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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李彦迪]

주리적 성리설, 퇴계에게 계승되다

1491년(성종 22) ~ 1553년(명종 8)

이언적 대표 이미지

이언적 수고본 일괄-속대학혹문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성리학의 기반을 닦았으며 조선중기 사림정치의 정착에도 크게 기여한 학자관인이다. 학문적으로는 주희의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달, 영남학파 학풍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중종대 기묘사화(己卯士禍)후 사림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훈척신에 의해 정치가 농단될 때 온건한 태도로서 사림의 명맥을 이어갔으며 명종[조선](明宗) 즉위초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사림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2 가계와 학문적 성향

이언적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조선](中宗)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회재라는 호는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에서 따온 것으로 주자학에 대한 그의 열렬한 태도를 엿보게 한다. 할아버지는 참군 수회(壽會),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외조부 손소(孫昭)는 세조~성종대 관인으로 세조대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었다. 손소의 아들이자 이언적의 외숙이 되는 손중돈(孫仲暾)은 영남사림의 조종 김종직에게 배운 후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연산군대 사화에 피화되기도 하였지만 중종반정으로 재기용되어 크게 현달하였다. 손소 가문은 경주 양동에서 손꼽히는 유력가문이었는데, 이언적은 이처럼 막강한 재지적 기반을 가진 외가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또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언적은 1491(성종 22) 외가가 자리하고 있는 경주 양동에서 태어나 외숙 손중돈에게서 글을 배웠다. 지금도 경주 양동에는 그가 태어난 경주 손씨 손소의 고택 서백당(書百堂)이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박숭부(朴崇阜)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그는 1514년(중종 9) 문과 급제를 통해 출사하였는데, 출사 직후인 1517년(중종 12) 27세 되던 해에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이 일어났고 그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 논쟁은 조선성리학사에서 최초의 개념 논쟁으로 중시되는데, 여기에서 개진된 이언적의 학설을 통해 그의 대체적인 성리학설을 짐작해보게 된다. 그는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기본으로 하여 손숙돈과 조한보 두사람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는데, 특히 주리론에 입각하여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로서의 주리론은 이황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그의 학문은 외숙 손중돈을 통해 영남사림의 조종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측면도 있지만 대체로는 스스로 자득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평가된다. ‘(학통의) 연원은 없으나 스스로 성리학에 분발하니 은연중 빛나게 되었고 종내 동방에서 비견할 사람이 드물었다’는 평이 그러하다.

3 출사와 중종 전반기 기묘사화의 경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대의 폐정을 혁신하고자 연산군대 사화로 밀려난 신진 사림세력들을 다시 불러들여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도학정치를 추진하였다. 10여 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 1515년(중종 10) 중종은 드디어 조광조(趙光祖) 이하 신진 사림세력들을 본격적으로 등용하여 이른 바 ‘지치주의’로 표방되는 성리학적 개혁정치를 시작하였으나 점차 개혁의 방향이 중종과 기성의 훈구세력들의 입지점과 부딪히게 되자 1519년(중종 14)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反正功臣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사화를 유도하게 된다. 급작스러웠던 개혁만큼이나 급작스럽게 신진 사림세력을 제거하고 재차 훈구세력을 등용, 보수적인 정국 운영 방식으로 선회하게 되었으니 곧 기묘사화이다.

