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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尹善道]

보길도에서 시조를 읊다

1587년(선조 20) ~ 1671년(현종 12)

윤선도 대표 이미지

윤선도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시대적 배경(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 등)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조선은 후금(뒤의 청)을 배척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이에 불만을 가진 청은 1627년과 1636년에 조선을 침략하였고, 이를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피해는 매우 컸다. 인조[조선](仁祖)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리고 소현세자(昭顯世子)·효종(孝宗), 수십만의 백성이 청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처럼 병자호란을 통해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한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반발로 북벌론(北伐論)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 각 고을에서 특산물을 현물로 징수하는 공납(貢納)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다. 대동법 시행으로 인해 토지 1결당 쌀 12두의 대동미를 징수하여, 이로써 진상물, 공물, 운반비, 고을 운영비를 충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동미를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이들로 하여금 공물을 조달토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예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예송(禮訟)이 발생하였다. 예송논쟁은 2회에 걸쳐 발생하였는데, 1차 예송은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을 서인(西人)의 의견에 따라 1년으로 결정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2차 예송은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발생하였다. 마찬가지로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이 쟁점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대로 1년으로 결정되었다. 이 같은 예송논쟁은 단순히 상복을 입는 기간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각 정치세력 이해와 관련하여 발생하였다.

2 가문적 배경

윤선도의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윤선도의 고조부는 윤효정(尹孝貞)이다. 윤효정은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에 숨어 살며, 스스로 호를 ‘어초은자(漁樵隱者)’라 하였다. 윤효정은 윤구(尹衢)를 낳았다. 윤구는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윤구는 윤홍중(尹弘中)과 윤의중(尹毅中)을 낳았다. 윤홍중은 예조정랑을 지냈다. 윤의중은 좌참찬을 지냈으며, 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은 윤유심(尹惟深)이고, 차남은 윤유기(尹惟幾)이다. 윤유기는 윤홍중에 양자로 가게 된다. 윤유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능성구씨 구운한(具雲翰)의 딸과 결혼하였다.

윤유심은 예빈시 부정을 지냈다. 순흥안씨 안현(安玹)의 손녀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는데, 윤선언(尹善言)과 윤선도를 낳았다. 윤선도는 8세에 큰아버지인 윤유기에게 양자로 가게 된다.

윤선도의 외할아버지는 안현(安玹)이다. 안현의 본관은 순흥이고, 자는 중진(仲珍), 호는 설강(雪江)이다. 안현은 1521년 과거에 합격하였고, 주로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사관의 역사기록을 공정히 할 것과 신중한 사료 보관을 강조하였다. 을사사화 당시 윤원형(尹元衡)의 추천으로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윤선도의 장인어른은 윤돈(尹暾)이다. 윤돈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여승(汝昇), 호는 죽창(竹窓)이다. 윤돈은 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의 문인으로 158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1년 이조정랑으로 세자책봉문제로 유배된 정철과 연류되어 있는 백유함과 유공신을 학관(學官)에 추천하였다가 처벌을 받았다.

이듬 해 복관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가 오자 접반관으로 활약하였다. 1598년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604년에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3 지역적 배경(인물의 출생지, 본관지역 등)

윤선도는 1587년 서울 동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연화방은 한성부 동부 12방 중의 하나로써, 지명은 큰 연못인 ‘연지’가 있던 데서 유래하였다. 해남은 1409년 진도(珍島)와 해남을 합하여 해진현을 설치하면서 생겨났다. 1437년에 진도와 해남을 분리하여 해남현을 설치하고 현감을 두었다. 1448년 옥천현과 황원군이 해남에 편입되면서, 오늘날 해남 경계와 비슷해졌다.

