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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임[尹任]

사림(士林)과 손잡고 외척(外戚)과 맞서다

1487년(성종 18) ~ 1545년(인종 1)

윤임 대표 이미지

효릉 근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권력의 배후에 서다.

인종대 외척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윤임은 1545년(인종 1) 8월 오늘날 충청북도 충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윤임은 본래 무관집안 출신으로 음직으로 무관직을 시작하여 그의 누이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중종(中宗)의 첫 번째 계비가 되면서부터 권력의 핵심으로 다가갔다. 윤임은 인종(仁宗)의 즉위로 권력을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인종이 9개월 여 만에 급서하고 말았고, 새로 등극한 명종(明宗)은 또 다른 권력층을 동반하고 있었다. 새로 권력에 오른 세력도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윤임과는 친척 간이었다. 하지만 권력 앞에서 권력 이외의 다른 것들은 같이 존재할 수 없었고, 그들은 윤임을 권력에서 내쳐지고 말았다. 왕을 정점으로 형성된 권력관계에서 윤임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지만 최고 권력의 배후에서 당대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2 윤임의 가족관계와 성장배경

윤임은 1487년(성종 18)년 파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임지(任之)이다. 아버지는 중종(中宗)의 장인인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이었으며, 어머니는 박중선(朴仲善)의 딸 순천부부인(順天府婦人) 박씨(朴氏)이다. 여동생은 중종의 계비가 된 장경왕후였다. 윤임의 가문은 조선시대 무과급제자 가운데 약 80여 명을 배출해 낸 명문 무반 가문이었다. 이러한 가문 배경을 바탕으로 음서를 통해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기도 했다. 선전관은 무반의 청요직(淸要職)이라고 할 정도로 무신 가운데 명망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 제수되는 관직이었다. 음서로 선전관직에 진출하였던 것은 윤임의 능력이 출중했고 더불어 파평윤씨 가문이 무반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음서로 주어지는 관직에 만족하지 않고, 윤임은 1512년(중종 7)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윤임은 관직 초기에는 중앙의 고위관직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1523년(중종 18)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재직하였지만 고신(告身)을 추탈하라는 명령에 따라 절도사에서 물러났다. 당시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 지속적으로 나타나 민가를 약탈하던 왜적들을 직접 다스려야 하는 책임자로서 왜선이 나타났을 때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당시 윤임은 군관(軍官) 두 명에게만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게 하여 결국 왜선을 포획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왕은 윤임에게 책임을 물어 의금부(義禁府)에서 장 100과 변방에 보낼 것을 건의하기도 했지만 고신을 추탈하는 것으로 멈추자는 의견도 분분했다. 왜냐하면 윤임은 왜적 방어에 소홀히 하여 왜적소탕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섬을 방어하느라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장은 면제 받는 대신 경기도 화량(花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윤임은 남양부사(南陽府使)로 근무하였고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다. 1529년(중종 24)에는 문관직으로 자리를 옮겨 우승지(右承旨), 이후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기도 했다. 1531년(중종 26년)에는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무관직에 복귀하였다. 이후 병조참의, 병조참판을 거쳐 1533년(중종 28년)에는 무관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병조판서에 올랐다. 당시 윤임의 나이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따라서 사간원에서는 윤임이 경험도 적고 직책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병조판서는 무리가 있을 것이라고 왕에게 재고를 요청했지만 결국 윤임은 병조판서에 등용되었다. 당시 문무관으로서 출중한 능력을 보였던 과거경력 때문에 중종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누이인 장경왕후가 중종의 첫 번째 계비였다는 사실은 윤임의 다양한 관직이력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밖에 없다. 이후 1535년(중종 30)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인종이 즉위하고 난 뒤에는 형조판서(刑曹判書),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 등을 역임하며 권력의 정점 근처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앞서 설명한대로 윤임의 누이는 중종의 계비로 세자를 낳았다. 불행히도 장경왕후가 세자를 낳은 후 엿새 만에 경복궁 별전에서 죽게 되자 윤임은 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윤임은 세자를 보호할 인물로 문정왕후를 추천해 궁으로 들인다. 훗날 갈등을 빚는 또 다른 권력 문정왕후는 윤임 스스로 자초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3 권력의 배후에 서다.

