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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사명대사)[惟政]

전장에서 백성을 구하다

1544년(중종 39) ~ 1610년(광해군 2)

유정(사명대사) 대표 이미지

사명대사 유정 진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관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조선중기에 활동한 불교 승려이다. 명종대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직지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청허 휴정의 적전으로 평가받았으며 17세기까지 불교계를 주도하는 사명문파를 형성하였다.

2 출생과 가계

유정에 대한 기록은 다른 승려들에 비해 대체로 상세한 편이다. 교단 내에서의 위상도 높았지만 임진왜란 때 보여준 의승장 활동으로 당대와 후대의 많은 기록에 오르내렸다. 또한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에 스스로 남긴 기록들이 실려 있고 허균(許筠)이 지은 비문인 「사명당송운대사 석장비명(四溟松雲大師 石藏碑銘)」, 제자 해안(海眼)의 「송운대사행적」, 집안 족보인 『풍천임씨세보』 등이 남아 있어 그 간략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호는 사명(四溟), 송운(松雲) 혹은 종봉(鍾峯)이라고 하였으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속가의 성은 풍천 임씨(任氏)이고 속가의 이름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幼)이다. 1544년(중종 39) 10월 17일에 밀양(密陽)의 삼강동에서 임수성(任守成)과 그 부인인 달성 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정의 집안은 선대에 대대로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풍천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증조부 효곤(孝昆)이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할아버지 종원(宗元)은 강계부사를 지냈는데, 증조부가 일찍이 대구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밀양에 살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에는 어머니가 꿈에 흰 구름을 타고 황색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데리고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니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3 성장과 출가

유정은 7세 때 할아버지로부터 『사략』을 배우고 13세 때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비명에는 이와 같은 세속학문의 한계를 느껴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실은 출가 사유가 그 뿐만은 아니었다. 유정은 15세 때 먼저 어머니를 잃고 16세에는 아버지를 잃어 황악산(黃嶽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출가하게 된다.

출가한 후에 『전등록(傳燈錄)』을 배웠는데 배운지 오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뜻을 깨우쳐 나이가 많은 승려들이 오히려 유정에게 와서 물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출가 전에 유정이 얼마나 학문적 이력과 소양을 깊이 쌓았는지 시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정은 출가한지 불과 2년만인 18세에 신유년(1561, 명종 16) 선과에 합격하였다. 유정이 갖추었던 이러한 식견과 재능으로 인해 당시의 여러 저명한 유학자 문인들, 예컨대 박순(朴淳), 이산해(李山海), 고경명(高敬命), 최경창(崔慶昌), 허봉(許篈), 임제(林悌), 이달(李達)같은 인물들과 교류하게 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성룡(柳成龍)의 문집인 『서애집』에서는 유정이 시에 능하고 해서와 초서도 잘 써서 승려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유정은 직지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선종본사인 봉은사[서울](奉恩寺) 주지로 천거되나 이를 사양하고 32세의 나이에 묘향산 보현사에 은거하고 있던 휴정[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을 찾아가 3년간 참선에 몰두하게 된다. 이후에는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금강산 등을 유력하며 수행하였으며,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스승 휴정과 함께 관아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지역 유생들의 상소로 무죄 석방되었다.

4 활동과 업적 : 승병장 활약과 전쟁포로의 송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졌을 때 유정은 금강산에 머물고 있었다. 전세가 급박해 지고 급기야 선조가 궁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정은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군 천오백 명을 모아 순안 법흥사(法興寺)로 갔다. 휴정에게 합세한 오천여 명의 의승군 세력은 그 여세를 몰아 명나라 군대와 함께 왜적에게 함락되었던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승군이 보여준 조직력과 혁혁한 성과는 임금과 조정 대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유정은 휴정의 수제자로서 전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충의의 승려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유정은 휴정을 대신하여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고 군량 조달 및 산성 축조 등 전쟁 지원 사업과 관련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본군과의 강화교섭 과정에서 조정을 대표하여 파견되었고 정세를 분석하여 대비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승병장의 역할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후에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왜로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교 재개와 잡혀간 조선인 포로 송환 등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도총섭을 역임한 유정의 공로는 선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선교양종판사의 직책과 종2품 당상관인 가선대부와 동지중추부사 등을 제수받았다.

