『근사록』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제관계를 맺었다. 이 때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유성룡은 이들과 함께 영남학파의 3대 영수로 꼽히게 된다.

유성룡은 관료생활을 하던 중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만연하던 양명학의 분위기를 크게 비판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황이 글을 보내서 “양명학이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려하는 때에 공이 그 혼미함을 지적하였으니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며 칭찬하였다는 일화에서 유성룡의 학문적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영남학파의 학맥은 크게 유성룡과 김성일 계열로 양분되는데, 이와 관련된 ‘병호시비’라는 사건이 있다. 이 일은 유성룡과 김성일의 집안이 ‘누가 이황의 적통 제자인가’의 문제를 두고 다툰 것을 말한다. 사건의 시작은 이황의 위판을 모신 여강서원에 김성일과 유성룡의 위판을 모시는 문제에서 누구를 상위에 둘 것인가로 양 집안이 논란이 벌어진 것으로, 이때는 정경세(鄭經世)의 중재로 관직이 높았던 유성룡이 상위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순조(純祖) 대에 이르러 문묘종사를 청원하는 상소에 누구의 이름을 먼저 올릴 것인가의 문제로 다시 갈등이 시작되어 쭉 계속되었다. 고종[조선](高宗) 대에 재상이었던 유후조(柳厚祚)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강력한 의지로 이를 봉합하였으나, 표면적인 것이었을 뿐 양쪽 집안의 반목은 그 뒤로도 지속되었다고 한다. 병호시비는 영남학파와 안동지역에서 유성룡과 그의 가문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화이다.

2 시대적 배경

유성룡이 주로 정계에 나아가 관료 생활을 했던 때는 조선 선조[조선](宣祖) 때이다. 흔히 선조 재위 기간을 일컫는 말로 ‘목릉성세’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는데, 이 시대에 훌륭한 학자들과 문인들이 대거 배출되어 풍요롭고 수준 높은 문화를 구가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렇게 당시를 평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시기의 정치문화와 정치세력이다. 선조 대는 소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는 시기로 알려져 있다. 왕실의 외척과 공신세력 등이 정권을 잡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배움의 과정을 통해 연마하여 ‘공론(公論)’을 통해 새로운 정치문화를 이끌 준비가 되어 있던 ‘사림(士林)’들이 이 시기에 대거 조정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이전 시대의 선배 사림들에 대한 추모, 제향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공고하게 하고, 경연을 통한 국왕의 배움을 강조했으며, 재야에 있는 덕망 높은 선비들을 조정으로 초청하는 등의 정치문화를 확립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도 구체적인 정치 사안과 지향점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당이 이루어진다. 그 대표적인 계기로는 이조전랑 자리를 둘러싼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갈등을 꼽지만, 이전부터 척신 세력 등의 구세력을 척결하는 문제로 서인과 동인은 이견을 보였다고 한다. 유성룡은 학파는 이황을 스승으로, 지역적으로는 영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동인으로 분류된다.

선조 대에 일어났던 가장 큰 사건을 들자면 단연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이 전쟁은 수군과 의병, 명군의 원조 때문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패한 전쟁은 아니지만, 전쟁 초반 관군이 너무 쉽게 일본군에 무너지면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 선조를 비롯한 위정자들에게는 뼈아픈 것이었다. 그것은 전쟁을 대비하는 위정자들의 태도가 안일하였다는 점과, 조선 초에 성립된 군사제도가 대책 없이 붕괴되고 있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으로부터 종묘사직을 지켜내야 했던 막중한 임무 외에도 7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파괴된 조선의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백성들의 임금과 조정에 대한 불신,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 등 전쟁 중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유성룡은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은 각종 기록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에서 뿐만이 아니라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懲毖錄), 『녹후잡기(錄後雜記)』 같은 저작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3 순탄한 관료 생활