윤임의 누이동생은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가 낳은 세자는 훗날의 인종이 되었다. 윤임으로서는 세자를 왕위에 오르게 한다면 왕의 외척으로 상당한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에 윤임의 동생이 낳은 세자를 안정적으로 정적들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윤임에게는 권력의 향방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중종에게는 총 세 명의 정비가 있었다.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였다. 그런데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가 연산군대에 대신을 역임한 신수근(愼守勤)이었기 때문에 중종반정이 일어난 이후 폐위되었다.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에 반대하여 나타난 정치적 사건이었으므로 연산군과 관련된 인물은 중종 대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따라서 반정세력들은 연산군의 매부였던 신수근을 처치할 수밖에 없었다. 반정 이전에 혼인하였던 단경왕후는 남편인 중종이 즉위한지 8일 만에 폐서인되어 궁궐을 떠나게 되었다. 중종과 단경왕후 사이에 아들이 없었던 점도 단경왕후를 수월하게 폐위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이후 두 번째 정비였던 장경왕후가 죽은 이후 단경왕후를 다시 맞아들이자는 논란이 있었지만 중종반정 주도세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단경왕후의 복위논란은 실현되지 못했다.

1506년(중종 1) 중종 반정이후 입궐한 장경왕후가 두 번째 정비가 되었다. 장경왕후는 내명부 종4품 숙의(淑媛)에서 이듬해인 1507년(중종 2) 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중종 10)년에 중종의 뒤를 이을 원자를 낳았다.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는 훗날 인종이 되었고 첫 번째 정비인 단경왕후가 폐서인 되었으므로 왕위를 잇는데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장경왕후가 출산으로 병을 얻어 엿새 만에 급서하게 되자 세자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원자의 외삼촌이었던 윤임은 원자가 왕으로 등극한다면 권력의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었다. 이에 윤임은 세 번째 왕비로 같은 가문의 17살 소녀를 추천하였다. 훗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는 이 소녀는 문자를 알고 학문을 닦아 아버지인 윤지임(尹之任)으로부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딸만 넷을 낳았고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지내고 있었다. 윤임이 문정왕후를 추천했지만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는 것은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불안한 정계에서 문정왕후가 살길은 아들을 출산하는 길 밖에 없어보였다. 결국 문정왕후는 왕비가 된지 20년이 다 되어서야 1534년(중종 29)에 훗날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慶源大君)을 출산하게 되었다.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낳은 두 명의 왕자는 모두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혈연적 정당성을 갖추게 되었다. 문정왕후도 자신이 아들을 낳게 되자 오랜 세월동안 키워온 세자는 이제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으로 왕통이 이어지는 것이 정당했지만 당시 정비는 문정왕후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후에 인종이 된 세자는 세자빈을 맞이했으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후 왕통을 누가 잇는가라는 문제는 큰 문제였다. 이에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비롯한 세력은 경원대군을 인종 대신 왕통을 잇게 하려고 정치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문정왕후도 세자를 끌어내리고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이후 세자와 경원대군을 둘러싼 세력은 둘로 갈려 왕위를 둘러싼 갈등을 표출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동생인 윤원형의 도움을 받으며 세자를 보위하려는 윤임세력과 맞서고 있었다. 윤임은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문정왕후를 같은 가문에서 추천하여 왕비로 세웠지만 문정왕후는 결국 윤임 뒤를 겨누는 형상을 연출되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윤임의 계획이 차질을 빚는 순간이었다.

