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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尹拯]

스승 송시열과 대립하다

1629년(인조 7) ~ 1714년(숙종 40)

윤증 대표 이미지

보물 제1495호 윤증 초상 일괄(장경주 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가계와 배경

명재 윤증은 인조[조선](仁祖) 7년 서울 대묘동 외가에서 태어나 숙종 40년 향년 89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파평 윤씨 윤탁(尹倬)의 후예로 윤황(尹煌)을 조부로 하고 윤선거(尹宣擧)가 그의 아버지이다. 또한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기도 하다. 파평 윤씨와 창녕 성씨 가문을 배경으로 하는 이러한 가계를 배경으로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8세 되던 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만나 어머니가 죽고 조부와 부친을 따라 그의 삶의 기반은 충청도로 옮겨왔고, 초기의 학문적 성취도 대개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 학문적 특징

윤증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 윤황과 아버지 윤선거에게서 가학을 전수받았으며, 이는 그의 일생을 통해 학문적 기초가 되었다. 이후 1642년 14세 때 부친 윤선거의 학문적 동지였던 유계(兪棨)가 3년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금산에 자리 잡게 되자, 부친을 따라 이웃에 같이 살면서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 시기 그는 주로 시경, 서경, 주역 등의 경전을 유계로부터 배운 것으로 보이는데, 상당한 학문적 성취를 얻는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동년배 중에서 두드러지게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647년 19세 때에는 권시(權諰)의 딸과 결혼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권시를 통해 이황(李滉)의 심학적 연원을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권시의 사위가 된 다음 해 지은 「경차퇴도선생고경운(敬次退陶先生古鏡韻)」을 보면 그의 이황의 심학에 대한 경모를 볼 수 있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관한 이이(李珥)의 비판 이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이황 사이에는 분명 일정한 선이 존재했지만, 이황의 경건한 학문적 자세는 학파를 초월한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황에 대한 깊은 매료에도 불구하고, 이기론(理氣論)의 측면에서 윤증은 이황의 계승자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윤선거는 이이의 견해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고 아들 윤증 역시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가풍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본인이 이이와 성혼의 학문을 따랐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율곡의 기발이승론은 뒤엎을 수 없는 논리로서 이이의 학설을 정론으로 삼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윤증은 이이의 이통기국론과 기발이승일도설을 보편 기반으로 삼는 기호학파의 길을 따르게 된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그는 도심의 순수함을 이(理)의 작용으로 긍정하여 나름대로 이황과 성혼의 흐름을 함께 계승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이해방식 때문에 그는 이황과 이이를 함께 우리 동방 학문의 정맥으로 인정하였다

1651년 23세 때에는 김집(金集)을 찾아 그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이러한 경로로 예학 측면에서 그는 김장생(金長生)#NAME?송준길(宋浚吉)을 찾아갔고 1654년에는 구포의 조익(趙翼)을 배알하였다. 1657년 29세 때에는 회천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서를 받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윤증은 회니시비 이전 한때 송시열의 적전이 될 수 있었던 학자로 평가받기도 했으나 그의 학문적 경향은 ‘무실(務實)’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송시열과 구분된다.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승관계는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윤선거는 송시열과 김장생, 김집의 문인이었기에 기본적으로 이이의 학맥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지만, 어렸을 때 그의 학문의 기초를 형성한 윤황은 성혼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우계 학파의 영향도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이이와 성혼이 이황의 영남 성리학과 대비되는 기호성리학의 일원들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학맥의 스승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시열과 그는 정치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이기심성에 관한 이이의 입장에서 이탈하지 않았으며, 이 점에서는 송시열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시열이 방대한 저작을 남기고 있는 반면, 윤증은 이기심성 등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논의에 대해 남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글이 많지 않다. 그 때문에 그가 남긴 단편적인 편린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재구성해야 하는데, 송시열과 대비하여 가장 두드러진 그의 특징은 ‘실천’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윤증은 자신이 가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밝힌 바 있으며, 그는 자신의 부친 윤선거와 우암 송시열의 학문을 비교하여 부친의 학문이 내와 실(實)을 중시했다면 송시열의 학문은 외적인 것과 명(名)을 중시했다고 보았다

박세채(朴世采)는 윤증과 송시열의 학문을 비교하여 윤증은 덕행이 깊었지만 언론이 부족했고 송시열은 언론에 준엄함이 있었지만 덕행이 부족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윤증의 학문적 지향은 이론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선학들이 어느 정도 밝혀놓았다는 전제 하에 이를 실천하는데 집중하는 ‘실천학’에 보다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성리학의 탐구는 공리공담에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일상생활의 실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실심(實心)의 확립을 강조했고 이 실심이 있어야 비로소 실질적인 성취와 덕이 따른다고 보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의 방법으로 지경(持敬)과 궁리(窮理), 주충신(主忠信)을 강조했다.