이언적은 출사후 마치 일장춘몽과 같이 전개된 기묘사림의 진퇴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그가 출사한 때가 1514년(중종 9)이니 20대의 젊은 그가 조광조를 위시하여 중종의 부름을 받은 선배 사류들에 갖는 존경과 기대는 한없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이언적이 조광조일파의 일원으로서 개혁정치의 일선에 참여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사림 일파는 출신 지역이나 학통 면에서 기호학인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언적은 영남 출신이었다. 또한 성향 면에서도 조광조일파가 상대적으로 급진적이고 원칙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다면 이언적은 상대적으로 과묵하고 온건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명종실록』 기사중 “(이언적은)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고 성품 또한 과묵하였으며 힘써 재능을 숨겼다. 어려서 급제하여 조정에 있었으나 기묘연간에는 어떠한 인물인지 몰랐다” 는 기록은 그가 기묘 연간에 은인자중하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이렇듯 이언적은 개혁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에 기묘사화에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같은 동류로서 조광조를 위시한 쟁쟁한 선배 사류들이 참혹한 사화를 입는 과정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기묘사화에서 살아남은 사류들에게 피화의 경험은 향후 그들이 사림정치를 펼쳐나가는데 있어 큰 경험과 경계가 되어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언적 또한 출사 초기 사화의 경험을 통해 향후 자신의 사류로서의 활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교훈을 얻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기묘사화 이후 사헌부지평·장령·사간, 인동현감, 밀양부사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 이후의 정국에서 이언적의 존재를 보여주는 최초의 실록 기사는 1524년(중종 19) 사헌부에서 ‘육조 낭관과 대간이 될 만 한 자가 적은데도 이언적이 인동현감이 된 점’을 문제삼는 기록, 또 이에 대해 중종이 ‘이언적이 대간에 합당하지만 늙은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을 자원한 것’으로 답하고 있는 기록이다. 이 기록들을 통해 이즈음 이언적이 조신들은 물론 중종에게 호의적 평가를 받는 사류로서 성장해 있었음을 알게 된다.

4 중종 후반기 척신정치와 귀향

기묘사화 이후 정국은 훈구세력 위주로 다시 재편되었다. 특히 중종후반기로 가면서 훈구세력 내에서 척신세력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이들에 의해 정치가 농단되는 혼란한 정국이 이어졌다. 이는 기묘사화후 정국 운영에서 국왕권이 정점에 놓이게 된 결과 차기 왕위 계승자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척신정치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곧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소생인 세자(후의 인종[조선](仁宗))와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소생인 경원대군(후의 명종)의 왕위 계승 경쟁을 둘러싸고 양측의 척신세력이 등장하여 쟁투하기 시작하였다. 곧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한 세력 및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로·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그들인데, 이들은 대윤과 소윤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모두 파평 윤씨 일문으로 윤임세력은 대윤(大尹) 세력, 문정왕후 세력은 소윤(小尹) 세력으로 불린 것이다.

대·소윤간의 대립이 혼탁하기 짝이 없는 척신정치의 형태로 흘러가게 된 것은 대·소윤의 대립 구도를 권력 장악의 수단으로 이용한 김안로(金安老)와 같은 권신세력이 등장하여 정권을 농단하였기 때문이다. 김안로는 중종의 맏딸이자 세자의 누나인 효혜공주와 결혼한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의 아버지이다. 처음에 아들이 부마가 되자 벼슬이 뛰어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권력을 농단하다 심정·이행 등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아들로 인해 세자의 인척이 된 자신의 처지를 십분 활용하여 정계에 복귀할 계획을 세웠다. 곧 문정왕후나 여러 비빈들에게서 지위를 위협받고 있던 ‘세자의 보호’를 내세운 것으로 그 과정에서 1527년(중종 22) 작서의 변(灼鼠-變)을 일으켰다.

곧 세자의 탄일에 누군가가 쥐의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주둥이·귀·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쪽 뜰에 있는 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일이 일어났고 다음 달 대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결국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박씨와 그 소생인 복성군(福城君) 미가 사사되었으며 좌의정 심정 또한 경빈과 결탁했다 하여 사사되는 등 많은 자가 연루되었는데, 이는 김안로가 조작하여 자신의 정적을 제거한 것이었다.

‘세자의 보호’를 내세운 김안로의 계획은 주효하였다. 1531년(중종 26) 중종은 세자의 보호를 위해 김안로를 다시 불러들였고 이후 김안로는 최고의 권신이 되어 권력을 농단, 정국은 더없이 혼미해져갔다.