4 사화(士禍)의 시작. 권력에서 물러나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은 이후 입지가 불안했던 세자를 보호하려는 세력과 문정왕후와 경원대군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크게 나뉘었다. 정비인 문정왕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의 입지는 불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종대 부터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1537년(중종 33)에 김안로가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문정왕후를 폐위하려던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났다. 결국 같은 윤씨였던 윤임과 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면서 훗날 인종과 명종이 되는 둘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윤임은 장경왕후의 오빠였고,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각각 인종과 명종의 외숙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었다. 당시 인종을 지지하였던 대윤(大尹)세력은 대간(臺諫)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가문이었지만 세력이 달랐기 때문에 윤임 세력을 대윤이라 하였고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고 하여 구분하였다. 각각 당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통해 이들이 정치적인 세력을 이루어 표면적으로 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종이후 왕위를 둘러싼 세력 대력은 명분상 정통이었던 장경왕후의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아 1544년(인종 1) 왕위에 오르면서 표면적으로나마 윤임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인종의 건강상태였다. 인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왕위를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허약해진 상태였다. 즉위 직후 어의가 인종을 진찰한 결과 맥박이 약하고 낯빛이 수척하다는 의견을 밝힐 정도로 기력이 쇠해 있었다. 결국 인종은 왕위에 오른지 9개월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임을 비롯한 대윤세력이 인종의 즉위를 도와 왕위에 올랐지만, 인종의 급서는 윤임을 중심으로 인종의 왕위 승계를 도왔던 세력의 몰락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정계에는 사림세력들이 언관(言官)직을 중심으로 관직에 등용되어 소윤과 훈구세력들의 전횡을 명분상 문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인종의 급서로 대윤세력과 이들을 옹호했던 사림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인종을 도와 왕권을 강화하려던 윤임은 이후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잡을 권력의 기반을 잃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5 윤임의 몰락

인종의 승하로 다음 왕위는 명종에게 승계되어 왕에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명종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는 11세에 불과하였다. 당시 어린 왕을 대신하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막후에서 정치를 대신 하는 형태를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 했는데, 문정왕후가 명종을 대신하여 국사를 처리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당대의 실질적인 권력을 농단하였던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인종의 즉위를 도와 자신과 반목했던 윤임과 대윤 세력에 대한 정치적인 보복을 시작하였다. 소윤세력들도 명종이 즉위한 초부터 윤임이 중종대 부터 잘못이 많다는 여론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문정왕후는 이러한 신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윤임을 포함한 대윤세력을 처벌하였고, 대윤세력의 처벌을 기점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확대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인종의 즉위를 도운 대윤과 명종의 즉위를 도운 소윤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훈구파와 개혁적인 성향을 띄고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사림세력 간의 갈등과도 연결되면서 이 사건은 사화로 확대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명종이 즉위한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정권을 장악한 윤원형·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정순붕(鄭順朋) 등 소윤 세력이 윤임·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대윤에 대한 정치적 보복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언적(李彦迪)·권벌(權橃) 등은 대윤세력에 대한 처벌이 밀지에 따라 탄핵이 이뤄졌다는 문제를 지적했지만, 왕후와 소윤의 강경한 태도에 부딪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윤임은 유배령을 받아 남해로 향하다가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인종이 붕어한 지, 두 달 만에 모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윤임과 함께 처벌되었던 사림들은 명분을 앞세우며 소윤과 훈척들을 비판하며 인종 대에 대거 등용되었는데, 문정왕후의 보복으로 화를 입게 되었다. 문정왕후를 중심으로 한 소윤세력의 정치적 보복에 윤임을 비롯한 대윤세력과 사림들은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사화를 일으킨 소윤세력과 훈구세력들은 공신으로 책봉되어 자신들이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받으려 했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군신권력관계에서 실질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6 평가

윤임이 죽은 이후 윤임의 신도비에는 윤임에 대해 '옷차림은 검소하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선양하는 것으로 집안을 이끌었고, 거문고와 책을 두어 마치 문인 학사의 거처 같았다' 고 하였으며 ‘무인임에도 힘자랑을 함부로 하지 않고 선비들을 우대하였고 한미한 친족을 인으로 보살폈다.’고 평가하고 있다. 후일 이이(李珥)도 그는 '죄가 없다.'고 변호하였다. 하지만 이황(李滉)은 그가 '사직에 대해 죄가 없지 않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갈릴 수밖에 없는데, 왕의 외척으로 인종의 배후에 있었고 명종을 즉위시키려는 세력과는 대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종과 명종으로 이어지는 왕의 배후에서 권력 앞에 같은 가문이라는 동류의식은 사라지고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어 권력을 향했고, 권력에서 멀어진 이후 윤임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고, 결국 평가도 나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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