그는 예학과 이학의 과도한 이론적 구분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학업이란 반드시 독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을 충실하게 해나가는 것에서도 배움이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전체적으로 형이상학적 논변에 치중하기보다는 실천지향에 보다 초점을 맞춘 학문을 했다고 할 수 있다.

3 정치적 활동

그의 이러한 실천지향적 학풍은 당대에 인정받아 효종 말년에는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 현종 4년에도 천거를 받아 이듬해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사헌부 지평 등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 숙종 8년에는 호조참의에, 1684년에는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급기야 1709년에는 우의정, 1711년에는 판돈녕부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 한 번도 나가지 않고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명망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와 또는 정치당국자와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피력되었다.

특히 그는 소위 ‘회니시비’로 인하여 송시열과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고 송시열이 노론의 영수로 부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론의 학문적 리더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회니시비는 윤선거가 죽은 1673년 현종 14년에 그가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 묘지명을 부탁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송시열은 이 때 윤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에 피난간 뒤 처자와 친구는 죽고 윤선거만 진원군(珍原君)의 종자가 되어 성을 탈출했다는 점을 들어 묘지명을 짓지 않고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고 냉랭하게 대했다. 이에 윤증은 송시열에 몹시 실망하게 되었고 수정을 요구했지만 송시열은 글의 내용을 고쳐주지 않아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지게 되었다.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소홀히 대한 것은 윤선거가 주자의 중용 주석과 기해예송 등을 둘러싼 논쟁으로 송시열과 갈라선 송시열의 정치적·사상적 적수인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않은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일찍이 효종 4년에 황산서원(黃山書院)의 회합에서 송시열과 윤선거를 비롯하여 윤원거(尹元擧), 권성원(權聖源) 등 10여 명이 모여 밤늦도록 송시열과 윤선거가 윤휴의 사문난적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결국 윤선거가 표면적으로 굴복하여 송시열에게 윤휴(尹鑴)와 절교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이후로도 내심 송시열의 주장을 납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윤선거 본인은 당시 처와 중부(仲父)가 죽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 윤황을 남한산성에 가서 뵙고 죽고자 한 것이었으나 결국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이도저도 못하고 몸만 욕되게 된 것으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윤선거는 지속적으로 천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이는 그의 아들 윤증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송시열 측도 사실상 동일한 내용으로 윤선거를 혹독하게 공격하였고 다만 윤선거가 적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여 살아남았고 노비 宣卜으로 이름을 고쳐서 살아 돌아왔다고 비난하는 등 좀 더 살을 붙여 공격을 하였다.

어쨌든 윤선거의 강도에서의 수난과 탈출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윤선거는 이후 재취하지도 않고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윤선거가 명분상 처신에 약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이후 출사하지 않고 철저히 은거하여 세인의 존경을 받아왔고 송시열과 40여 년간 교분을 나누기도 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윤선거의 묘지명을 후생인 박세채의 말을 빌려서 쓰고 본인은 단지 이를 따를 뿐이라고 한 것은 윤증의 눈에는 몹시 무성의한 것이었다. 이후 4, 5년을 두고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기도 하고 직접 방문하면서 간청하였으나 송시열은 몇 군데의 자구만 손질하는 것에 그쳤다. 결국 앞서 말한 대로 양자 사이의 감정적 골은 이 일을 계기로 깊게 파이게 되었다.

이후 윤증은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송시열에게 보내기 위한 「신유의서」라는 편지를 지어 송시열의 정치적 행보를 비판하고자 했으나 이 편지를 먼저 보인 박세채로부터 내용이 지나치게 공격적이라는 지적을 듣고 이를 보내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신유의서」는 결국 박세채의 사위가 되는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이 박세채 집에서 몰래 가져다가 송시열에게 주었고 이것이 양자가 결정적으로 의절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4 후대에 끼친 영향

이러한 양자간의 갈등은 단순히 양자간의 감정적 마찰에 그치지 않았고, 송시열의 정치적 실효성 없는 숭명의리론에 실망한 소장파 사림들이 윤증을 종주로 추앙하게 되면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당이 분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이 척신들과 결합하는 기미를 보이고 김익훈(金益勳) 등 척신들의 비리를 옹호하면서, 소장파 학자들의 송시열에 대한 실망감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발생한 회니시비는 노소론의 분당이 심화되고 결정적이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은 뒤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鄭澔)가 쓰면서 윤증을 비난하였고 이는 노소론간의 갈등으로 다시 비화되었다. 결국 소론이 제거되고 그와 그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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