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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李德馨]

정쟁(政爭)과 전란(戰亂) 속에서 빛난 인품과 능력

1561년(명종 16) ~ 1613년(광해군 5)

이덕형 대표 이미지

이덕형 영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머리말

‘오성과 한음’ 일화로도 잘 알려진 한음 이덕형의 어린 시절은 사화(士禍)의 시기를 거쳐 사림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 도학(道學)을 바탕으로 한 국가상을 만들어가던 희망의 시기였다. 특출난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하여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이덕형은 임진왜란을 거치는 동안 국란을 극복하기 위한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을 상대하며 임진왜란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덕형은 임진왜란 후에 벌어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당론에 치우치지 않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당쟁 속에 삭탈관직이라는 불명예 속에 죽음을 맞은 이덕형은 그가 갖추고 있던 능력과 덕성으로 죽음 이후 명예를 회복하고 추모의 대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2 이덕형의 어린 시절

이덕형은 1561년(명종 17) 2월 12일 한성(漢城)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에서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류전(柳琠)의 동생인 문화 류씨(文化 柳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고 이후 한성에서 자랐다. 이덕형이 태어나고 자란 시기는 사림정치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네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은 조선 사회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죽음과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시대로 변화하고 있었다. 인종(仁宗)이 즉위한 후 국왕의 의지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1년 만에 후사 없이 사망하고,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明宗)이 즉위한 이후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와 삼촌 윤원형의 전횡으로 많은 사림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과 윤원형의 죽음으로 시작된 구체제의 몰락과 동시에 시작된 사림의 정계 진출 활성화와 영향력 강화는 중종(中宗)의 서손 하성군[선조(宣祖)]이 명종을 계승하여 왕위에 오르면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 선조는 즉위하자마자 외척을 견제하고 사림을 중용하였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 등과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을 복권시키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아 성리학에 근거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이후 성리학이 발전하고 도학(道學)의 기풍이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져갔으며 임금을 성군으로 인도하려는 성학(聖學)이 발달했다. 이제 사림정치가 본격화되었으며, 이어서 사림들의 붕당정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덕형은 훗날 인조반정의 주동자였던 이귀(李貴)와 함께 윤우신(尹又新) 문하에서 어릴 때 글을 배웠는데, 이후 이귀와 평생 가깝게 지냈다. 이덕형은 어려서부터 학식과 재주가 뛰어났으며, 한시를 잘 지었다. 또한 덕이 높아 남에게 화를 내지 않았으며 남의 어려움을 모른척하지 않았다. 이덕형은 일찍 관직에 진출하여 오랫동안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자기의 봉록을 나누어 이귀 등 어려운 처지에 있던 벗들을 도왔으며,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덕형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내던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이른바, 오성과 한음이라고 알려져 있는 구비문학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3 이덕형의 관직 진출

이덕형은 17세에 토정 이지함(李之函)이 주선하여 이지함의 조카 이산해(李山海)의 둘째 딸과 혼인했다. 이덕형의 당색은 본래 남인이었으나,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의 사위이자, 토정 이지함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이덕형은 18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0년(선조 13)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지냈다. 이덕형보다 3년 앞서 진사시험에 합격한 오성 이항복 역시 1580년(선조 13)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덕형과 동시에 승문원에 발령 받아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사람은 요직을 두루 거치고 이덕형이 사망할 때까지 30여 년간 뜻을 함께 하면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율곡 이이는 이덕형과 이항복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추천하여 국가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독서 연구 기구인 독서당(讀書堂)에서 학문을 닦게 하였고 홍문관 관원으로 뽑아 인재로 키워나갔다. 이후 이들은 파격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이덕형은 31세에 홍문관대제학, 이른바 문형(文衡)에 올랐는데, 문형은 경력이 많고 품계가 높은 원로대신 중에 선출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유성룡(柳成龍)의 후임으로 그보다 20세나 아래인 이덕형이 파격적으로 선출되었다.

4 임진왜란 시기 대명외교를 통한 눈부신 활약

1592년(선조 25) 4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였다. 이덕형은 이때 명나라에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조선 정부의 의사에 따라 6월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 이해 9월에는 부인 한산 이씨(韓山 李氏)가 순절했다. 한산 이씨는 아들 셋을 낳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아버지가 살고 있던 강원도 안협으로 피난을 갔는데, 왜적이 안협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백암산으로 피신하였다가 왜군에게 몸을 더럽힐 것을 염려하여 바위에서 뛰어내려 순절했다. 이때 나이 28세였다. 이덕형은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왜란이 발발한 직후부터 끝까지 명군과 함께 전쟁 일선에서 전쟁을 치렀다.