이렇게 김안로가 권력을 전횡하게 되자 정광필(鄭光弼)·이언적·나세찬(羅世纘)·이행(李荇)·최명창(崔命昌)·박소(朴紹) 등 사림계 인사들은 김안로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김안로의 지목을 받아 유배되거나 사사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결국 이언적은 사간으로서 김안로 일파의 죄를 논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곧 이언적은 김안로가 다시 정국에 들어오려 하자, “심정(沈貞)은 제거되었지만 김안로가 들어오게 되면 이는 백 명의 심정과 같다. 그가 들어오면 한직에 있지 않고 반드시 크게 쓰일 것이니 나라의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김안로의 지목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김안로가 정국으로 복귀한 이후 이언적은 김안로의 당여인 채무택의 전횡과 사림계 인사 나숙(羅淑)이 이들의 잘못을 논하다가 도리어 죄를 입게 된 사실에 대해 크게 분개하였다. 그러자 김안로당인 허흡·이임·소봉 등이 함께 차자를 올려 이언적을 파직시키게 된다. “(이언적을 파직하는 상징적 조처로써) 사림들로 하여금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조정이 이때부터 크게 변해졌다”라는 실록의 평가는 이즈음 이언적이 사림계의 주요 인사로 성장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관직에서 쫒겨난 이언적은 고향 경주로 귀향한 후 경주의 북쪽 자옥산(紫玉山) 아래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칩거, 이후 1537(중중 32) 김안로일파가 몰락하게 되자 다시 정계에 복귀하기까지 7년여를 성리학 연구에 잠심하였다. “평소 고상한 아취가 있어서 경주 북쪽 자옥산 속에 거처를 선택, 기괴한 바위와 깨끗한 시내를 사랑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주위에 꽃과 대나무를 심고, 날마다 시를 읊조리고 고기를 낚으면서 세상만사를 사절하는 한편, 방안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깊이 하니, 공부가 전일에 비해 더욱 깊어져서 참으로 정밀하게 터득한 묘가 있었다”는 기록은 그의 중년 칩거기가 그의 학문적 성취에 큰 도움을 주었음을 알게 한다.

5 중종 말 정계 복귀와 사림 명사로의 성장

정국에 재등장한 김안로는 수년간 최고의 권신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세자 보호를 자처, 종내 경원대군을 둘러싼 문정왕후 및 윤원형 등의 소윤계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들과의 권력 쟁투 끝에 급기야는 1537년(중종 32)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정국에서 몰려나 사사된다. 김안로가 사사되자 이언적은 곧 중종의 부름을 받고 중앙 관직으로 복귀하였다. 종부시첨정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으며, 다시 전주부윤으로 나아갔다. 전주부윤 재직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한다.

1539년(중종 34) 전주부윤 재직시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렸는데 이는 김안로와 같은 권신의 발호에 휘말린 경험을 토대로 하여 군주의 통치철학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한 후(一綱) 이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10조목을 제시하였다.(十目) 이는 당시 사림들의 도학적 군주론을 대변한다.

이렇게 다시 정국에 등장한 이언적은 중종의 깊은 신뢰를 받게 되었고 중종이 사망하는 1544년(중종 39)까지 약 7여년간 사림의 명사로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펼치게 된다.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중종 37) 이조·형조·예조판서, 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경상도관찰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543년(중종 38)에는 경연에 나아가 명유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기묘사림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곧 김인후가 기묘사림들이 기반을 닦았던 『소학』·『향약』을 권장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를 이어 받아 “(중종이) 즉위초에는 오로지 학문에 힘써 풍속이 크게 변하였으나 사화(기묘사화)를 겪고부터는 사람들이 다 교화를 말하기를 꺼려 사습(士習)이 글러지고 풍속이 어두워졌으니 위에서 교화를 밝힌다면 풍습이 변화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중종과의 신뢰 관계가 형성되자 기묘사화를 다시 평가하고 중종에게 재차 사림정치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권한 것으로 당시 사림의 명사로서 사론을 주도하고 있던 이언적의 면모를 알게 된다.