승려에게 당상관을 제수하는 일은 당시로서 매우 파격적인 조처였으며 임진왜란에서 유정과 불교계의 공로가 컸음을 조정에서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610년(광해군 2)에 세수 67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여 해인사 서쪽 기슭에 다비하였다. 18세기에 임진왜란기 의승병장의 활약을 높이 평가받아 휴정과 유정 등을 향사하는 국가 공인 사액사가 지정되었다. 유정을 향사하는 곳은 밀양 표충사로 1739년(영조 15) 왕명으로 사액되었다. 이후 스승 휴정을 향사하는 사당으로 1789년 해남 대둔사와 1794년 묘향산 수충사가 사액되자 유정도 휴정 옆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운대사 분충서난록」 과 『사명대사문집』이 남아있다.

5 전란기 불교계의 활약과 교단 위상의 환기 : 청허계 사명문파

1575년(선조 8)에 유정은 묘향산에 은거하던 휴정을 찾아가 수학하게 되면서 사제의 연을 맺게 된다. 이들은 명종대 승과가 일시적으로 부활하였을 때 승과에 합격하였고 그 높은 덕행과 학식으로 교단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았으며 사회적 명망도 자자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또한 명종대 승과 출신으로 당대 불교계를 주도하며 조선 후기 새로운 법맥이 형성되고 표방되는 기점이 된다는 데에 의미가 크다.

휴정과 유정은 서로 사제관계를 이루었고 유정이 휴정의 법을 이은 적전제자라는 인식은 당대부터 이미 있었다. 때문에 유정은 휴정이 임진왜란 당시 노구로 인해 승병장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 스승을 대신하여 승군을 지휘하였고, 금강산에 휴정의 탑을 다시 세웠으며 그 문집의 간행을 유명으로 남겼다. 휴정이 선조의 명으로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을 제수받고 각지의 승장들을 불러 모아 의승군을 일으킨 후, 유정이 실질적으로 승단을 통솔하며 전쟁에 직접 참여한 주체였던 것이다. 전란에서 보여준 이들의 빛나는 활약은, 다수의 유교명현이 등장하고 사림이 정국 주도권을 쥐면서 조선이 본격적인 유교사회로 접어드는 시기에 불교 교단에 대한 국가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후기 불교 교단의 계파는 선종의 법맥 전승과 더불어 법통과 계파 인식을 공유하였는데 조선후기 양대 계파는 청허계와 부휴계 였다. 그 중 청허 휴정을 기점으로 그의 법맥을 이은 후손들을 통칭하는 청허계는 조선후기 교단의 최대 계파였다. 청허계는 다시 몇 개의 문파로 나뉘고 계보 또한 여러 갈래로 분기되는데, 1764년에 나온 『불조원류(佛祖源流)』에서 그 중 대표적인 사명파, 편양파, 소요파, 정관파의 4대 문파를 정리하고 있다. 사명파는 휴정의 적통 제자로 인정된 유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정의 문하에서도 다시 송월 응상, 허백 명조, 춘파 쌍언 등 여러 고승들이 배출되어 사명파의 흐름을 만들며 17세기 불교계의 주요 문파로 활약하게 된다.

유정과 관련하여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조선 초 마지막 왕사였던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 이래 세워지지 않던 고승비가 유정에 와서 다시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고려시대 내내 국사와 왕사의 비가 왕명으로 세워진 이래 조선에서는 무학자초의 비를 마지막으로 약 200년 동안 승려의 비가 거의 건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정은 생전에 전란에서의 공적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승려이면서 당상관의 관품을 제수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 문도들에 의해 그와 절친했던 허균의 글을 받아 비석이 건립되게 된다. 유정의 비 이후로 조선에서는 약 170건 이상의 고승비가 세워지는데 그 대부분이 조선후기 불교계의 양대 계파인 청허계와 부휴계 승려들의 비문이어서 이 시기 휴정에서 기인하여 이어지는 법맥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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