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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李德懋]

고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다

1741년(영조 17) ~ 1793년(정조 17)

이덕무 대표 이미지

사소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이덕무가 살았던 시대상황

숙종대를 거치면서 노론(老論)이 중심이 되어 정치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처럼 특정 집단의 집권이 오래됨에 따라 왕권의 권위까지 위협받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시행하여 노론과 소론을 비롯하여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인물을 고루 등용하였다. 이러한 탕평책은 정조[조선](正祖)대에도 유지되어 정치세력간의 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왕권도 크게 강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17세기 이후 이앙법의 보급, 수리시설의 확충, 농기구 개량으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고,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은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넓은 면적을 농사짓는 광작(廣作)이 유행하였고,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사를 짓는 부농(富農)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개성(開城)의 송상(松商), 의주(義州)의 만상(灣商), 한양의 경강상인(京江商人) 등 전국 각지에서 사상(私商)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국내상업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은과 인삼을 중개무역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전국적으로 5일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에는 새로운 예술경향이 등장하였다.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등 문체가 자유로운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회화에서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출현하여 한국의 자연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다. 이 때 등장한 대표적인 화가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를 그린 겸재 정선(鄭敾), 풍속화를 주로 그린 김홍도(金弘道)가 있다.

2 가족관계와 성장배경

이덕무(李德懋)의 자는 무관(懋官)이며, 호는 청장관(靑莊館), 형암(炯菴), 아정(雅亭), 선귤당(蟬橘堂), 단좌헌(端坐軒) 등을 사용하였다. 이덕무는 1741년 6월 11일 서울 중부 관인방 대사동(현재 인사동 4가)에서 통덕랑 이성호(李聖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종실의 한 분파였으나(정종[조선](定宗)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 서얼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이덕무의 고조할아버지는 이정형(李廷衡)으로 호조참판과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상함(李尙谽)이고, 할아버지는 강계부사를 지냈던 이필익(李必益)이며, 이필익의 셋째 아들인 이성호가 바로 이덕무의 아버지이다. 이성호는 박사렴(朴師濂)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3명과 딸 1명을 두었다. 큰 아들은 이덕무이고, 둘째 아들은 검서관을 지낸 이공무(李功懋), 셋째 아들은 지구관(知彀官)을 지낸 이언무(李彦懋)이다.

이덕무는 어릴 때부터 병약하고, 집안살림이 가난하여 전통적인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덕무는 1759년 2월에 전라남도 강진(康津)에 표류한 중국의 복건상인 황삼과 대화를 나누고, 이를 기록할 정도로 지적호기심이 많았다.

그리고 광범위한 독서량과 책에 대한 지독할 정도의 수집욕은 그의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을 반영한다.

3 청나라 고증학에 관심을 가지다.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식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이에 주자학적 관념체계에 대한 비판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실학자들은 주자학에 대한 대안으로 청나라 고증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덕무는 젊은 시절부터 유득공(柳得恭),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백동수(白東脩) 등 대표적인 실학자들을 통해 고증학을 대해 접할 수 있었다.

이덕무는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 주이존과 서건학의 『경해』등을 읽고 고증학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1778년 사은사겸 진주사 심염조(沈念祖)의 보좌관으로 직접 연경에 들어가 반정균, 육비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는 한편, 고염무의 『정림집』등 고증학에 관한 140여종의 책을 구입해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덕무는 청나라 학자 이외에 이만운(李萬運)의 가르침을 받고 고증학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이후에 이덕무는 이만운의 초고를 보완하여 『기년아람(紀年兒覽)』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덕무는 고증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로 인해 그의 저술은 저자의 주관을 배제하고 보다 객관적이고 고증적인 설명에 치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는 대부분 백과사전적인 편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덕무는 무의미한 고증자료 수집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내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좋아하는 바는 옛날에 있으며 지금에 있지 않다.”라거나, “옛것은 배워서 빠지면 진정한 옛것이 아니고, 옛것을 짐작해 지금에 창작하는 것이 옛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덕무가 주자학적 관념체계에 맞추어 무리하게 해석된 기존의 경전해석을 비판하고, 고전의 원래 의미를 객관적으로 밝히는 데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덕무가 객관적이고 실증적 학문 경향에 따라 고전해석에만 치중하지 않고,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을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나라 학문에 대한 관심은 말년의 이덕무에게 고난을 안겨주었다. 이덕무는 박지원, 박제가 등과 함께 저속한 청나라의 문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곤경에 처한 것이다.