윤선도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장소가 보길도(甫吉島)이다. 보길도는 해남반도 남단 12km에 위치하고 있다. 1637년 2월 처음 보길도를 방문한 윤선도는 보길도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짓고, 세연정(洗然亭)과 연못을 축조하였다. 이곳은 대(臺)와 각종 나무를 이용하여 조성하였고, 현재까지 부용동원림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유적이다. 그리고 윤선도는 세연정 인근에 동천석실(洞天石室)을 만들었는데, 석문(石門)·석담(石潭)·석천(石泉)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또한 동천석실 부근에 평지가 있는데, 윤선도는 이 일대에 낙서재와 무민당(無悶堂)·곡수당(曲水堂) 등을 지었다. 이 밖에도 윤선도는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낭음계(朗吟溪)·하한대(夏寒臺)·혁희대(赫羲臺)·상춘대(賞春臺)·언선대(偃仙臺)·오운대(五雲臺)·미산(薇山) 등의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윤선도는 1637년부터 85세로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보길도에 왕래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다.

4 정치적 활동과 업적(과거, 관직)

1603년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1612년 봄에 진사시에 합격하다. 1616년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 유희분(柳希奮), 박승종(朴承宗)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윤선도는 신하된 자가 권력을 혼자 장악하면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임명하고, 상과 벌을 자기 마음대로 행사한다고 하였다. 이어 훌륭한 임금께서 위에 계시어 임금과 신하가 각기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니 이러한 자가 없어야 하지만, 예조판서 이이첨의 하는 짓을 보니 불행히도 이와 가깝다고 하였다.

결국 이 상소로 인해 윤선도는 함경북도 경원(慶源)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석방되었고, 4월에 의금부 도사가 되다, 7월에 파직되어 해남으로 돌아갔다. 8월에 별시 초시에 합격하였다. 1625년과 1626년에 의금부 도사와 안기 찰방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8년 봄에 별시 초시에 장원급제하였고, 3월에 소현세자,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1629년 12월에 공조좌랑이 되었다. 1630년 12월 공조정랑이 되었다. 1631년 6월 호조정랑이 되었으나, 9월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왔다. 1632년 1월 호조정랑이 되었고, 3월 한성부 서윤이 되었다. 11월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1633년 4월 증광복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7월 평안도의 경시관이 되었다. 9월 문학이 되었으나 곧 해남으로 돌아갔다. 1634년 성산의 현감이 되었으나, 1635년 11월 파직되었다. 1638년 6월에 병자호란 때 왕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북 영덕(盈德)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1639년 2월 석방되었고, 1652년 효종의 스승이었다는 명목으로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 1652년 예조참의, 1657년 첨지충추부사, 1658년 공조참의가 되었다. 1660년 함경도 삼수(三水)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1665년 광양으로 옮겨졌고, 1667년 7월 석방되었다. 1671년 6월 11일 부용동 낙서재에서 사망하였고, 9월 22일 문소동(聞簫洞) 옛터에서 장사를 지냈다.

5 사회경제적 활동과 업적(신분 관련, 농상업 관련 등)

윤선도는 1635년 성산현감 시절에 『을해소』를 올려 갑술양전 때 감관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고을을 바꾸어 농지를 측량하는 방식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1652년 윤선도는 원두표(元斗杓)를 비판하였다. 윤선도는 원두표가 재주는 많으나 덕이 적고, 이득을 좋아하고 의리가 없으며, 사납고 교할하며 포학하니 원두표를 먼 지방에서 한가히 살도록 하여 조정이 안정된 뒤에 다시 등용하기를 요청하였다.

당시는 효종이 김육(金堉), 정태화(鄭太和), 심지원(沈之源)과 함께 외척인 원두표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정국을 운영하고자 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선도의 발언은 효종의 정국 운영 구상을 깨는 사건이었다.

1655년 윤선도는 『시폐사조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윤선도는 각사에서 도망친 노비를 잡는 일, 섬에서 사는 백성을 쫓아내는 일, 강화도의 어부를 쫓아내는 일, 산성을 건설하는 일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윤선도는 호패의 무용함을 강조하였다. 윤선도는 호패의 법과 같은 것은 중국에도 없는 것인데 이조에서 시행하려는 이유가 백성들을 속박하고 부려먹으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1656년 윤선도는「정전남순상단(呈全南巡相單)」에서 가난한 여자친척을 예로 들어 관찰사에게 백성에 대한 구휼과 풍속교화를 당부하였다.

