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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李睟光]

흔들리지 않는 선비

1563년(명종 18) ~ 1628년(인조 6)

이수광 대표 이미지

이수광선생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세계’를 인식한 조선 최초의 학자

이수광은 정치적․국제적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광해군(光海君)대의 정치적 혼란과 인조반정(仁祖反正), 이괄의 난(李适-亂) 등 혼란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이수광은 줄곧 강직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 등 기존 중화 질서를 어지럽히는 국제 현실을 목도한 그는 외교 사절로 북경을 왕래하면서 변화하는 세계를 확인하였다. 이수광의 행적과 학문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녹여내었다.

2 급변하는 세상

이수광이 살다간 16~17세기, 조선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계속되는 사화(士禍) 로 얼룩진 명종[조선](明宗)대까지의 혼란한 정치가 종식되고 ‘목릉성세’라 일컬어지는 선조[조선](宣祖)대의 태평성대가 시작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나라는 전화로 불타올랐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미처 치유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광해군대의 정치적 혼란으로 국가의 역량과 인재가 비효율적으로 소비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정치는 잠시 안정을 찾는 듯하였으나, 다시 두 차례의 호란이 발발하였다.

3 방계 왕족 가문에 태어나다

이수광은 1563년(명종 18년) 아버지 이희검(李希儉)의 부임지였던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은 태종과 후궁 효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녕군(敬寧君 李裶)로부터 비롯되었으니, 경녕군은 이수광의 5대조가 된다. 고조부 모양군 이직(牟陽君 李稙), 증조부 선사군 이승손(仙槎君 李承孫), 조부 하동군(河東君 李裕)는 대대로 왕실의 종친으로 군(君)을 수봉하여 살았다. 이수광의 아버지 이희검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科擧)을 통하여 현달하게 되었다.

이희검은 숙부 신당군(神堂君 李禎)에게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1546년(명종 즉위)에 3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이희검의 형제들 또한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으니, 천재 이수광의 자질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희검은 이후 사간원, 사헌부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던 중 척신 이량(李樑)이 세력을 확장하여 발탁되는 것을 보고 이를 탄핵하였다가 미음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어 장단부사로 부임하였고, 여기에서 아들 이수광을 낳았다. 선조 재위 중에는 호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중용되었으나, 1579년(선조 12)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 선조가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희검은 타고난 성품이 높고 그릇이 넓었으며 항상 단정한 태도로 일관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위가 아무리 높아져도 검소함을 잃지 않았고, 공적인 일로든 사적인 일로든 권세 있는 자의 집을 드나들지 않았다. 이희검은 세종대의 재상 유관(柳寬)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유관이 이희검의 부인 문화 유씨의 고조부였기 때문에, 처가를 통해 이 집과 인연을 맺은 듯하다. 동대문 밖에 있는 이 집은 비가 오면 줄줄 새서 유관이 우산을 쓴 채로 집안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청백리로 유명했던 유관의 검소함을 상징해주는 집이었다. 이 집을 물려받아 그대로 사용한 이희검의 뜻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검소함과 공정함은 아들 이수광에게로도 이어졌다.

4 수재로 명성을 떨치다.

이수광은 아버지 이희검이 48세의 나이에 얻은 늦둥이 귀한 아들이었다. 다행히 별다른 탈 없이 자라났을 뿐만 아니라 영특하기까지 했다. 이수광을 잉태했을 때 어머니 유씨 부인이 기이한 태몽을 꾸어, 장차 수재를 낳을 것을 예감했다고 한다.

이수광은 5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입만 열면 문장이 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눈(雪)’을 소재로 다음의 시를 지었는데 그 말뜻이 매우 정교하여 사람들이 신동이라면서 혀를 내둘렀다.

앞에 달은 있으나 소나무는 그림자가 없고, 난간 너머에는 바람이 없어도 대나무는 소리가 나네.

