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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尹鑴]

새로운 시선으로 경전을 해석하다

1617년(광해군 9) ~ 1680년(숙종 6)

윤휴 대표 이미지

백호선생문집

국립민속박물관

1 주자성리학 사회에서 탈주자학풍을 제기하다.

17세기 조선 학계는 주자 성리학풍이 강화되면서 학계의 주류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주류에서 이탈한 학풍에 대해서는 가혹한 비판과 평가가 잇따랐다. 윤휴는 탈주자학적 학풍으로 인해 주류 학계에서 ‘사문난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윤휴가 주자학 일변도인 주류 성리학과 차이를 보인 것은 그가 북인계열 학자들과 교유를 맺음으로써 다양한 사상적 조류의 영향을 받았던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남인이었던 윤휴는 주자와 다른 『중용』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로써 노론계열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에게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또한 노론과의 대립은 예송(禮訟)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남인으로 대표되는 윤휴는 예의 적용 문제에서도 제후와 사서의 구분을 명확하게 두어야 한다는 것으로 왕권을 옹호하는 성격을 지녔는데, 이는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계열이 제후와 사서에 통용되는 보편적인 예를 추구한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윤휴는 경신환국(庚申換局) 당시 남인이 축출될 때 처형당하였다. 윤휴의 문집은 1927년이나 되어서야 간행이 가능했는데, 노론계열의 지속된 집권과 성리학 위주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힌 그에 대한 평가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가능했다.

2 17세기 주자 성리학의 강화와 예송의 전개

17세기는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대내적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조선이 문명의 상징으로 존중한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청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국제질서의 변동이 있던 시기였다. 인조반정으로 등장한 사대부들은 성리학 이념을 정치 현실에 구현하려는 의지를 가진 성리학자들이었다. 특히 병자호란의 국가적 위기를 맞아 정치 일선에 진출한 서인계 산림들 역시 주자 성리학을 절대 신봉하는 것으로 노선을 정립하였다. 이처럼 서인 노론이 집권한 17세기 후반 학풍은 성리학이 강화되면서 주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탈주자학적인 경향을 보인 학자들은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또한 17세기는 붕당의 전개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붕당들이 각각 이론적 기초를 바탕으로 치열한 이념 논쟁을 벌였는데, 예송 역시 그 산물이었다. 서인과 남인은 예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송시열이나 송준길(宋浚吉)의 서인이 주자성리학을 절대 신봉하는 것으로 노선을 정했다면, 17세기 초 비성리학풍을 온존하고 있던 근기 남인은 원시 유학인 육경(六經)을 강조하거나 탈주자학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과 사대부의 예의 적용에 있어서 서인이 동일한 적용을, 남인은 차등적 적용을 시도함으로써 서인에 비해 군신간의 위계를 중시하고, 왕권을 옹호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윤휴는 바로 주자 성리학이 주류인 시대에 탈주자학적인 경향을 보인 인물로서, 당대 비주류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3 교유관계를 통해 다양한 학문을 접하다.

윤휴는 본관이 남원으로,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이다. 윤휴의 시조는 고려의 국자사업(國子司業) 윤위(尹威)이다. 윤위는 고려시대 문신인 윤관(尹瓘)의 손자이며, 남원부사를 지낸 윤언순(尹彦純)의 아들이다. 윤위가 호남의 염찰사(廉察使)로 나아가 남원의 반적을 토벌하여 항복시켰다. 그 결과 남원 백성들이 윤위의 은덕을 사모하여 장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자손들이 따르게 되면서 그대로 관향(貫鄕)을 삼게 되었다.

윤휴의 고조부인 윤관(尹寬)은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였고, 기준(奇遵), 신잠(申潛), 안정(安珽) 등 당대 도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윤휴의 부친은 윤효전(尹孝全)이며, 윤휴의 모친은 경주김씨 첨지중추(僉知中樞)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김덕민은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고 관료의 길을 걸었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 당시에는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윤휴의 외조모는 신식(申湜)의 딸로, 왜적으로부터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하였는데, 그녀의 행적은 마을에 정문(旌門)을 받는다거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기록될 만큼 높이 평가 받았다.