외교적 감각이 뛰어났던 이덕형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동향, 강화회담의 진행 상황 등을 선조에게 직접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1593년(선조 26) 4월 20일에 왜군이 철수하고 서울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명군과 일본군의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일본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이덕형은 이때에도 계속해서 명군의 이동상황을 조정에 알렸다. 이덕형의 접반사 활동은 9월 이여송이 요동으로 철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선조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유성룡을 도제조로, 이덕형을 부제조로 임명하고 군대를 강화하였다. 이때 이덕형은 전쟁 중 명군에게 습득한 화약, 화포, 독약 제조법을 전수하여 기술자를 길러 내고 병기를 제조하여 화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때부터 만주의 누르하치가 점차 세력을 모으자 이들의 침략을 대비하여 평안도에 화포와 총통 등 모든 기구를 평안도 요충지에 미리 실어 놓아 호란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덕형은 1598년(선조 29)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일본의 재침을 예견하였고, 선조와의 대담에서 수전(水戰)이 상책이고 그 다음이 산성(山城)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수군에게 명을 내려 적을 막고 군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덕형의 말한 대로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결렬되고 1597년(선조 30) 일본군이 다시 침략해온 이른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다. 이덕형은 1597년(선조 30) 5월 명나라 장수인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유정(劉綎)의 접반사가 되어 명군의 파병, 시시각각의 전쟁 상황, 명군과 일본군 사이의 화친 교섭, 둔전 경작을 통한 경비 조달, 군사 배치 등 각종 상황을 조선정부에 전달하고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5 광해군 즉위와 대북파의 정권 장악

임진왜란의 전란을 수습하던 선조 말년에는 붕당정치가 점차 심화되었고, 1604년(선조 37) 북인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1608년(선조 41)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했는데,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나, 명나라는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의 생존을 이유로 둘째 아들인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런 상태에서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자 명나라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때 임해군을 교동에 유배시켰는데, 이덕형은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변명하고 그들의 임해군 면담 요청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곧바로 진주사(陳奏使)로써 북경으로 달려가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왔다. 이처럼 이덕형은 적극적으로 광해군이 안정적인 정국운영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북인들은 독주체제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고립되어 갔다.

1611년(광해군 3) 좌의정이었던 이덕형은 이원익(李元翼), 이항복, 심희수(沈喜壽) 등과 더불어 광해군에게 적극 건의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 이언적(李彦迪), 이황 등 5명의 현인(賢人)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613년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과 이황 두 사람을 소인배라고 비방하고 그들의 문묘 종사가 합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덕형 등 원로대신들이 정인홍을 비판하자, 정인홍의 제자들이 영남에서 집단으로 상경(上京)하여 원로대신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주요 부서에서 정인홍 등 대북파 인맥이 주류를 형성하여 대북파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나아가 정권을 장악한 대북세력은 광해군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고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였다. 1613년(광해 5) 9월 이덕형은 이항복과 함께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출하려고 할 때 이를 적극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북파의 탄핵으로 이덕형은 삭탈관작을 당하고 경기도 용진(龍津)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한 달 만인 1613년(광해 5) 10월 9일 5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6 사후 추증

이덕형이 사망하자 광해군은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영의정의 예우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고 그의 영전에 사제문(賜祭文)을 내려 애도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쫓겨나고 서인들이 정국을 장악하자, 1630년(인조 8) 인조는 이덕형에게 문익공(文翼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612년(광해군 4) 광해군은 자신이 국왕으로 책봉될 수 있었던 공적을 기려 이덕형을 공신에 훈록하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책봉하였다. 그런데 유영경(柳永慶) 등 북인들이 실권을 잡으면서 이덕형은 공신록에서 삭제되었으며, 이덕형이 사망하자마자 광해군에 의해 복관되었고, 인조반정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광해군에게 받은 한원부원군이라는 작위는 삭탈되었다. 이덕형의 공신 책봉과 삭제, 복관, 거듭된 삭탈은 당시의 당쟁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덕형은 인조반정 이후에 공신록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에 불천위(不遷位)의 예우를 받지 못하다가, 1759년(영조 35) 4대봉사가 끝나면서 더 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자 김재로(金在魯)가 주청하여 영조가 불천위를 내렸다.

이덕형은 어릴 때부터 재기발랄함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고, 젊은 시절 높은 관직에 올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란을 극복하기 위한 외교 노력과 함께 국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여러 방안을 제시하였다. 전쟁 후 당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당색을 초월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면서도, 져버릴 수 없는 인간의 도리에 대한 심지를 굳게 지켰다. 이덕형의 죽음 이후에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한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아…자주 소인(小人)들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하였다.’라는 사관(史官)의 평가는 그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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