13,4세가 되자 벌써 성인과 비슷한 정도의 학문을 연마하여 성균관에 나아가 공부했다. 이수광에게서는 특별한 사승관계를 찾아볼 수 없는데, 아마도 명신(名臣)이라 평가받았던 아버지 이희검으로부터 글을 배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희검이 1579년(선조 12)년 세상을 떠나면서 한창 학문을 배우며 과거를 준비하던 17세의 이수광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오히려 이수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더욱 학업에 정진하여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당시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남을 칭찬하는 데에 인색했던 이이(李珥)가 이수광의 시문을 보고 으뜸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결국 그는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5 강직한 관료, 세 번의 북경행으로 시야를 넓히다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이수광의 벼슬길은 순탄했다. 예문관, 성균관, 사헌부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590년(선조 23) 8월에는 명나라 신종황제의 탄신일을 경하하기 위해 파견된 성절사 이산보(李山甫)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생애 처음으로 이역 땅을 밟게 되었다. 이수광은 당시 황제의 조정에서 안남(베트남)으로부터 파견된 사신을 보았으나, 숙소가 서로 다르고 출입 또한 자유롭지 못하여 별다른 교유를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조가 당시 이수광에게 안남 사신의 행색과 안남의 풍속 등에 대해 물었으나, 그들과 별다른 교유가 없었던 이수광은 선조의 질문에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는 후일 이수광이 두 번째로 북경에 파견되었을 때 안남사신과 깊게 교유하며 그들의 제도와 풍속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또한 외국의 문물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기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이수광은 황해도도사, 예조좌랑, 홍문관 부수찬 등 내외직을 골고루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아버지 이희검을 본받아 명예를 구하러 달려들지 않았다. 이런 그가 이조좌랑에 임명되자, 이항복(李恒福) 은 ‘당시의 선비 중에 영예로운 진출에 마음을 끊었는데도 전랑(銓郞)이 된 것은 이수광이 유일할 것이다’ 라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수광은 파직된 상태였으나, 경상방어사로 임명된 조경(趙儆)이 그를 종사관으로 삼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수광이 다른 형제 없이 홀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을 염려한 조경은 다시 그로 하여금 종군을 면하게 해주려 하였다. 그러자 이수광은 국가에서 녹을 받아먹던 자가 국가에 난리가 났는데 회피할 수 있겠느냐면서 오히려 스스로 나서서 전선으로 나아갔다. 방어사의 군대가 패한 뒤에는 수찬으로 임명되어 선조가 피난한 의주 행재소로 향하였다. 이수광이 노모가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찾아보고자 상소를 올리니, 선조는 그를 함경도 선유어사로 임명하여 함경도의 인심을 위무할 겸 어머니를 찾아보도록 배려하였다. 특히 당시 함경도의 민심이 이반되어 두 왕자를 인질로 붙잡는 등 소요가 심하였는데, 이수광이 격문을 지어 주민들을 잘 진정시켰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의병들이 분기하여 함경도가 안정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이수광은 전란 중에도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왜란이 계속되던 1597년(선조 30) 이수광은 다시 한 번 북경으로 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명나라 궁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이를 위로하기 위해 진위사로서 6개월간의 여정을 떠난 것이다. 이때에는 마침 안남에서 온 사신 풍극관(馮克寬)과 같은 숙소에서 묵게 되었다. 첫 번째 북경 방문에서 느꼈던 갈증을 풀 기회가 찾아왔던 것이다. 이수광은 풍극관과 약 50여 일간 함께 하며 시를 주고받고 필담으로 안남에 대한 정보를 듣고, 이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특히 이 때 풍극관은 귀국 후 이수광의 시를 안남 관료들에게 소개하여, 안남에서 이수광의 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유재란 당시 왜국에 포로로 잡혀간 진주지방의 선비 조완벽(趙完璧)에 의해 조선에 전해졌다. 조완벽은 포로로 끌려가 팔린 처지였으나, 한문을 잘 한다는 이유로 일본 상인의 안남 교역을 도와주면서 몇 차례 안남을 방문하였다. 이 때 안남의 한 고관이 베푼 연회에 초대되었는데, 안남 관료들이 조완벽이 조선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수광의 시를 보여주며 환대하였다는 것이다. 후일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조완벽은 자신의 경험을 주변인들에게 소개했고, 이 이야기가 이수광에게 다시 전해진 것이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이수광은 조완벽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사행에서 돌아온 이수광은 여전히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선조 말엽 국왕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이 논의되자 이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아울러 당시 중앙 정계가 혼탁해진다고 생각하여 외직을 자청, 함경도 안변부사, 충청도 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이수광은 세 번째 사행(使行)을 떠나게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광해군이 세자를 책봉하면서 명에 세자의 면복을 주청하기 위한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이수광이 부사로 임명된 것이다. 그는 이 사행에서 유구(琉球 ;오키나와)에서 온 사신들을 만나 유구의 제도 및 역사에 대해서 세밀하게 파악하였다. 이러한 경험이 후일 『지봉유설』을 편찬하는 데에 자양분이 된 것은 물론이다.