윤휴의 부친인 윤효전은 선조에게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이다.”라고 칭찬을 받을 만큼 인정을 받아 청현직에 승진되었다. 광해군 즉위년 인목왕후(仁穆王后)를 서궁에 유폐시키자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 이를 반대함으로써 당시 집권자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어버이 봉양을 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여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제수되었다.

윤휴는 바로 윤효전이 경주 관아에 재직 중일 때, 태어났다. 윤휴가 태어났을 때 일화 몇 가지가 전하고 있다. 윤효전의 친구인 정구(鄭逑)가 평소에 교분이 두터웠는데 윤휴가 태어난 날 관아에 방문하자, 윤효전이 “현인이 방문하자 아이가 태어났으나 영광스러운 경사이다.”라고 감격하자, 정구는 윤휴에게 아명을 ‘두괴(斗魁)’라 지어주었다.

또한 윤휴는 기어다닐 때부터 앉을 때에는 반드시 꿇어앉고 한 번도 기대지 않아 보는 이들이 신기하게 여겼고, 7-8세부터 자주색이나 녹색등의 간색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완강히 뿌리치며 가까이하지 않아서 모친 역시 굳이 입히려 하지 않았다.

윤휴가 3세가 되던 해에 부친이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10세 되던 해는 이괄(李适)의 난으로 도성이 혼란스러워지자 여주로 피신하였다가 어머니 경주 김씨의 연고인 충청도 보은 삼산의 외가로 거처를 옮기고, 외조부 김덕민의 집에서 자랐다. 김덕민과 얽힌 일화는 주로 그의 학문적 자질과 관련한 것이 많은데, 한번은 김덕민에게 『황극경세서』 배우기를 청하자 “세상에 이 책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뿐더러 또한 어린아이가 배울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윤휴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윤휴가 홀로 『황극경세서』를 읽는 모습을 보았다. 김덕민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돌아와 윤휴의 어머니에게 “네가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너의 가문에 복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흐뭇해하였다.

김덕민은 이 외에도 윤휴의 자질을 기특하게 여겨 “명군(明君)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기상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19세가 되던 해에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권첩(權怗)의 딸과 혼례를 하였다. 부인은 현숙한 덕행을 지녔으니 50년 동안 규범을 지켜오면서 예절에 어긋난 것이 없었고, 비복(婢僕)들을 거느리고 일가 사람들을 어루만짐에 있어서 곡진히 은덕을 베풀면서 급한 말을 하거나 노여워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곤궁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걱정하는 모습이 없었으므로, 온 집안의 친척들이 모두가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한 분이었다고 칭찬하였다.

그의 가계를 통해 볼 때, 그의 선조인 윤관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림들과 교유를 맺음으로써 도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의 부친인 윤효전은 정구, 장현광(張顯光) 등 남인 계열과 교분을 쌓았다. 그러나 윤효전이 직접 밝힌 스승은 민순(閔純)이었다. 그는 일찍이 민순의 문하에 노닐면서 학문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이후부터 뜻을 가다듬고 태만하지 아니하여 성현의 학문에 잠심하였으므로 동류들이 모두 추앙하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민순은 윤효전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인물인데, 민순의 스승은 북인 계열의 서경덕(徐敬德)이었으며 한백겸(韓百謙) 등의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한백겸은 주자의 주석에 구애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6경을 해석하여 신선한 충격을 준 인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었다. 윤휴 역시 이러한 가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윤휴에게 영향을 미쳤던 인물은 외조부인 김덕민이었다. 그는 보은현 성족리에서 세거하던 경주 김씨 출신으로 성운[중기](成運)에게서 수학하였다. 성운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은 뒤, 관직을 포기하고 40년을 속리산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성운은 이지함(李之菡), 서경덕, 조식(曺植) 등 북인 계열의 성향을 지닌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결국 윤휴는 남인 계열에 속하면서도 성운이나 민순 등 비성리학적 학풍을 지닌 인물과의 교류를 통해 그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윤휴가 직접 스승이라고 밝힌 인물은 이민구(李敏求)였다. 그는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이었는데, 이수광 역시 17세기 초반 발생한 비주자학적 학풍의 움직임을 형성한 인물의 하나였다. 이처럼 윤휴는 남인 계열이면서 동시에 서경덕 계열 문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순정 성리학과는 체질적으로 다른 비성리학적 성향을 온존하고 있었던 계열이었다. 이러한 그의 가풍과 교유 양상은 이후 그가 주희와 다른 해석을 통해 사문난적으로 공격받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윤휴는 1637년(인조 15)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이후 과거 공부를 그만 두었고, 2년 뒤에 공주 유천으로 내려와 학문에 몰두하면서 그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당대 명유들인 권시(權諰), 윤선거(尹宣擧), 허목(許穆), 송시열, 이유태(李惟泰) 등과 교분을 맺었다. 1644년(인조 22)에는 여주의 백호(白湖)로 이주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는데, 이 시기에 「중용설(中庸說)」을 완성하였다. 윤휴는 이 책의 저술 이후 주희와 다른 해석으로 공격을 받았으며, 이것은 결정적으로 송시열 계열과 등을 돌린 계기가 되었다.

