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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柳馨遠]

반계수록으로 제도개편을 구상하다

1622년(광해군 14) ~ 1673년(현종 14)

유형원 대표 이미지

반계수록

국립중앙박물관

1 조선 후기 실학의 비조

유형원(柳馨遠)은 조선 후기 실학의 비조(鼻祖)로 꼽힌다. 관직에 종사하지 않고 부안동에서 은거하며 평생 처사로 살았으나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명망을 떨쳤다. 『반계수록(磻溪隧錄)』에 담긴 그의 개혁 사상은 특히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영조(英祖)와 정조[조선](正祖) 등 탕평군주들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

2 황폐해진 국가

유형원이 태어난 17세기 조선의 시대적 과제는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약 7년간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휩쓴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조선의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인명 피해 또한 막심하였다. 또한 오랜 전쟁은 조선 초기 정비된 여러 제도가 가진 사회적인 모순들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관직에 있는 벼슬아치들로부터 초야에 묻힌 선비들까지 각자 나름대로의 개혁책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과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李适-亂) 등이 이어지며 정국이 그리 안정되지는 못하였다.

임진왜란의 영향은 전쟁에 참여했던 명(明)에게도 미쳤다. 명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는 조선이 치룬 것보다 더욱 거대한 것이었다. 중국을 지배하는 대제국인 명이었으나, 전쟁에서의 군사력 소모로 인해 만주지역에서 일어난 후금(後金)에 대한 견제력을 상실하였으며, 내부적으로도 농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후금은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두 차례 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견제한 데 이어, 1644년(인조 22) 멸망한 명을 이어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조선은 건국 이후 명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어왔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의 원군으로 인해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하고 있었기에, 중화(中華) 문명을 대표하는 명이 오랑캐인 청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의 국왕 인조[조선](仁祖)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던 치욕 또한 조선 지식인들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명청교체의 충격은 조선 내부 사회 모순에 대한 개혁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3 풍부한 정신 문화

심각한 국가적·물질적 피해와는 달리, 17세기 조선의 사상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부한 아이디어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풍요는 16세기에 이룩한 조선 성리학의 큰 도약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16세기 사상계는 한 논쟁으로 떠들썩했다. 주인공은 당대의 대학자 이황(李滉)과 젊은 학자 기대승(奇大升). 두 학자가 성리학의 주요 개념들인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그리고 이기(理氣)를 두고 벌인 논쟁은 조선 성리학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기대승의 견해는 후일 대학자 이이(李珥)에게로 계승·발전되었다. 이이 또한 성혼(成渾)과 사단과 칠정의 해석을 두고 논쟁을 벌이며 자신의 견해를 확립하였다.

논쟁은 당시 조선 성리학의 철학적 이해를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선의 정치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이황과 이이는 각각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국왕에게 바치며 군주에게도 성리학적 정치관을 적용하려 하였다. 또한 이황과 이이의 제자들은 각각 남인(南人), 서인(西人) 등으로 분화되며 붕당을 형성, 본격적으로 붕당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지나치게 인간의 심성에 몰두한 성리학의 한계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양란 후유증의 극복을 시대적 과제로 삼은 17세기 조선의 지식인들 또한 성리학의 심성론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정립하였다는 것을 볼 때 당시 사단칠정 논쟁을 통한 성리학의 발전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북인계열의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다

유형원의 본관은 문화 유씨로,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매우 부유하여 고려 태조 왕건(太祖 王建)에게 수레를 많이 제공하는 등 고려 건국을 도왔다고 한다. 이후 고려 시대를 거치며 높은 벼슬과 이름난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문화 유씨 집안은 끊임없이 중앙 정계에 관직자를 배출해 왔다. 유관(柳寬)은 세종 대에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사후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의 아들 유계문(柳季聞)은 형조판서에 재임하였으며 안숙(安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후 6대를 지나 유성민(柳成民)은 정랑(正郞) 벼슬을 지냈으니, 바로 유형원의 할아버지가 된다. 유형원의 아버지인 유흠(柳𢡮)은 문과에 급제, 한원(翰苑)에 들어 검열(檢閱)에 제수되었다. 우참찬(右參贊) 이지완(李志完)의 딸과 결혼하여 유형원을 낳았다.

