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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柳子光]

임금의 총애에 울고 웃다

1439년(세종 21) ~ 1512년(중종 7)

유자광 대표 이미지

학사루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서자라는 멍에

유자광(柳子光)은 1439년(세종 21) 태어나서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내리 다섯 임금을 모시며 두 번이나 공신으로 책봉되고 군(君)의 칭호까지 받는 등 대단한 영화를 누리다가 1512년(중종 7)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그의 사후 이루어진 그에 대한 평가는 사류들을 탄압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정치적 술수를 부린 소인, 간신이었다는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더불어 여러 야사들에서는 유자광의 어린 시절 기행과 난행들도 전하고 있는데, 서자로 태어났던 그의 출생상의 하자와 맞물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자광은 경주부윤을 지낸 영광 유씨 유규(柳規)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 초기에 현달한 가문이었다. 조부인 유두명(柳斗明)이 정3품 대언을 지냈으며, 아버지인 유규는 집안의 명망을 업고 음직으로 출사하여 종2품인 부윤까지 지낼 수 있었다. 서자로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어느 사대부 못지않은 명망과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서자는 차별의 대상이었다. 자원의 무분별한 분배를 막고 특권과 지위를 한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도태의 대상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제가 존재하던 전근대사회에서 적서(嫡庶)의 차별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홍길동전』으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 서얼에 대한 차별의 모습은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있다. 이에 따르면 서얼 자손은 문과에 응시하지 못하고, 관직에 등용되더라고 상한선이 있었다. 명종(明宗) 때에는 서얼 본인에만 한정되지 않고 ‘자자손손’ 차별을 받도록 규정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유자광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여러 야사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비현실적인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유자광의 아버지인 유규가 우연히 낮잠을 자다가 백호가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는 이 꿈이 대단한 인물을 낳게 할 영험한 태몽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나가던 종을 취하여 유자광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러한 설화가 전해지는 것은 그가 서자라는 비천한 출신에 비해 관료로서 크게 영달했기 때문이다. 남곤(南袞)이 지은 「유자광전」에는 유자광이 어릴 때부터 힘이 장사같이 셌고, 몸도 민첩하여 마치 원숭이처럼 높은 곳을 잘 올라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무뢰배 행세를 하면서 도박을 하거나 여자를 함부로 겁탈하는 등 비행을 일삼아서 아버지가 자식 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시에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에는 유자광의 아버지가 유자광의 재기 넘침과 학문적 총명함을 매우 사랑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상반되는 듯하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가 어릴 때부터 남들에 비해 두각을 나타내는 소위 ‘튀는 아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파격적인 출사

유자광은 서자라는 출생의 한계는 있었지만 집안 덕에 왕의 호위와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갑사(甲士)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일개 갑사에 불과하였지만 14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세조의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에 불만을 품고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난을 진압하고 이시애의 머리를 베어 바치겠다는 호방하고 용기 넘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세조의 마음을 사고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어서 그 해 6월 유자광은 정식으로 겸사복에 임명되며 출사의 첫 길을 열었다. 유자광은 세조에게 난을 진압할 수 있는 방략을 몇 가지 건의하였고, 몇 달 뒤에 난이 진압되었다. 물론, 유자광의 계략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지략과 이를 전달하는 글이나 말솜씨가 세조의 마음을 샀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세조는 유자광을 허통시키고 정 5품 병조정랑에 임명하였다. 당연히 그가 첩의 아들이며 과거를 본 적도 없이 그런 비중있는 자리를 얻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으로 대간(臺諫)을 중심으로 반대하는 신료들이 항의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유자광의 재주가 모두를 능가할 만큼 뛰어나며, 자신이 특별히 은혜를 베푸는 것이므로 반대하지 말라고 일축하였다.

유자광은 다음해에 세조의 온천 길에 수행하다가 과거 별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기까지 하였다. 처음에 그의 답안은 탈락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그가 탈락한 이유를 신숙주(申叔舟)에게 묻고 믿을 수 없다면서, 시험지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장원으로 올려버렸다. 그리고 유자광을 정 3품 병조참지에 제수하였다. 그의 출사도 파격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의 출세 속도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유례가 없는 이런 일 때문에 그는 지속적으로 언관들의 표적이 되었다. 단지 그가 받은 특별한 대우 때문만이 아니라 유자광이 보여주는 출세의 방식 때문이었다.

3 남이 옥사의 고변과 공신책봉

유자광은 세조의 뒤를 이어 20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된 예종의 총애도 얻게 되는 행운을 누린다. 그 계기는 유자광이 남이(南怡)의 역모를 고변한 것이었다. 남이는 평소에 한명회(韓明澮)나 김국광(金國光) 등 세조 시대의 훈신들의 전횡을 비판하며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유자광에게 말해왔다고 한다. 어느 날, 남이가 유자광에게 와서 혜성의 빛이 이상하니 반드시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필 때가 왔다고 하였는데 유자광은 이를 모반의 징조로 생각했다. 그래서 임금에게 달려가 즉시 남이가 모반을 꾀할 것이라는 고변을 하였다. 남이가 국청에 끌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순순히 역모를 인정을 하여 관련자들이 처벌되고 남이도 불과 26세의 나이로 처형당했지만, 이 옥사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남이와 같이 모의자로 고변된 강순이라는 사람은 80세가 넘은 노인이었고, 남이의 일당으로 지목된 사람들의 수도 얼마 되지 않아서 임금을 몰아내려는 역모의 규모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것이 예종 즉위년에 일어난 남이 옥사의 전말이다.

