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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원[柳壽垣]

이용후생을 주장한 실학자

1694년(숙종 20) ~ 1755년(영조 31)

유수원 대표 이미지

우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불운으로 점철된 시대의 희생양

유수원(柳壽垣)은 조선 후기의 관료·학자이다. 소론(少論) 강경 계열의 가문에서 태어나 정치적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되어 순탄치 못한 관직 생활을 하였으며, 끝내 대역죄인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귀도 먹는 등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인생을 보냈으나, 뛰어난 학식은 동시대 학자들에게도 인정받은 바 있으며 후대에 실학자 중 하나로 재조명받았다.

2 탕평이 시작되었으나...

유수원이 태어난 때는 조선 후기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폐단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조선 후기 상호 균형과 견제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붕당정치가 발전하였으나, 점차 이 원리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흔히 당쟁(黨爭)이라 묘사되는 폐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숙종대 여러 번의 환국을 거치면서 주요 인물들이 사사(賜死)당하는 등, 붕당간의 정쟁이 점점 과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1680년(숙종 6) 서인(西人)이 집권한 경신환국(庚申換局)의 결과로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許積) 등이 죽임을 당하였고, 1689년(숙종 15)에는 원자정호(元子定號)와 장희빈(張禧嬪)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南人)이 다시 정권을 잡고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이 사사(賜死)당하였다. 1694년(숙종 20)에는 다시 인현왕후(仁顯王后) 복위 문제를 둘러싸고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벌어져 서인이 집권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인 민암(閔黯)이 사사(賜死)당하고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등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책임을 지는 것은 오늘날에 와서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겠으나, 그 책임이 죽음으로 보상하는 것이라거나 집안이 몰락하는 것이라면 지나치게 격화된 양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싸움의 결과로 일당(一黨)의 전제정치(專制政治)가 확립되었다는 것은 붕당정치 본연의 목표와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도 붕당정치의 폐해를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 끝에 영조(英祖), 정조[조선](正祖)에 의해 제시된 것이 바로 탕평정치(蕩平政治)이다. ‘탕평(蕩平)’이란 본래 『상서(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등장하는 개념으로, 왕의 정치가 치우치거나 사특함이 없는 지극히 공정한 경지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붕당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노론(老論) 및 소론의 강경파들을 처단하고 온건론자인 완론파를 고루 등용하는 완론탕평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강경파를 처단하는 과정에서의 부작용도 계속되었다. 집권 초기의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이나 소론 윤지(尹志) 등이 일으킨 ‘을해옥사[나주괘서사건](乙亥獄事(羅州掛書事件))’ 등은 끊임없이 정계에 파란을 가져왔고,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안정이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3 정쟁의 한가운데에 태어나다

유수원의 끝이 불행했기 때문에 그의 가계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행히 그는 문과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사마방목(司馬榜目)』이나 『문과방목(文科榜目)』의 기록 등을 통해서 그 가계의 대강을 파악할 수는 있다.

유수원의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문화 유씨는 조선 초기부터 유명한 사대부 가문으로, 세종대 재상을 지낸 유관(柳寬)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유수원의 시대에도 명문의 기풍은 이어졌다. 조부 유상재(柳尙載)는 시강원 보덕으로, 경종[조선](景宗)의 세자 시절 교육을 담당하였을 정도로 학식을 인정받았다. 유상재의 형 유상운(柳尙運)은 소론계 관료로서 숙종 대에 영의정까지 역임하였으며, 그 아들 유봉휘(柳鳳輝) 또한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유수원의 증조부 유성오(柳誠吾)는 반남 박씨 가문과 혼인하였는데, 반남 박씨가 또한 박세채(朴世采), 박세당(朴世堂) 등을 배출한 소론계 명문 가문이었다.

비록 유수원의 아버지 유봉정(柳鳳庭)은 별다른 관직 없이 충주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이지만, 유수원의 가문은 당대에도 소론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명문의 위광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붕당정치가 격화되는 시기에 한 정파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탓일까, 그의 가문은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유수원은 1694년(숙종 20) 충청도 충주목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갑술환국으로 인해 서인 정권이 탄생한 때이기도 하다. 여타 학자들에 대해서는 행적자료가 상당수 남아 있어 영특한 자질 등, 그 어린 시절의 일화들을 소개하지만, 유수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어떠한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웠는지 평소 성품이 어떠하였는지 전혀 알 수 없어 아쉬운 대목이다.

