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이가환

이가환[李家煥]

정조, 그의 재능을 아끼다

1742년(영조 18) ~ 1801년(순조 1)

이가환 대표 이미지

이가환 간찰

e뮤지엄(성호기념관)

1 이가환의 가계

이가환의 본관은 여흥으로, 누대에 걸친 명문가였다. 5대조 이상의(李尙毅)가 좌찬성을 지냈고, 증조부 이하진(李夏鎭)이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러나 숙종 6년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정권에서 소외되었고, 종조부 이잠(李潛)의 흉소 사건 이후 가문에서 벼슬길에 나아가는 사람은 사라졌고, 성호 이익(李瀷)을 비롯한 그 일문의 명사들이 초야에 묻혀 실학 연구에만 몰두, 성호 일문의 실학 가풍을 형성하였다. 그의 조부는 이익의 형인 이기(李沂)이며, 아버지는 이용휴(李用休)로 당대에 문명(文名)이 높았던 인물이다. 이가환은 이용휴와 진주 류씨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고, 성장하자 풍채와 태도가 우람하고 당당하였다고 한다.

작은 할아버지인 이익을 중심으로 한 가학(家學)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그를 둘러싼 집안의 학구적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박물학적 학문의 경지에 이르게 한 힘이 되었다. 이익에게 직접 배우고 익힌 자제(子弟)는 모두 큰 학자가 되었으며, 이가환은 그 중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가학을 집대성 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2 이가환의 생애

이가환은 1771년 진사가 되었고, 정조가 즉위한 1777년에 정조의 즉위를 축하하는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가환이 관직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은 정치적으로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던 시기였다. 영조 38년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사도세자 사건(思悼世子事件)이 일어난 후 당색은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분열되었다. 정조의 즉위 후 탕평책으로 남인(南人) 시파 인물이 대거 등용되면서 이가환 역시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때 정조는 이가환을 비롯하여 정약용(丁若鏞)·이기양(李基讓)·이승훈(李承薰) 등 남인 시파를 적극적으로 비호하였다.

이가환은 정조 2년인 1778년 2월 문신제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면서, 정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종9품의 부정자에서 6품으로 승진하고, 정조와 대면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정조는 그를 만난 자리에서 정치·경제·천문 전반에 대해 물어보고 그의 해박함을 극찬하였다.

1780년 비인현감을 거쳐, 이듬해 7월 예조정랑에 올라 각종 편찬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1785년에는 정조가 김노진(金魯鎭)·엄숙(嚴璹)·정창순(鄭昌順)을 찬집당상(纂輯堂上)으로 임명하고, 이가환을 찬집낭청(纂輯郎廳)으로 임명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 때 국왕과 신료들이 학문에 대해 토론하는 경연에서 이가환과 서로 묻고 답할 때, 이가환의 대답이 항상 상세하고 명백하였으며 인용하는 전거도 해박하였다.

편찬사업에 참여한 공로로 이가환은 승지에 기용되었으나 곧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옮겨갔다. 정주목사로 재임할 때 암행어사 이곤수(李崑秀)의 서계로 인하여 파직되고 금화현에 유배되었는데, 이때의 죄목은 관청에서 쓰는 비용을 강제로 백성들에게 징수하고, 군정(軍丁)을 문란하게 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8년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오르면서 이가환은 수차례에 걸쳐 승지로 발탁되었으며, 1790년에는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임명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일어나자 홍낙안(洪樂安), 목만중(睦萬中)을 중심으로 천주교 공격이 심화되었다. 이때 광주부윤으로 있던 이가환은 향교에 유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물리치라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내고, 각 면과 마을에 공문을 돌렸으며 시장에는 방을 붙였다. 이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다시는 믿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석방해주었다.

이가환의 이런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공서파들은 이가환이 천주교에 빠져있음을 암시하며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가환이 서학의 교주로 지목된 이유는 그의 주위에 서학 인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의 조카 이승훈은 최초의 영세 신자였으므로 외삼촌인 이가환도 서학 인사라는 혐의를 받기 쉬웠다. 거기에 그가 학문적으로 교유했던 인물 중에는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 이벽(李蘗)과 같은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가환이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반대파의 지탄에서 벗어나고자, 천주교 박해에 앞장서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가 비록 입교하지 않았고 박해하는 입장이 되기도 했지만, 이가환이 서학에 대해서 갖고 있던 기본적인 자세는 긍정적이었다.

