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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李施愛]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든 함경도의 토호(土豪)

미상 ~ 1467년(세조 12)

이시애 대표 이미지

적개공신허종상훈교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머리말

이시애는 함경도의 대표적인 토호였다. 함경도는 북방 여진족과 경계를 이루고 여진족이 섞여서 살아가는 특수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 수립 이후 다른 지역보다 더 큰 자율성이 주어졌으며, 때문에 지방의 토호들은 군사력과 행정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세조는 중앙집권통치를 강화하면서 지역 토호의 권한을 제한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다. 지역 토호에 대한 차별로 인해 불만이 고조되었던 함경도의 토호 이시애가 함경도 길주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한때 민심의 호응으로 함흥 이북을 모두 장악하였으나 결국 관군에 진압되어 죽음을 맞게 되었다.

2 이시애가 태어나고 자란 곳, 함경도의 특수성

함경도 지역은 고려시대에 여진족의 거주지였다. 여진의 여러 부족이 통합하여 금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후 몽고족이 금나라를 멸망시켜 함경도는 한때 몽고족의 판도 안에 편입되어 있었다. 원나라가 쇠미해지자 고려 공민왕이 계속 북진하면서 영토를 넓혀갔고, 이때 이곳 출신 무장 이성계가 여러 차례 여진족을 토벌하여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초기 함경도 거의 전역이 조선의 영토가 되었으나 그 뒤에도 여진족의 침략이 계속되었으며, 세종 때 김종서로 하여금 이 지역을 경략하게 하여 부녕, 회녕, 종성, 온성, 경원, 경흥 등에 6진이 설치된 이후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영구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이유로 함경도 지방에는 여진족이 많이 섞여 살았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여진족을 토벌하여 쫓아내거나 회유정책을 써서 동화시키기에 힘썼으며, 남도(南道)의 주민들을 정복지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였다. 충청, 강원, 경상, 전라도의 주민 중 자원 희망자를 이주시키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이주자에 대해서는 양인(良人)일 경우 토관직(土官職)을 주고, 향리(鄕吏)‧역리(驛吏)는 그 역(役)을 영원히 면제하며, 천인(賤人)은 양인으로 하는 등 파격적으로 우대하여 이주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대부분 강제로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먼 북방에서 토지를 개간하며 국가의 방어체제에 얽매어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도 커졌으리라 추측된다.

조선 초의 함경도는 야인(野人)이라 불리는 여진족들과 접경한 국방상 요지로써 태조 이래 특수한 행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지방관으로 하여금 군사지휘권을 가지게 하였는데 지방관은 대개 이 지방의 세력가인 토호들을 등용하여 주민들이 지휘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들 토호들은 본래 경제적으로 부유할 뿐만 아니라 군사권까지 쥐게 되어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세조의 중앙집권정치가 강화되기 이전까지 토호들은 비록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통제를 받고는 있었으나 어느 정도 자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토호들의 자치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유향소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은 그가 맡은 군‧현을 원만하게 다스리기 위해 행정실무자인 향리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이때 지방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향리의 악폐(惡弊)를 막고 관내를 규찰케 함으로써 지방 행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런 목적으로 지방 인사 가운데 영향력 있는 인물을 향(鄕)의 고문(顧問)으로 추대하여 이용하였고 여기에 토호(土豪)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유향소는 세종 대에 경재소(京在所)의 감독을 받게 되면서 중앙정부의 지방통치기구의 하나로서 흡수되었다.

이처럼 이전보다 많은 제약을 받게 된 토호 또는 유향소 품관들이 중앙정부에 대해 반발하였다. 또한 세조의 중앙집권정치 강화에 이러한 반발과 불만은 더욱 커졌다. 그런 가운데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함경도 안의 각 읍 유향소의 품관들이 조직적으로 대거 가담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한 많은 관원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이시애와 같은 토호가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함경도에서 중앙집권화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볼 수 있다.