유형원의 가문은 정치적으로는 당시 북인(北人)에 속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대에 전횡을 일삼았던 북인(北人) 일파와는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대표적으로 유형원의 외삼촌이자 스승이기도 한 이원진(李元鎭)은 당시 집권세력이던 대북 일파가 인목왕후(仁穆王后)를 폐위시키려 한 폐모론에 반대하여 귀양살이를 한 바 있다. 고모부 김세렴(金世濂) 또한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원진은 후대의 실학자 이익(李瀷)의 집안어른이기도 하여 사상적으로는 퇴계 이황을 이은 남인에 가까웠다. 이러한 유형원 가문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북인계 남인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5 경세가, 태어나다

1622년(광해군 14) 정월 21일, 유형원은 서울 정릉(貞陵)에 있는 외삼촌 이원진의 집에서 태어났다. 키가 크고 눈이 별처럼 초롱초롱하였으며 등에는 마치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자가 될 귀한 아들을 얻은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623년(인조 1) 8월 유형원이 겨우 두 살이었을 때, 예문관(藝文館) 검열 등을 거치며 탄탄대로를 걷던 아버지 유흠이 유몽인(柳夢寅)의 옥사에 연루되어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한다는 누명을 쓰고 옥사한 것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유형원은 슬피 울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상례의 예절을 잘 지켜 사람들이 기특히 여겼다.

대학자가 될 그릇은 어렸을 때부터 달랐던 것인지, 유형원은 노는 모습 또한 비범했다. 서너 살에 불과하였을 무렵에도 어떤 사물을 접하면 반드시 그 처음과 끝을 궁구하려 하였으며, 풀이나 벌레와 같은 하찮은 미물 또한 함부로 해치지 않았다. 글을 읽을 때 옆에서 또래 아이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과정표를 만들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유형원이 다섯 살이 되자 이를 지켜보던 외삼촌 이원진은 본격적으로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유형원은 또한 고모부 김세렴에게도 글을 배웠다. 어린 나이에도 이미 산수에 통달하였고, 바둑과 같은 잡다한 놀이까지 쉽게 깨우쳤다고 한다. 일곱 살에는 서경, 아홉 살에는 주역 등 유교 경전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열 살이 되자 유교 경전 뿐 아니라 제자백가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한다.

6 시대의 아픔을 목도하다

유형원은 과거시험에는 도통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는 위기(爲己)의 학문만을 추구하며 더욱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기마에 익숙한 청군이 서울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해오자 조정은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서울에 있던 유형원 또한 조부모와 모친, 그리고 두 분의 고모를 모시고 원주로 피난하였다. 피난길 도중 강도를 만났는데 열다섯에 불과한 유형원이 앞으로 나서 강도를 깨우쳐 흩어지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부안으로 옮겨간 조부를 봉양하고자 부안 땅을 자주 왕래하였다. 후일 유형원 또한 부안에 은거하게 된다. 1639년(인조 17) 풍산 심씨와 혼인하니 이 때 유형원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청년기 유형원은 거주지를 자주 옮겼으며 또한 전국 방방곡곡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람을 하면서 즐거움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학문에도 계속 매진하여 글을 읽을 때에는 잠자고 밥 먹는 것을 잊기 일쑤였고 말을 타고 가다가도 사색에 잠긴 채 말이 다른 길로 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당시 유형원의 학문은 이미 유명하여 높은 관직에 있는 자들이 한번 보기를 청할 정도였으나 그는 그러한 세력가들과는 교유하지 않았고, 친척 뻘이 되는 민유중(閔維重)이 소문을 듣고 그를 관직에 추천하였어도 나아가지 않았다.