이가환에 대한 벽파의 공격은 1792년 대사간 통망과정에서 노골화되고 집단화되어 나타났다. 정조는 수차례 이가환을 보호하고 그를 대사간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전 지평 김희순(金羲淳) 등의 반대로 저지되고, 부득이 그를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들의 반발과 정언 한상신(韓商新), 이명연(李明淵) 등의 비롯한 잇따른 반대상소로 이가환은 대사성직을 사직하였다. 반대상소들의 명분은 이가환이 이잠의 종손이라는 것과 그의 사람됨이었다. 정조는 곧 그를 개성부(開城府) 유수로 전임시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파의 상소는 계속되었다. 정조의 보호와 반대파의 공격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가환은 관직을 물러날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 무렵 정조의 문체반정에 편승한 부교리 이동직(李東稷)의 상소로 인해, 이가환의 문체와 서학과의 관련 여부가 그에 대한 공격에 대한 명분으로 내세워졌다. 이로써 이가환에 대한 공격은 개인 또는 가문의 차원에서 사회 또는 국가적 차원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가환에 대한 우의정 김이소(金履素),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 심환지(沈煥之) 등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신임은 변하지 않았다. 이가환은 1793년 9월과 이듬해 10월 두 차례에 걸쳐 대사성직을 맡게 되었다.

1795년 정조는 채제공을 좌의정으로, 이가환을 공조판서로 발탁하였으며, 이에 반발한 노론(老論)과 벽파 계열 신료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서학 문제를 끌어들였다. 같은 해 7월 부사직 박장설(朴長卨)은 상소에서, 정조를 보좌하는 남인 시파 계열의 친왕세력을 서학의 소굴로 규탄하고 이가환을 그 중심인물로 지목하였다. 1795년 수찬 최헌중(崔獻重)이 서학을 믿는 자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힘쓴다(務新好奇)’고 상소를 올렸다.

서학을 빙자한 벽파의 이와 같은 견제책은 결국 정조의 왕권강화책에 큰 제동이 되었고, 정조는 부득이 이들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떠나게 되었고, 이가환의 조카인 이승훈은 예산현으로 유배되었다.

1799년 남인의 영수로 이가환을 비호해주던 채제공이 죽자 형세가 달라졌다. 정조가 이가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증직하려 하자,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이를 반대하면서 이가환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었다. 장령 강세륜(姜世綸)과 대사간 신헌조(申獻朝) 등이 사학(邪學)의 소굴에 이가환이 있다고 공격하는 등의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죽기 직전까지 이가환을 보호하려 했으나 1800년 6월 서거하고 만다. 정조가 급서한 이후 실권을 장악한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중심이 되어 1801년 천주교 금압을 명분으로 대대적인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키게 된다.

이가환은 같은 해 2월 9일에 사헌부의 탄핵과 함께 검거되었으며, 죄목은 서학 교주로 당시의 서학에 대한 모든 혐의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가환이 천주교인으로 몰리게 된 데는 당쟁과의 역학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이가환은 문초 중에 서학과의 관련을 극력 부인했으나, 벽파의 저의가 서학과 무관하게 자신을 해치고자 함을 알고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단식으로 사망하였다. 옥사 당시 정약용·이승훈·오석충(吳錫忠)·유항검(柳恒儉)에 대한 문초에서도 이가환과의 관련여부가 집중 추궁되었다.

3 이가환의 학문

이가환은 이익을 통해 받아들인 실학적 사고방식 속에서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특히 이익으로부터 천문과 수리 분야의 서적을 얻어 탐독하고 천문과 기하에 정통하였다. 천주교 서적 역시 신앙의 대상으로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식견을 넓히기 위해 연구했다. 다양한 관심사와 명석함으로 폐쇄적인 성리학의 학문세계를 벗어나 천문학, 수리학, 의학 등 과학 분야와 실용적 지식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 갔다. 이가환이 실제로 천주교 신앙을 가졌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저서로 문집 『금대집(錦帶集)』이 전해져 온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