1658년 윤선도는 정개청(鄭介淸)의 신원을 청하였다. 윤선도는 “지난번에 정개청의 손자 2명이 그의 할아버지를 신원하려고 천리 길을 와서 소를 품고 호소하였으나, 승정원에서 물리쳐서 끝내 주상께 전달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유성룡이 기축옥사의 억울함을 씻어 줄 것을 청하는 계사에서 「정개청은 호남 지방 사람들에게 더욱더 유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바, 한평생 학문과 행검으로 자임을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이 아직 유성룡의 문집을 보지 못하였으나, 신이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바, 유성룡의 문집 속에 실려 있는 이 말이 이 소의 내용에 있는 말과 똑같다고 하니,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일로 윤선도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의 노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효종이 죽자, 인조의 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정태화와 송시열은 1년을 주장하였고, 허목(許穆)과 윤휴(尹鑴)는 3년을 주장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윤선도는 윤휴의 3년설에 동의하면서 정태화와 송시열의 주장이 효종의 정통을 부정하는 설이라고 주장하였다. 윤선도는 자의대비의 효종에 대한 상복은 차장자에 대한 3년상이라는 점에서 허목과 동일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적통이 아니라는 송시열의 주장은 효종의 적통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상소 마직막에 3년상 시행 여부가 효종과 국운여부와 관련된다고 하였다.

이 밖에 윤선도는 향소의 적임자는 순박하고 강직해야 하며, 이 밖에 관아의 가혹한 형벌사용을 비판하였다.

6 문화적 활동과 업적(출판, 저술)

1638년 경북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난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 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이외 윤선도는 이 시기에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효종대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한 윤선도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고산에서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윤선도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문집으로는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가 있다. 이 책에는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이 밖에 친필로 된 가첩으로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와 『산중신곡』이 전한다. 윤선도는 정철·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7 기타 업적과 말년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실사람들과 신하들이 강화도(江華島)에 피난을 가 있었다. 이를 돕기 위해 윤선도는 남자 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향해 가다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러자 윤선도는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8 가계와 가문의 후손 및 후계

윤선도는 남원윤씨 판서 윤돈(尹暾)의 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윤인미(尹仁美)이다. 윤인미는 윤선도가 삼수에 귀양살이 할 때 급제하였으나, 생전에는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674년에 죽었고, 1677년 사간원 헌납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윤인미는 전주류씨 류항(柳恒)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사이에 윤이석(尹爾錫)이 태어났다. 윤이석의 아들, 즉 윤선도의 증손자가 조선후기 대표적인 화가인 윤두서(尹斗緖)이다. 둘째 아들은 윤의미(尹義美)이다. 윤의미는 전의이씨 이사량(李四亮)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윤이후(尹爾厚)를 두었다. 셋째 아들은 윤예미(尹禮美)이고, 이숙진(李叔鎭)의 딸과 결혼하였다. 첫째 사위는 심광면(沈光沔)이고, 둘째 사위는 이보만(李保晚)이다.

그리고 윤선도는 첩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윤순미(尹循美)이고, 둘째 아들은 윤직미(尹直美)이다. 첫째 사위는 이익노(李翼老), 둘째 사위는 황도빈(黃道彬), 셋째 사위는 양헌직(楊憲稷)이다.

9 여러 업적의 영향과 계승

윤선도는 죽은 다음 해인 1672년 복관되었다. 1674년에 손자 윤이후(尹爾厚)가 1660년 승정원이 불태워버린 윤선도의 상소와 「예설」2편을 올렸으나 기각당했다. 1675년 2월에 윤선도는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1678년 9월에 ‘충헌’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1680년 윤8월에 증직과 시호가 취소되었다가, 1689년 봄에 증직과 시호가 회복되었다.

1791년 전라도관찰사 서유린(徐有隣)이 정조의 명을 받고 『고산유고』를 간행하였다. 1798년에 전라도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윤선도의 본가에 보관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빠진 부분을 수정하여 다시 간행하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산유고』는 이를 재판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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