3 세조의 중앙집권정치의 강화와 함경도의 불만 고조

그럼 본격적으로 이시애가 왜 난을 일으켰는지 알아보자.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이시애가 처음은 아니었다. 세종 때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여진족 토벌에 혁혁한 무공을 세운 무장(武將) 이징옥은 6진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보다는 회유책이 우선시 되면서 경상도‧평안도 도절제사 임명되어 함경도를 벗어났으나 1450년(문종 즉위) 다시 북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1453년(단종 1) 수양대군(후일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제거할 때 이징옥 역시 김종서의 일파로 몰리는 상황에 처하자 이징옥은 여진족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징옥의 난이 진압되고, 세조가 즉위하면서 함경도는 반란의 지역으로 차별받았다. 세조의 집권으로 차별이 심화된 상황에서 정책적으로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를 도모했던 세조의 정책으로 인해 함경도 지역 토호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다. 이시애가 난을 일으킨 시기는 1467년(세조 13)이지만 이시애가 반란을 계획한 시기는 그 2년 전인 1465년(세조 11)이다. 세조는 즉위한 지 10년에서 12년 사이 중앙집권정치를 강화시켜나갔는데, 이시애의 불만은 세조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해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조의 중앙집권강화 정책은 호패제도(戶牌制度)와 보법(保法)의 실시로 나타났다. 호패는 성명, 출생, 신분, 거주지 등을 기록한 일종의 신분증명서인데 백성들은 항상 이를 소지해야만 했다. 호패제도를 실시함으로써 군적(軍籍)을 재편성하여 3품 이하의 퇴직관리와 산관(散官)으로서 군역(軍役)을 회피한 자, 일반 양인(良人)으로서 군적에 누락된 자들이 군적에 편입되었다. 또한 보법의 실시를 통해서 토지를 소유한 지방 세력가나 관인에게 점유되어 군적에서 누락된 많은 인정(人丁)이 군역을 부담하게 됨으로써 군역의 평준화와 함께 군액의 증가를 꾀하였다. 많은 토지와 인정을 소유하고 있던 지방 세력가들은 점유하고 있던 양인과 노(奴)까지도 군역의 대상이 되고 토지의 결수에 의거하여 더 많은 군역을 담당해야만 했기 때문에 불만이 커졌으며, 이시애를 비롯한 함경도 지방의 토호들의 불만 역시 고조되었다.

거기에 1466년(세조 12)에 실시된 직전법(職田法)은 퇴직관리나 실직(實職)이 없는 산관(散官), 사망한 관리의 가족에게 지급되던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 재정 수입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으나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경제적 타격을 주게 되었다. 반면 세조의 집권에 공이 있는 훈신(勳臣)들은 공신전(功臣田)이나 별사전(別賜田)을 지급받는 특혜를 받아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그 불만은 중앙정부, 특히 세조와 훈신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세조의 중앙집권정치의 강화와 관련된 함경도민의 또 하나의 불만은 함경도 출신의 등용을 억제한 것이었다. 정치가 점차 안정되자 세조 때에 이르러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남도인(南道人)을 수령과 관원으로 교체시켰던 듯하다. 이는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내 수령과 관원을 모두 살육하였고 이시애도 당인(黨人)으로 하여금 상서(上書)하게 하여 “본도인(本道人)으로서 본도(本道)의 각 수령을 삼을 것”을 요구한 사실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함경도민에 대한 관직 진출 억제, 즉 차별대우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4 지방관의 가렴주구