어찌 되었건 유자광은 이 일로 인하여 크게 포상을 받았다. 익대공신에 가장 먼저 봉해졌으며,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을 추가로 인정받아 적개공신 2등에 추록되었다. 남이가 살던 집을 하사받고 그 해 11월에는 ‘무령군’으로 봉해지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첩의 신분인 유자광의 생모를 정부인으로 봉하면서 외명부의 작위를 내리고, 그의 자손들 대대로 은혜를 베풀겠다는 언질까지 주었다. 유자광에 대한 예종의 신뢰와 지원이 남달랐다는 증거이다. 그는 성종 초반까지 문제없이 조정에 머무르면서 기민한 정치 감각을 발휘하여 시대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살아남았다. 성종 대는 세조대에 양산되었던 많은 공신 세력들이 연로하여 자연스럽게 퇴진하거나 사망하는 시기로, 본격적인 세대교체기의 서막을 열었던 시기이다. 나이로 따지자면 유자광도 신세대에 속했지만, 그가 출사해서 높은 자리에 오른 방식은 정식 경로를 거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상 공신 세력과 비슷하였다.

유자광은 정치적 행보에 있어 국왕의 즉각적인 처분이나 옹호에 의지하는 경우가 컸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국왕조차 감싸주기 힘든 경우에 미치는 상황에서는 종종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성종 때 조식(趙軾)이란 사람이 일찍 과부가 된 누이의 노비와 땅을 빼앗고, 누이가 다시 김주라는 사람과 재혼하려 하자 김주를 누이의 강간범으로 고변한 일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한 처결 문제로 당시 승지였던 임사홍과 현석규 사이에 이견이 생겼고, 현석규 측의 판단이 옳다고 결론이 났지만 임사홍이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일이 커졌다. 유자광은 이때 임사홍 등과 붕당을 짓고 남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동래로 귀양을 갔다. 유자광은 이 시기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여죄들이 더해지면서 많은 탄핵을 받았다. 결국 성종의 처분으로 유자광은 4년 뒤 귀양에서 풀려나 이후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실직을 받지 못하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소외되어 절치부심해야 했다.

4 무오사화와 출세가도

유자광이 본격적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연산군 때이다. 물론 그는 좋은 쪽으로 양명(揚名)하지는 못했다. 그는 연산군 때 이미 언관들에게 ‘간신’, ‘소인’이라고 불리며 비판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무오사화가 발생하는 큰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조선시대 내내 용서받을 수 없는 간신이 된다.

1498년(연산군 4) 7월 1일 유자광은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세조의 흠이 될 만한 행적을 여러 가지 적어놓았다며 문제 삼았다. 연산군은 당장 김일손의 사초를 열람하겠다며 거두어갔고, 그곳에는 ‘사육신이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 ‘세조가 큰아들인 덕종의 후궁을 취하려 했다’ ‘단종의 관이 바닷가에 버려졌다’는 등의 충격적인 내용들이 있었다. 당연히 김일손은 세조의 도덕적 정당성과 명분에 큰 흠을 내고 비방한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유자광은 여기에 더하여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지었다는 「조의제문」을 연산군에게 직접 바쳤다. 이 글은 초나라 의제가 삼촌에게 죽임을 당한 일을 위로한다는 내용으로, 어려운 글이었지만 유자광이 친히 주석까지 달아 이해하기 쉽게 주석을 달아 바쳤다고 한다. 이것도 결국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인 것을 비방하는 내용으로 이해되어 이미 죽고 없는 김종직은 부관참시의 형을 당하였다. 일설에서는 김종직이 예전에 함양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가 졸렬하다고 비판했던 것을 복수했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유자광은 이 일로 연산군의 신임을 얻어서 그 이후 어떠한 비판도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

5 중종반정 가담과 몰락

연산군은 재위 12년 만에 반정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유자광은 중종반정에 적극 가담하여 다시 한 번 정치 생명을 연장한다. 사실 중종반정의 중심 세력은 연산군 시대에 요직을 차지하던 조정의 주요 인물들이었고, 연산군 때의 신하들도 반정으로 퇴진하거나 처벌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자광의 행동이 특이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단지 유자광은 노련하고 뛰어난 지략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반정 중심 세력이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중종반정의 성공으로 유자광은 1506년(중종 1) 68세의 나이로 다시 한 번 공신에 책봉되어 정국 1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여러 신료들의 반대로 실직에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반정 후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유자광에게도 시련이 닥친다. 먼저 그는 무오사화를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을 받았다. 유자광은 이를 의식하여 자신이 먼저 시골에 물러나겠다는 정치적인 제스쳐를 취하였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간의 지속적인 탄핵으로 파직까지 되었다. 이어서 그는 갑자사화를 주도했다는 지목까지 받았다. 유자광은 결국 1507년(중종 2) 4월 광양을 거쳐 평해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의 아들과 손자도 귀양지로 보내졌으며, 공신에서 삭훈되었다. 그 후에도 그를 천민으로 되돌리고 죽여야 한다는 등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결국 그는 73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서자로 태어나 기적적으로 출사하여 기민한 처세술로 변화가 무상했던 시기에 임금의 신임을 얻으며 출세했던 사람으로는 비참한 말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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