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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李瀷]

실학의 선구자, 새로운 조선을 꿈꾸다

1681년(숙종 7) ~ 1763년(영조 39)

이익 대표 이미지

이익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실학의 뿌리를 내린 학자

이익(李瀷)의 호는 성호(星湖), 자(字)는 자신(子新)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둘째 형마저 정쟁으로 희생되자 이익은 평생을 안산의 성호라는 호수 근처에서 처사로 은거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83세에 이를 정도로 장수하였으나 잦은 병치레와 말년의 가난으로 인해 말년에 고생하였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이익의 학문은 당대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근기 남인의 학통을 이은 그는 조선 후기 새로운 학문인 실학(實學)을 조선 학계에 단단히 뿌리내리도록 한 학자였다.

2 관료 가문의 영락과 허약한 아이

이익의 가문은 여주 이씨로, 대대로 고위 관료를 배출한 가문이다. 이익의 8대조 이계손(李繼孫)은 성종[조선](成宗) 대에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경헌(敬憲)의 시호를 받았다. 비록 땅을 지나치게 많이 점유했다는 비판이 있긴 하였으나, 전반적으로는 거치는 자리마다 공을 세운 유능한 관료라는 평가였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광해군(光海君) 대에는 동궁의 면복을 내려줄 것을 주청하러 명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 때 이상의와 함께 명에 파견되었던 인물이 바로 이수광(李睟光)이다. 대북정권에 참여하였던 이상의는 인조반정(仁祖反正)과 함께 실각하였으나, 그 자손들의 벼슬길까지 막히지는 않았다. 이익의 조부 이지안(李志安)은 문과에 급제하여 주로 사헌부와 형조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8대조 이계손이 땅을 많이 소유하였다고 하며, 또한 그 후로도 누대에 걸쳐 고위 관료를 배출하였기 때문에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붕당정치가 상호 경제와 균형의 원칙을 잃고 지나치게 정쟁이 격화되면서, 중앙 정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이익의 가문은 그 폐해의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은 숙종[조선](肅宗) 대에 대사성, 도승지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당시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의 역모로 인해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자, 대사간으로서 윤휴(尹鑴), 허목(許穆) 등 남인의 거두들을 다시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숙종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이하진은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어 허견이 역관 서효남(徐孝男)의 며느리를 겁탈한 사건을 처리하면서 진상을 숨기고 역적을 비호하였다는 명목으로 운산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익은 1681년(숙종 7) 10월 18일 이하진의 유배지 운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하진은 이익이 태어난 이듬해인 1682년 유배지 운산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해 이익의 집안은 본래의 거주지이자 이익 또한 평생을 거처하게 되는 안산의 첨성리로 옮겨왔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탓일까, 이익은 유난히 허약한 체질로 인해 병을 달고 살았다. 오죽했으면 어머니 안동 권씨가 늘 약주머니를 차고 다니면서 약을 먹일 정도였다. 그나마 병에 쓸 약을 항상 구비해놓은 것으로 봐서, 이하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가산(家産)이 어느 정도 유지는 되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이하진은 1678년(숙종 4) 진향정사(進香正使)로 청에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그는 고서 수천 권을 사서 돌아와 집에 비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집안에 갖추어진 최적의 환경도 허약했던 소년 이익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병치레가 잦은 것을 염려한 어머니 권씨 부인이 이익으로 하여금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우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익은 10세 정도에 이르기까지 글을 알지 못하였으니, 다른 대학자들의 유년시절 뿐 아니라 일반 양반 가문의 아이들에 비해서도 학업이 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역시 고위 관료를 배출한 가문의 피는 달랐던 것일까. 허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이익의 타고난 자질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어서, 총명함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11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는 둘째형 이잠(李潛)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을 어린 이익에게 갖다 대기는 어렵지만, 자신이 학업이 늦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이익은 스스로 분발하여 마음을 다잡고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여럿이 함께 공부할 때에 여느 학생들은 나이 어린 아이들답게 웃고 떠들며 장난치곤 하였으나, 이익만은 홀로 묵묵히 앉아서 종일토록 책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를 본 어머니 권씨 부인은 공부하기를 재촉하지 않아도 이렇듯 배우기를 좋아하니 근심할 것이 없다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비로소 글을 배운 이익에게 아버지 이하진이 갖추어둔 수천 권의 서적은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 수많은 서적을 두루 살펴보면서 옛사람들이 남긴 말씀과 그들의 행적을 머릿속에 담았다. 문재(文才) 또한 뛰어나 시를 잘 지어 그 중에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구절이 많았다. 이에 같이 배우는 학생들이 모두 자신들은 이익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감탄하였다.