4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다.

1774년 가을 증광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것은 관직에 나아가기 위한 것보다는 자신의 공부에 대한 평가를 위한 것이었다. 이덕무는 그가 39세가 되는 1779년 박제가,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에 등용되면서 관직생활을 본격적으로 하였다. 정조는 그의 즉위년(1777)에 규장각을 설립하고 역대 왕들의 어서와 어진을 보관토록 명하였고, 신하들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3년 후인 1779년에는 시문에 능통한 자들을 뽑아서 검서관을 두도록 한 것이다.

그는 14년간 규장각에서 근무하면서 각신(閣臣)을 비롯한 국내 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규장각에서 진행한 서적 편찬사업에도 적극 참여하여 『도서집성』, 『국조보감(國朝寶鑑)』, 『규장각지(奎章閣志)』, 『홍문관지(弘文館志)』, 『대전회통(大典會通)』, 『기전고(箕田考)』등 많은 서적을 교감, 정리하였다.

특히 이덕무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1790년 정조의 명을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였다. 『무예도보통지』는 임진왜란 이후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해 1598년 한교(韓嶠)에 의해 간행된 『무예제보』와 1759년 간행된 『무예신보』를 집대성하고 보완한 책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당시의 무예서가 전략과 전술 이론 위주로 서술된 것과 달리 24기의 전투기술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후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함으로써 1781년 내각검서관으로 옮긴 후에 사도시주부, 사근도(沙斤道)찰방, 광흥창주부, 적성현감을 차례로 지냈다. 특히 사근도찰방 재임시절 공채(公債)의 이자 폐지를 건의하여 정조의 허락을 받기도 하였다.

5 이덕무의 시가 중국에 알려지다.

이덕무는 관직생활 이전부터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감흥을 시로 남겼다. 1761년 9월에 북한산성을 남복수, 남홍래와 함께 구경을 다녀온 후 『북한산유람기』를 쓰기도 하였고, 1768년 6월 29일 박제가, 윤병현, 유연과 함께 몽답정을 유람한 후에「몽답제에서 함께 지음」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렇게 지은 이덕무의 시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함께 사가시인으로 불리면서 중국 청나라 문인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777년부터이다. 이덕무의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인 유련(柳璉)이 1776년 서호수(徐浩修)의 수행원으로 중국을 방문하면서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청나라의 저명한 시인이자 학자인 이조원과 반정균에게 소개하였고, 이 책이 1777년 청나라에서 『한객건연집』으로 간행된 것이다.

『한객건연집』이 청나라에 소개되고, 2년 후인 1778년 이덕무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방문하였다. 이 때 청나라에서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던 이덕무는 반정균, 이종원의 동생 이정원, 기균 등 청나라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이덕무는 시는 정조도 높게 평가하였다.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대상으로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시를 짓게 하고 점수를 매겼는데, 이덕무가 1등을 차지하였다.

이에 정조는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 이만수(李晩秀)의 시는 좋고, 윤필병(尹弼秉)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이덕무의 시를 평하면서 우아하다는 의미의 ‘아(雅)’자를 썼는데, 이후로 이덕무는 아정(雅亭)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하였다.

또한 박지원은 이덕무 사후에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정조 역시 1793년 이덕무가 53세의 나이에 죽자, 그의 생존시 업적을 기려 장례비와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 명목으로 내탕전 500냥을 하사하고, 1795년에는 아들 이광규(李光葵)를 대를 이어 검서관에 임명하는 후의를 베풀었다.

이덕무는 시 이외에 『건연집(巾衍集)』, 『관독일기(觀讀日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영처시고(嬰處詩稿)』, 『영처문고(嬰處文稿)』, 『예기고(禮記考)』, 『편찬잡고(編纂雜稿)』, 『기년아람(紀年兒覽)』, 『사소절(士小節)』, 『청비록(淸脾錄)』,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앙엽기(盎葉記)』, 『입연기(入燕記)』, 『한죽당수필(寒竹堂隨筆)』,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열상방언(迾上方言)』, 『협주기(峽舟記)』 등 16종의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백과전서로, 사실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 지리, 곤충, 물고기 등 다양한 방면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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