유성룡은 25세가 되던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약 30년간 그의 관료로서의 생활은 몇 개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평탄하고 순조로웠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명재상이라는 타이틀에 부합하는 관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관료 생활은 크게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전반기는 유성룡이 48세때 이조판서가 되기 전의 시기이다. 이때는 대체로 예문관, 성균관, 홍문관, 사간원 등의 언론기구에서 근무하거나 6조의 좌랑을 역임하는데, 이러한 관직은 ‘청요직’이라 하여 주요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엘리트 코스였다. 특히 그가 역임한 홍문관의 수찬, 교리, 응교 등의 관직은 경연에 참여하여 임금에게 경서의 뜻을 말해주는 임무가 있기 때문에 임금의 측근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선조에게 ‘오늘날을 대표하는 군자’라는 말을 들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그가 역임하였던 이조좌랑은 이조정랑과 더불어 이조전랑(吏曹銓郎)이라 불리며 삼사 관원에 대한 통청권을 가진 자리였기 때문에 엄청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는 외직으로 나가기보다는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며 40세 이후에는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도승지,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는 유성룡이 명실상부 언론기관의 수장으로서 동인과 서인의 논쟁과 갈등을 봉합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례로, 이이(李珥)가 동인과 서인간의 화해를 이야기 하다가 소인으로 비판받을 때, 친구인 김우옹(金宇顒)에게 편지를 보내서 동인의 이이 탄핵을 억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여립(鄭汝立)에게 ‘거간’으로 지목되는 등의 시련도 있었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쏟아지는 불필요한 오해들과 정치적 비난들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노모의 봉양, 부인의 요양 등을 이유로 벼슬을 제수 받고도 안동에 내려가 은거하였다는 점에서 유성룡의 세련된 정치적 처신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의 나이 44세부터 47세의 기간은 은거 기간임과 동시에 그가 이후 전쟁 기간 동안 관료 생활을 할 때 발휘될 통찰력과 경륜을 비축하는 기간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4 어려운 시기에 재상의 소임을 다하다

유성룡은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그 뒷수습의 과정에서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북인(北人)과 서인의 대립이었지만 남인(南人)이었던 유성룡도 전라 유생 정암수의 지척을 받는 등 정치적인 불똥을 피해갈 수는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특지로 유성룡을 이조판서로 삼는 등 신뢰를 보이다가 일이 거의 마무리 되는 이듬해에 그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이례적으로 유성룡은 우의정 겸 이조판서, 좌의정 겸 대제학 등의 정부요직에 중복 제수됨으로써 분분한 당론을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관료로 인정받게 된다.

유성룡이 재상으로서 다시 중앙에서 관료 생활을 하게 된 때는 이미 국외 정세가 심상치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부차원에서도 일본에 대한 외교적・군사적 대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지 말고 중국과 함께 일본을 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의견은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서라도 통신사를 파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온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의 보고는 비록 상반되기는 하였지만, 유성룡을 필두로 하여 조정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이순신(李舜臣)과 권율(權慄) 등을 장군으로 발탁하여 군사 요지의 업무를 맡기고, 이전의 제승방략을 진관체제로 개편하는 등 나름의 대책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쟁 초기에는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선조를 비롯한 조정은 빠른 속도로 북진하는 일본군을 피하여 피난을 떠났는데, 심지어 요동으로 피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였다. 이 때 유성룡은 한 번 중국으로 발을 들이면 조선은 더 이상 우리의 땅이 아니라며 그 논의를 기각시켰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유성룡은 전쟁 발발의 책임을 물어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를 파직하자는 건의가 있을 때 같이 파직되었다.

그러나 급한 사안이 여기저기서 발발하는 전시 상황에서 그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정 일에만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형식으로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명나라 군대에 대한 지원업무를 계속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에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이 평양 탈환에 성공하고 4월에는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해에 장기 주둔하기 시작한 때이다. 조정은 이에 서울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때부터 일본군과 명군 사이의 지리한 강화교섭이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이렇다 할 주도권을 갖지 못한 조선은 피폐해진 민생을 돌볼 사이도 없이 주둔하고 있는 명군의 물자를 대기에 바빴다. 유성룡은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사실상 한반도 이남의 지휘권을 갖게 되었고, 이어서 10월 달에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5년간 지속된 강화교섭은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하였다. 그에게는 명의 강화론에 대응하여 조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 일본군을 남해상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 민생을 돌보아야 하는 등의 책임이 주어졌다. 그는 맡은 바 임무에 전력을 다했으나, 북인계열의 정치적 공격과 1597년(선조 30) 1월 이후 정유재란을 계기로 다시 조정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유성룡이 늙고 병들어 힘에 부친다는 이유로 중국에 사신가기를 거부했던 일에 대해 선조가 고려의 충신 정몽주와는 비교되는 처사라며 서운함을 드러내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별다른 변명을 하거나 마음을 바꾸지 않고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내려간 유성룡은 1600년(선조 33) 스승 퇴계 이황의 연보를 작성하고 7년간 전쟁의 실상을 기록한 『징비록』을 쓰는 등 조용히 저술활동에 침잠하면서 오랜 벼슬살이에 지친 심신을 위로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그를 서용하겠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다가 1607년(선조 40) 5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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