유수원은 1714년(숙종 30)에 진사시(進士試)에 3등으로 합격하였는데, 이 당시 그는 이미 아버지를 여의었던 상태였다. 본가는 명문이라 하더라도 지방 출신으로서 아버지도 없었다는 점으로 볼 때, 그의 어린 시절이 그리 순탄하거나 희망으로 가득차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4 순탄치 못한 관직 생활

1718년(숙종 44) 25세 되던 해에 유수원은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몸담게 되었다. 관직 생활 초기 그는 주로 가주서(假注書)로 활동하였다. 가주서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담당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이 시기 유수원은 아직 귀가 멀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1719년(숙종 45)에는 부사정(副司正)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 등으로 활약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12월에는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약 10여일 뒤에 다시 사간원 정원으로 임명되기는 하지만, 병이 매우 중하다는 기록으로 봐서 이 때 얻은 병으로 인해 귀가 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시기 유수원은 병환보다도 정계의 동향으로 인해 더욱 고통받게 된다.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경종이 즉위하였다. 당시 경종은 건강에 물음표가 붙은 상태였으며 후손 또한 없었다. 또한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로 그녀의 문제로 인해 환국을 겪으며 거두 송시열을 잃기도 했던 노론의 입장에서는 경종의 즉위가 썩 달갑지 않았다. 결국 노론의 주도로 경종의 동생 연잉군(延仍君)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다. 이 때 유수원의 종숙(從叔) 유봉휘는 소론 강경파를 대변하여 왕세제 책봉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노론은 당연히 유봉휘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소론 온건파의 영수 우의정 조태구(趙泰耈)는 유봉휘를 두둔하긴 하였으나, 왕세제 책봉을 취소해달라는 유봉휘의 요구는 잘못된 것이라 단언하여 소론 내부에 싸움의 불씨를 남겼다.

노론과 소론 간의 갈등은 결국 대규모 옥사를 불러왔다.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이 당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던 노론의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4대신을 두고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라며 고발하여, 4대신을 비롯한 노론계 인사들이 처벌받은 것이다. 이어 목호룡(睦虎龍)은 노론 측에서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고변하여 대옥사가 벌어졌다. 이를 신임사화(辛壬士禍) 또는 임인무옥(壬寅誣獄)이라 한다. 이로 인해 노론 4대신은 사사되었으며 노론계 인물 상당수가 죽거나 처벌받았다. 노론을 숙청한 소론 강경파의 화살은 조태구 등 소론 온건파로 향하였으며, 그 짐을 떠안은 것이 바로 유수원이었다.

유수원은 1723년 2월 당시 영의정이던 조태구를 맹렬히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민생, 기강, 정령(政令)의 문제가 당시 소론 온건파 대신들 때문이라 주장한 것이다.

그 결과 유수원은 외직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경상도 예안의 현감으로 발령받은 것이다.

이내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유수원을 경박하고 일을 일으키기 좋아한다는 이유로 파직시키기를 청하여, 유수원은 부임지 예안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4월 유수원은 다시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 몇 개월 뒤 유수원은 다시 벼슬에 임명되었다. 낭천(狼川)의 현감 자리, 강원도의 궁벽한 시골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중앙정계에서 잠시 떠나 있고 싶었던 것일까. 유수원은 임명된 지 한 달 후 경종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부임지 낭천으로 향하였다. 지방으로의 좌천, 이후 그의 순탄치 못한 앞길을 보여주는 듯했다.

1724년 8월 경종이 승하하고 노론의 지지를 받던 영조가 즉위하였다. 비록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노론과 소론을 모두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였지만, 강경파를 제외한 온건파 중심의 탕평이었기 때문에 소론 강경파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유수원의 종숙 유봉휘가 신임사화의 주역으로 몰려 1725년(영조 1) 3월 유배에 처해졌다. 또한 정국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난을 일으켰으니,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난을 평정하고 주모자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자중하고 있던 유수원에게까지 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유수원 스스로도 조태구를 논박했던 자신의 행위를 책임지려 하였던 것인지, 이후 종종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쉽사리 나아가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 또한 곱지 않았다. 1735년(영조 11) 유수원은 태천현감(泰川縣監)에 임명되어 부임지로 향하였는데, 당시 교리(校理)였던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여 유수원의 임명이 공의(公義)에 어긋난 것이라 비판하였던 것이다. 영조가 이 상소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소론 강경파로 찍혀있던 그에게 의혹의 눈초리가 계속 쏟아졌던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또한 그는 이 때 즈음에는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5 뛰어난 학식만은 빛을 발하는데