1544년(중종 39) 무렵부터는 병으로 계속 사임을 하였는데, 이 해 중종이 사망하고 세자가 즉위하게 되니 곧 인종이다. 인종은 온화한 성품에다 성리학에도 뛰어난 조예를 보였으며 동궁 시절부터 김인후(金麟厚), 유관(柳灌), 이언적 등 사림 인사들을 매우 신임하여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세자 주변에는 기묘사화 이후 약세를 면치못하던 사림세력들이 대거 결집되었고, 자연스럽게 사림정치에 대한 새로운 기대가 생겨나게 되었다. 인종은 ‘요순이 될 소년 임금’으로 사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실제로 인종은 즉위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을 통해 사림들을 널리 등용, 사림들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이때 이언적은 병으로 고향에 머물러 있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여 특별히 여러번 소환의 명을 내리니 좌찬성직을 맡아 조정에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사림들의 여망을 뒤로 하고 인종은 즉위후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더니 재위 9개월도 채 못되는 시점인 1545년(인종 원년) 7월 사망하고 말았다. 더구나 그에게는 소생도 없었기에 인종을 지지하던 대윤계, 또 대윤계와 연결되어 있는 사림세력들은 순식간에 세력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6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와 사려깊은 처신

1545년(인종 원년) 7월 인종이 사망하자 그의 이복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불과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문정왕후와 소윤계 척신세력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더군다나 신왕이 너무 어려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행하게 되자 권력은 문정왕후와 소윤계 세력으로 급격히 옮겨가게 되었다. 윤원로가 윤원형과의 세력다툼으로 밀려나 사사된 이후 소윤계는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鄭蘭貞)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수렴정치가 시작되자마자 오랜 정적인 대윤파 제거에 나서게 된다. 윤원형은 대윤계의 영수인 윤임, 또 윤임 일파인 영의정 유관·유인숙과 그 주변에 포진된 사림을 제거하기 위해 평소 이들에게 원한을 가진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최보한(崔輔漢) 등을 심복으로 삼아 계책을 꾸며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역모죄에 몰린 대윤계는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되어 윤임·유관·유인숙이 사사되며 더 나아가 이들과 연결된 사림 인사들도 대거 피해를 보게 되었다. 다시 사화가 몰아닥친 것으로 곧 을사사화이다.

이때 이언적은 좌찬성으로 재직중이었는데, 윤임 등의 역모죄가 거론되자 영중추부사 홍언필, 좌참찬 정옥형, 우참찬 신광한, 예조판서 윤개 등과 함께 사화의 처리를 맡게 되었다.

당시 윤임 등의 죄를 논하는 비망기가 내려오고 윤원형 일파인 임백령이 간관을 벌하고자 하니 이언적은 권벌(權撥)·신광한 등과 함께 계속해서 구원하는 말을 하였으며 스스로 좌우와 더불어 의논해 계사(啓辭)를 초안까지 할 정도였다. 이는 이언적이 사세상 어쩔 수 없이 사화의 처리를 담당하였으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본의아니게 공신이 되어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며 옥사를 처리하는 중에 국문의 형장이 너무 심한 점을 지적하여 이기와 대립하더니 결국 노모 봉양을 핑계로 좌찬성직에서 사퇴하여 시골로 물러나고 말았다.

7 명종 2년 양재역벽서사건(정미사화)과 유배

을사사화를 계기로 문정왕후의 수렴정치와 이기 등의 농간을 비난하는 여론이 크게 일었고 이러한 여론은 이듬해인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곧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단하니 나라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 만하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내용의 익명으로 된 벽서가 나붙었다. 문정왕후나 윤원형·이기 등은 그 문서의 진위를 따지거나 작성자를 색출하는 대신 이 모든 사태는 오로지 이전의 역적을 엄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옥사를 일으켰다.

문정왕후의 수렴정치와 이기 등의 농간을 비난하는 여론에 대해 소윤계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 재차 대윤계 및 대윤계와 연결된 사림세력들을 토색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윤임의 인척인 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이 사사되고 권벌·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 등 대윤계 사림인사 20여 명이 유배되었으며 이들 외에도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사림계 인물들이 많아 이는 정미사화(丁未士禍)로도 불리었다. 당시 경주로 물러나 있던 이언적은 윤원형·이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강계로 유배되었다.