4 송시열과의 대립 :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비난 받다.

당시 주자성리학이 주류였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윤휴는 비주류로서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비판하였다. 송시열은 “윤휴란 사람이 당초부터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말을 배척하였고, 주자의 주석은 옳지 않다고 여겨 자신의 소견대로 바꾸고 『중용』에 대해서는 장구를 없애버리고 자신이 새로 주(註)를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 그 결과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공격하였고, 그의 문도를 주자를 배반한 당여(黨與)라고 밝히고, 난신적자를 다스리려면 당부터 다스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송시열과 그 문도들은 윤휴가 『중용』에 대한 새로운 주해서를 저술한 것을 빌미로 사문난적이라 지목되었다. 당시 학자들은 주자의 『중용집주』를 완벽한 텍스트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주자 이외의 주해서는 주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윤휴는 이러한 일반적 학문 경향을 개의치 않고 중용에 대해 새로운 분석과 주해를 시도한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윤휴는 송시열과 그를 지지하는 서인들 사이에서 주자와 겨루고자 하는 존재로 낙인 찍혀 학문적 파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더욱 강화되어 윤휴는 언제나 사문난적으로 지칭되었다.

송시열과의 대립은 경전해석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예에 관한 입장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윤휴가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 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상복으로 3년상을 제의하였던 것과 달리 송시열 등은 1년 복을 주장하였다. 윤휴는 『의례』 주석 중에 ‘적자(嫡子)를 세워 장자(長子)로 삼는다.’고 한 설을 제시하며, 1년 복을 주장한 사람들은 조종에서 왕위를 이어받은 자를 적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첩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즉 1년 복을 주장한 사람들의 주장은 사대부가에는 해당되지만 천자나 제후에 적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윤휴는 송시열 등이 주장하는 1년 복은 왕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대부의 예(禮)를 왕에게 잘못 적용하여 '왕의 지위를 낮추고, 왕의 법통을 둘로 나누어버리는'(卑主二宗) 논리이므로 어떤 경우든 삼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인의 예론이 ‘천하동례’의 보편적인 원칙임에 대해 남인의 예론은 ‘왕자례부동사서’로서 군신간의 위계를 중시하고, 왕권을 옹호하는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1675년(숙종 1)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일어난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자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헌·성균관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당시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여했다고 하여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5월에 처형당했다. 윤휴는 주자학이 지배하던 17세기 사상계에서 주자의 학설·사상을 비판·반성하는 독자적 학문체계를 세웠다. 예송에서는 남인으로 활동하며 송시열 등 노론계로부터 사문난적으로 규탄 받고 끝내 처형당했다.

5 사문난적의 낙인과 후대 평가

경신환국으로 윤휴가 처형을 당한 뒤, 그의 부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려 실명하였으며, 자식들 역시 역모에 연루되었다. 그러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고 나서야 윤휴의 억울함이 신설되고 역모에 연루되었던 그의 아들들 역시 방면되어 돌아왔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윤휴는 곧이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주 장흥동 선영에 이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남인의 몰락과 사문난적이라는 낙인 때문에 문집이 1927년에 이르러 간행될 만큼 빛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의 문집은 1927년에 이르러 진주 용강서당(龍江書堂)에서 처음으로 『백호문집(白湖文集)』이라는 서명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판본은 윤휴의 주요 저술인 『독서기』가 빠진 것을 비롯해 결함이 많았기 때문에 1974년 그의 후손이 전해오던 원고들을 모두 망라해 『백호전서(白湖全書)』를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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