이시애가 난을 일으킨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관리들의 횡렴(橫斂)과 남형(濫刑) 때문이었다. 난이 일어나자마자 병마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비롯하여 각 지방의 수령과 군관이 살해당한 사실을 보아도 이들 관원에 대한 함경도민의 원한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강효문은 오랫동안 함경도 안에서 관직을 맡고 있었는데, 1462년(세조 8) 함경도 체찰사가 되었고, 1466년(세조 12)에는 절도사로 전임되었다. 강효문이 도민들을 괴롭혔던 정황은 이시애의 난 중에 온성의 군민(軍民)들이 진정한 글에서 잘 나타났다. 강효문은 축성(築城)을 구실로 농사철에 토목사업을 크게 일으켜 농민을 동원하여 노역(勞役)하게 하였다. 반면 자신과 그 일행은 매일 연회를 열고 수렵을 일삼아 관수미곡(官需米穀)이 탕진되고 백성들로부터 찬물(饌物)을 강제로 거두어 백성들의 생활마저 어렵게 하였다. 또 범법을 일삼아 권세가에 뇌물을 바치며 백성들에게 횡렴과 남형을 자행하였다. 따라서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많이 도망하게 되고 이시애의 적당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시애의 난의 직접적 원인이 강효문에게 있다고 파악한 것은 세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조는 강효문을 난의 원인으로 지목하여 반역죄로 다스리게 하였다.

5 함경도의 토호, 이시애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시애는 함경도의 대표적인 토호였다. 이시애의 조부(祖父)는 이원경(李原景)으로 그의 본명은 몽고식 이름인 올노첩목아(兀魯帖木兒)였다. 그는 본래 평안도 이산군(理山郡) 출신으로 일찍이 원나라에 협력하여 동녕부동지(東寧府同知)의 관직을 받았는데, 1370년(공민왕 19)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이성계(李成桂)가 왕명으로 동녕부 정벌에 나서 압록강을 건너 울라산성(亐羅山城)을 공격하자 이원경은 300여 호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이후 이원경은 이성계의 막하(幕下)로서 함경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동녕부 정벌에 종군한 일도 있었다. 그는 조선 건국 후 함경도첨절제사(咸境道僉節制史)가 되었고 다시 검교문하부사(檢校門下府事)의 직을 받았다. 이때부터 함경도 지방의 세력가로 성장하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그의 아들 이인화(李仁和)는 판영흥대도호부사(判永興大都護府事), 함길도첨절제사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토호로서의 기반을 굳혔다. 이인화가 바로 이시애의 아버지이다.

이시애는 선대(先代)에 이어 1451년(문종 1)에 호군(護軍)이 되었고 1458년(세조 4)에 경흥진병마절도사(慶興鎭兵馬節度使)가 되었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판회녕부사(判會寧府事)로 있다가 1465년(세조 11)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길주에 살고 있었다. 이때는 세조의 중앙집권정치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고, 거기에 지방관들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원성 또한 컸던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함경도는 야인과 접경한 6진 등이 있어 군사력을 확보하기에 유리하다는 조건도 이시애가 역모를 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게다가 함경도는 지세가 험준하여 관군이 북진하기 어려웠고 수비하기는 용이했다. 이시애가 수년 동안 군사를 길러서 서울을 침범하려 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함경도의 이러한 특수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 이시애의 난의 진압과 이시애의 죽음

이시애는 동생 이시합과 사위 이명효와 힘을 모아 민심을 선동하여 길주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세조는 구성군 이준(龜城君 李浚)을 4도병마도총사에 임명하고,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 허종을 함길도절제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이끄는 군사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진압했다. 난의 초반에는 반군의 기세가 매우 강하였지만, 점차 관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지원군과 군수품을 보강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결국 반란군의 방어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1465년(세조 11) 4월에 시작되었던 이시애의 난은 7월 말 반란군을 격파함으로써 완전히 전세(戰勢)를 뒤집을 수 있었고, 이후 관군은 계속해서 반란군에 진격했다. 8월 12일 마침내 허유례 등이 이시애와 이시합 형제를 포박하여왔고, 도총사 구성군 이준은 그들을 문초한 뒤 사지를 찢어 죽이는 처참한 형벌을 내리고 이시애의 머리를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도내의 각 읍에 영(令)을 내려 이시애의 일가 친족을 모두 잡아오게 하였다. 이시애 형제의 머리는 8월 18일 서울에 도착되어 왕명으로 효수되었고 이로써 이시애의 난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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