8 이언적의 여러 저술들

이언적은 강계로 유배된 이후 힘든 여건 하에서도 여유롭게 마음을 다스리면서 저술 작업에 몰두하였으며, 7여년의 시간을 보낸 후 1553년(명종 8) 11월 63세의 나이로 귀양지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평생 홀로 독실하게 주자학을 연구하여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구인록(求仁錄)』·『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봉선잡의(奉先雜儀)』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에서는 주자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체제를 개편하여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인정하지 않은 독창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엄격한 주자주의를 지향한 조선후기의 성리학풍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창의적인 조선전기 성리학풍을 보여준다.

『구인록』은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성리학자들의 글에 나타난 ‘인(仁)’에 대한 내용들을 모으고 정리한 것이다. 『중용구경연의』는 『중용』중에 등장하는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인 구경九經〔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내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에 대한 천착을 통해 중용의 정신을 새롭게 밝히려 한 것으로 매우 정미롭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봉선잡의(奉先雜儀)』(2권)는 제례서(祭禮書)이다.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으로 『가례』의 원칙을 묵수하기 보다는 시속에 따른 시의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등이 정치적으로 몰락한 이후인 1566년(명종 21)의 시점에 이르러 이언적의 서자 이전인은 부친이 죽기 전에 작성한 「진수팔규(進修八規)」를 명종에게 상소문의 형태로 진상하였다. 이는 군주의 학문을 위한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으로 앞서 그가 중종에 올렸던 「일강십목소」와 같은 류의 도학주의적 군주론을 담은 글이다.

9 후대의 평가

을사사화 이후 약 20년이 흐른 시점인 1567년(명종 22) 사림의 명사 이이는 선배 사류인 이언적에 대해 다음의 양면적인 평가를 하였다. 먼저 “박학하며 글을 잘했고,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성리서를 즐겨 보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몸가짐을 장중히 하고 입에서는 못 쓸 말이 없었다. 저술을 많이 하였으며 깊이 정미한 경지에까지 나아갔으니 도학군자이다”라 하여 그의 인품과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경세제민의 큰 재질과 조정에서의 큰 절개는 없었다. 을사사화시 보이지 않게 선비들을 구하기 위해 주선하고자 했다. 그러나 직언으로 바로잡지 못하고 권간(權奸)의 협박으로 추관(推官)이 되어 올바른 사람들을 신문하여 공신이 되었다. 곽순(郭珣)이 신문당할 때에 추관이 된 언적을 쳐다보고 한탄하기를, ‘우리가 복고(復古)의 손에 죽을 줄이야 어찌 알았으리오’하였다. 언적이 후회하여 차차 권간들과 다른 뜻을 내세움으로 필경은 죄를 얻어 공신록에서 배제되고 멀리 귀양가 죽었다”는 다면적인 평가도 덧붙였다.

그러나 을사사화 당시의 현실을 고려해 보자면 윤원형 일파에게로 이미 세가 기운 상황 하에서 이언적은 현실을 직시한 후 사림들의 희생을 줄이는 보다 합리적 해결책을 추구한 것으로 이해해 보게 된다. 사화가 거듭되는 어려웠던 시기, 이언적은 중종말 학문과 관직 생활 양면 모두에서 높은 연륜을 쌓아가면서 더욱 조심스럽고 온건한 태도로서 사림의 도학적 이상을 지켜가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공유되고 있었기에 이언적은 사림정치가 정착되는 선조대 이후 사림의 조종으로서 높은 추앙을 받게 된다. 먼저 선조의 즉위와 함께 을사사화에 피화된 사림들이 신원되면서 이언적 또한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72년(선조 2)에는 문원(文元)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경주 고향 마을 옆에 그를 향사하는 서원이 건립되어 선조로부터 ‘옥산(玉山)’이라는 편액까지 하사받게 된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시에 살아남은 47개 서원중의 하나로 이름이 높은데, 현재까지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세심마을에 잘 보존되어오고 있다. 옥산서원의 뒤편으로는 이언적이 권신 김안로의 전횡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거처하였다는 독락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조선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동방오현(東方五賢 :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서 문묘에 종향,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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