6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을 편찬하다.

광해군 즉위 후,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정국이 혼탁해졌다. 특히 광해군은 술사의 말을 믿고 경기도 교하로 천도를 고민하였다고 하는데, 이수광을 중심으로한 격렬한 반대에 결국 천도론은 무위로 돌아갔다. 또한 광해군은 즉위한 뒤 자신의 생모를 공빈 김씨(恭嬪金氏)로 올려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한 바 있는데, 1612년(광해군 4)에는 명나라로부터 공성왕후의 고명을 받아오기 위한 주청사를 파견하려 하였다. 이수광은 이 때 예(禮)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강한 반대 의견을 표명하였다.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613년(광해군 5) 이수광은 두 번이나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정치는 더욱 혼란해졌다. 1613년(광해군 5)에는 계축옥사가 일어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이 사사되고 그 일가가 몰락하였으며, 영창대군 또한 살해당하였다. 이수광은 계축옥사(癸丑獄事) 이후로 관직을 버리고 동대문 밖의 자택 비우당(庇雨堂)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였다. 『지봉유설』이 탄생한 것은 그 일 년 뒤이다.

『지봉유설』은 그동안 이수광이 모은 방대한 자료와 정보를 집대성해서 만든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다. 20권에 이르는 이 저작은 천문(天文), 시령(時令), 재이(災異), 지리(地理), 제국(諸國), 군도(君道), 병정(兵政), 관직(官職), 유도(儒道), 경서(經書), 문자(文字), 문장(文章), 인물(人物), 성행(性行), 신형(身形), 언어(言語), 인사(人事), 잡사(雜事), 기예(技藝), 외도(外道), 궁실(宮室), 복용(服用), 식물(食物), 분목(卉木), 금충(禽虫) 등의 방대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세 번의 사행에서 수집한 외국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담겨 있기도 하다. 이는 당시 조선인들의 세계관을 넓히는 데에 공헌할 수 있는 자료였다.

7 선비들의 신망을 얻다.

이수광은 1616년(광해군 8) 은둔생활을 끝내고 전라도 순천의 부사로 나아갔다. 중앙정계에 몸담지 않고 지방에서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그는 재임 중 순천부의 읍지인 『승평지(昇平誌)』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수광은 3년 동안 재임한 후 다시 상경하여 수원에서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당시 그는 성리학에 대한 서적을 섭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은 계속 벼슬을 내려도 거절하는 이수광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이수광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수광의 은둔생활은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끝이 났다. 인조는 이수광을 도승지로 임명하며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였고 그는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이수광은 병든 몸을 이끌고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고 한다. 1625년(인조 3)에는 재이(災異)로 인한 인조의 구언에 대사헌으로서 응답하여 ‘실(實)’에 힘쓸 것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당시 많은 이들이 나라를 중흥시킬 상소라 여겼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노구를 이끌고 강화도로 어가를 모셨다. 당시 병이 중했으므로, 아들들이 공주로 가는 분조(分朝)와 함께할 것을 청하였으나, 신하된 도리로 편한 곳을 찾아갈 수는 없다면서 강화도행을 고집했다고 한다. 호란이 끝난 후 이수광은 의정부 참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1628년(인조 6) 12월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이수광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공정한 인사를 추구했던 그의 공적을 그리워하였다. 또한 이수광은 몸가짐이 검소하고 놀이나 사치를 싫어하며 출처와 언행에 티가 없는 인물로 추앙받았다. 가까이는 아버지 이희검으로부터, 멀리는 외가의 선조 유관으로부터 이어져온 검소하고 강직한 몸가짐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수광은 뛰어난 학식과 강직한 몸가짐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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