유형원의 유람은 슬픔을 잊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644년(인조 22) 명이 멸망하였는데, 그는 스스로를 명의 유민(流民)으로 규정하였으며 이후 벼슬할 생각을 더욱 버렸다.

같은 해 조모상, 1648년(인조 26)에 모친상, 1651년(효종 2) 조부상을 연달아 당하면서 슬픔으로 인해 고질병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1653년(효종 4) 조부상의 복상(服喪) 기간이 끝나자 유형원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차운(次韻)한 시를 지은 이후 부안현 우반동으로 옮겨 은거를 시작한다.

7 은거 속에서 태어난 대작

부안에서 은거를 시작하기 일 년 전부터 유형원은 본격적으로 학술 활동에 매진하였다. 1652년(효종 3)에는 『정음지남(正音指南)』을 집필한 데 이어 대작 『반계수록』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나이 49세가 되는 1670년(현종 11)에 완성된다. 1654년(효종 5)에는 조부의 유명에 따라 과거시험에 응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일을 사절하여 문을 닫아걸고 책을 저술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밤낮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밤중에라도 문득 일어나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오늘도 헛되이 보냈다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유형원은 이후 『여지지(輿地志)』, 『중흥위략(中興偉略)』, 『동방문(東方文)』, 『동국사강목조례(東國史綱目條例)』 등 여러 글을 집필하였다. 그 범위는 지리·정치·경제·문학·역사·병법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의 저술활동이 세상과 단절된 채로 혼자만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유형원은 박자진(朴自振), 권극중(權克中), 정동직(鄭東稷), 배상유(裵尙瑜) 등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당대의 대학자였던 허목(許穆)을 수차례 방문하여 토론하였는데 허목은 유형원을 두고 왕을 보필할 인재라 극찬하였다.

1672년(현종 13)에는 백호(白湖) 윤휴(尹鑴)에게 글을 보내 몸가짐과 처세를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유형원의 학문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여러 번 묘당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또한 유형원은 부안 지방에 은거하며 명망을 얻어 지역 사회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풍속이 귀신을 좋아해 음사(淫祠)가 많았는데, 유형원이 사람을 시켜 음사를 헐고 나무를 베어버렸다.

지방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는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말년에 이른 1671년(현종 12)에는 향음주례의 절목을 정하기도 하였다.

1667년(현종 8)에는 중국 복건성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표류하였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중국 남방에서 제위에 오른 명의 영력황제의 행방을 궁금해 하고 있었다. 유형원은 그들을 찾아가 영력황제가 아직 무사하다는 사실을 듣고 기뻐하며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1673년(현종 14) 2월부터 병이 들어 한 달이 지나도 낫지를 않았다. 마침내 병이 위급해지자 유형원은 수발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이튿날 새벽 운명하였다. 때는 1673년(현종 14) 3월 19일, 유형원의 나이 52세였다. 조문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천 여 명에 이르렀다.

8 웅장한 기획 : 국가 제도의 근본적 개혁 추구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사회사상을 잘 보여주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무려 20여 년간의 연구를 통해 탄생한 대작으로, 중국 및 고려, 조선의 각종 법제를 수록하고 이를 통해 현실의 개혁안을 끌어내었다. 고금의 제도를 전제(田制), 교선지제(敎選之制), 임관지제(任官之制), 직관지제(職官之制), 녹제(祿制), 병제(兵制), 군현제(郡縣制) 등으로 나누어 세세한 절목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자신의 개혁론을 개진하였다.