비록 소론 강경파로 낙인찍혀 벼슬살이가 순탄치는 않았지만, 그의 학식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였다. 귀는 먹었을지라도 마음만은 그렇지 않아 학식이 매우 뛰어나다며 유수원을 변호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며, 유수원과 같이 학식이 높은 인물이 영선(瀛選)에서 누락된 것을 안타깝다는 상소가 올려지기도 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수원의 저서 『우서(迂書)』가 완성된 것도 이즈음이다. 『우서』는 유수원의 국가 개혁론이 담겨져 있는 그의 필생의 역작이며, 순탄치 못한 관직생활 동안 맺혀져 있던 울분을 표현한 글이기도 하다. 그 스스로도 미쳐서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 논의가 세상에 시행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냐며 자조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 제도의 문제점, 문벌 가문의 폐단을 논한 것 등은 실로 조선의 정치 및 사회의 병통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으로, 국가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유수원의 주장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유수원은 사민(四民), 즉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서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여 귀천이 없는 세상을 이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비록 종래 신분질서의 모순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극복하고자 한 것은 아닐지라도, 당시 신분제도와 그와 연관된 경제적 폐단을 지적한 것으로 주목할 만한 견해이다.

또한 유수원은 『우서』에서 상세(商稅)와 전매사업 강화, 상인 허가제, 화폐 정책 개선 등을 주장하여 상공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 양상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영조와 정조 등 탕평군주들도 주목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유수원의 『우서』는 비록 그 주장을 온전히 실현할 수는 없던 것이었지만, 그 논의가 지적하고 있는 조선 사회의 문제점은 여타 학자 및 관료들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우서』는 국왕에게까지도 소개되었다. 1737년(영조 13) 10월 유수원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조정에서는 이광좌(李光佐), 이종성(李宗城), 조현명(趙顯命) 등 대신들이 유수원의 『우서』를 추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후 『우서』를 읽어 본 영조는 비록 그 내용이 우활한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논의가 뛰어난 부분들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결국 영조는 유수원을 비변사의 문랑(文郞)으로 임명하여 그 재주를 헛되이 썩히지 않도록 조처하였고 며칠 뒤 정언(正言)에 임명하였으나, 여러 기록을 볼 때 유수원은 외직을 제외한 관직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741년(영조 17) 2월 영조는 조현명의 추천으로 인해 오랫동안 관직에 나오지 않고 있던 유수원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이 때 그는 영조에게 관제 개혁안인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바쳤다. 영조는 이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귀가 이미 들리지 않는 유수원에게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필담(筆談)도 불사했던 것이다. 붕당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는 영조에게 유수원의 개혁안이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수원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영조는 예문관 한림(翰林)들이 가지고 있던 추천권을 붕당의 폐단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하고 이를 혁파하기에 이른다. 이 조치는 실로 유수원과의 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유수원의 학식은 이미 널리 인정받아 수차례 벼슬이 내려졌지만, 그는 귀가 들리지 않는 문제 등으로 거의 나아가지 않았다.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편찬에도 잠시 참여한 것으로 보이나 이 또한 완성까지 책임지지는 않았다.

6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벼슬살이에 거의 나아가지 않으며 자중하고자 한 유수원이지만, 소론 강경파로서의 꼬리표는 늘 그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1755년(영조 31) 2월 윤지(尹志)의 나주괘서사건, 5월 신치운(申致雲)의 역모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소론에 대한 대거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유수원 또한 연루되고 만 것이다. 영조의 친국(親鞫)에서 유수원은 혐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역모의 주모자들을 단순히 알고 지냈던 것에서 더 나아가, 그들과 어울리며 흉언과 패설을 일삼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순탄치 못한 벼슬살이와 고질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던 것일까, 소론 강경파로서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려 한 것일까. 결국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7 사후에도 계속된 불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탓일까, 유수원에 대한 정보는 몇몇 기록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필생의 역작인 『우서』는 일제 시대 도서정리사업에서부터 주목을 받았으나, 저자가 바로 유수원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유수항(柳壽恒)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기록되기까지 하였다. 결국 저자가 유수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실학자로서 다시 조명을 받긴 하였지만, 사후 『우서』를 두고 벌어진 해프닝은 그의 인생만큼이나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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