특히 유형원은 고대 정전제(井田制)의 정신에 입각한 토지 개혁을 주창하였다. 그의 토지 개혁은 균전론(均田論)으로 이해되며, 이에 따라 그를 중농주의적 실학자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유형원은 정전제의 이상이 바로 공전(公田)에 있다고 보고 개인의 이욕만을 위한 사전(私田)을 배격하였다. 따라서 그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 후 이를 귀천의 차별을 두어 재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형원이 보기에 당시의 토지 제도 및 세금 제도는 항상 변화하는 인구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 기준이 명확하지 못하여 폐단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토지를 기준으로 삼는 공전제를 실행하여 당시의 여러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유형원은 주장하였다. 이어 이러한 토지제도 개혁을 바탕으로 사회의 각종 제도를 이에 맞추어 정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를 위해 세세한 규칙까지도 정비하였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반계수록』을 읽어본 후 같은 시대에서 살면서도 만나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면서 상세한 절목까지 갖춘 그의 개혁 사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반계수록에서 유형원이 주장한 개혁론은 국가의 근간인 토지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이를 중심으로 사회 전체를 재편하는 것을 요구하는, 당시로서는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인 개혁론이었다. 따라서 그의 개혁론은 당시 국정 운영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론이 가진 의미와 그 궁극적인 목표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공감하였다.

1678년(숙종 4) 배상유는 상소를 올려 반계수록에 제시된 유형원의 개혁론을 차례로 시행하기로 청하였다. 비록 비변사(備邊司)에서는 그 내용이 너무 광대하여 시행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지만, 유형원의 개혁 사상에 대한 당대인들의 평가를 잘 알 수 있다.

1693년(숙종 19)에는 호남 사림들이 부안의 동림(東林)에 서원을 세우고 유형원을 배향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경향의 유생과 진사 노사효 등이 상소를 올려 사액을 청하고 『반계수록』을 진상하였다.

탕평군주로 평가되는 영조와 정조 시대에 이르러 유형원의 개혁 사상은 더욱 큰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1741년(영조 17) 양득중(梁得中)은 경연에서 『주자어류』 대신 『반계수록』을 진강할 것을 청하였다.

반계수록을 반포하자는 요청 또한 계속되었다.

결국 1769년(영조 45) 영조는 『반계수록』을 3건 간행하도록 명하였고 그 중 1건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목판본으로 만들어 더 많은 부수를 간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조는 유형원의 견해를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이조참판 성균관 좨주를 증직하였다.

9 근본적 성찰 : 경세 사상을 뒷받침

유형원의 개혁사상은 반계수록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으나, 그의 철학사상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 오광운(吳光運)을 비롯한 조선 후기 학자들이 유형원의 철학사상에 대해서 반계수록이 나올 수 있었던 근본으로 평하였을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지만, 유형원의 저작이 온전히 전하지 않아 그 철학사상의 전모를 살펴볼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전(傳)이나 연보(年譜) 또는 행장(行狀)에서 소개한 짧은 기록을 통해 그 대강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에 안정복(安鼎福)이 유형원의 연보를 쓰기 위해 필사해 둔 기록들이 발견되어 『반계잡고(磻溪雜藁)』로 간행되면서 그의 철학사상에 대한 갈증이 조금은 풀리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유형원의 철학 사상은 퇴계 이황의 견해를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이(理)를 강조한 이황의 견해를 발전시켜 하늘의 근본적인 이치를 인간 생활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원칙과 이상을 강조하는 그의 경세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비롯해 『이기총론(理氣總論)』, 『논학(論學)』, 『물리(物理)』, 『정음지남』, 『여지지』, 『무경사서(武經四書)』 등의 저술을 남겼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반계수록』과 후대에 발견되어 간행된 『반계잡고』 뿐이다. 그는 문학, 군사, 음양, 음률,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정통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방대하면서도 세밀한 그의 개혁론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10 후대 실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다

유형원은 제자를 양성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그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은 없었으나, 당대 많은 학자들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대 실학자로 꼽히는 인물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성호 이익은 조선 역사상 시무(時務)를 아는 인물로 이이와 유형원 둘을 꼽았다.

순암 안정복은 유형원으로부터 크게 영향 받아 자신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였다.

정약용(丁若鏞) 또한 개혁론을 제시하면서 『반계수록』을 끊임없이 언급하였다.

유형원의 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있어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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