3 다시 찾아온 고난과 은거

학문에 힘을 쓴 이익은 1705년(숙종 31) 책문(策問)으로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시험장에서 이름을 쓴 것이 격식에 어긋난다고 하여 탈락하였다. 따라서 이익은 회시(會試)에도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물론 이익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벼슬길에 나서기를 포기한 이유가 단 한 번의 사소한 잘못과 그로 인한 좌절은 아니었다.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며 실질적인 스승 노릇을 했고 다른 학자들과의 교류도 함께 했던 둘째형 이잠이 화를 당한 것이, 바로 이익이 벼슬길에서 미련을 버린 결정적인 이유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해 서인(西人)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았던 것도 잠시, 1694년 남인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복위를 반대하자 숙종은 다시 갑술환국(甲戌換局)을 일으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을 대거 등용하였다. 1701년(숙종 27)에는 당시 인현왕후의 죽음에 저주를 했다는 이유로 장희빈(張禧嬪)이 사사되고 그 오빠 장희재(張希載), 동평군(東平君) 등도 죽음을 당하자, 희빈 장씨의 아들인 세자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이게 되었다.

이잠은 1706년(숙종 32) 9월 상소하여 죽은 송시열(宋時烈)이 세자책봉 당시 취했던 태도를 공격하고, 김춘택(金春澤) 등의 권척이 전후좌우에서 세자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다면서 노론(老論)을 비판하였다. 비록 당시 김춘택 등이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이었으나 숙종은 세자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이잠의 상소에 진노하였다.

이미 그해 6월 유생 임부(林溥) 등이 동궁모해설을 주장하며 상소를 올려 처벌 받은 바 있기 때문에 숙종은 세자에 관한 문제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결국 이잠의 상소는 숙종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숙종은 이잠을 친히 국문하면서 분노를 표현하였고, 18차례나 계속된 모진 형신에도 뜻을 굽히지 않던 이잠은 계속된 매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잠에게 비판을 받았던 노론은 이잠에 대해 흉인(凶人)이라고 지칭하며 혹평한 반면, 소론(少論) 측에서는 이잠의 사건에 대해 그가 명문의 아들로 태어나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통탄스런 마음을 금치 못하고 의분을 떨쳐 상소를 올린 것이라 파악하였다. 또한 모진 형신을 당하면서도 대답이 조용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며 이잠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잠에 대한 양측의 엇갈리는 평가는 이잠의 죽음이 당시의 정치적 갈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결국 이잠의 상소 사건은 당시 붕당정치의 폐해가 극단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빚어진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형 이잠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을 본 이익은 더 이상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둘째 형 이잠 대신 이서와 종형 이진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과거 공부를 포기하면서 추구하는 학문의 성격 또한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옛 성현의 경전과 정주(程朱)의 책, 그리고 이황(李滉)의 글을 되풀이하여 읽고 반복하여 상호 고증하였다고 한다. 성리학의 핵심인 도학(道學)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4 실학의 새로운 지평

둘째형의 죽음 이후 이익은 가문의 거주지인 안산 첨성리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안산 첨성리에는 성호라는 호수가 있어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고, 그가 거주하던 장원 또한 성호장이라 불리었다. 이익의 학문은 점차 깊어져 주위 학자들이 높이 흠모하는 바가 되었고, 이내 이익의 집은 그에게 학문을 배우기를 청하는 학자들로 북적거렸다.

이익의 학문은 기본적으로는 도학을 위주로 하여 성리학의 근본적 문제의식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탐구와 이를 바깥으로 표현하는 절차인 예법을 중요시하였으며, 특히 그의 학문은 경(敬)을 위주로 하여 「경재잠도」, 「경재잠설」 등을 지었다.

또한 이익은 올바르게 행하기 위해서는 올바로 아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앎을 지극히 하는 치지(致知)를 역행(力行)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익이 역행(力行)을 등한시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앎은 곧 행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여 역행을 치지의 실제로 삼았다. 어떠한 말을 배웠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마음으로 깨닫는 것은 아니며, 혹시 마음으로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몸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므로, 모름지기 스스로 행함을 통해 그 뜻을 마음으로 깨닫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생활에서의 실천을 떠나서는 제대로 된 앎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장구(章句)의 지엽적인 뜻에만 마음을 쏟고 실공(實工)에 힘쓰지 않는 것을 근심하였다.

이잠의 죽음으로 인해 현실 정치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지니게 된 이익은 정치,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개혁론이 담긴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이다.

실학의 비조로 꼽히는 유형원과 같이, 이익 또한 전제 개혁에 주목하였다. 당시 토지가 지나치게 소수에게 집중되어 가난한 자들은 송곳 하나 세울 땅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익이 내세운 전제개혁론이 바로 한전론(限田論)이다. 다른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고대에 시행되었다고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적인 제도로 파악하였지만, 이를 당시 조선사회에 곧바로 시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설정하는 한전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하한선 이하의 토지는 영업전(永業田), 즉 대대로 영세토록 농사짓는 토지로 두어 사적인 매매를 엄금하자고 하였다. 이를 통해 모든 이들이 조그마한 토지라도 소유하여 농사지을 토지가 없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익은 자신의 아버지와 형이 희생당한 원인이었던 붕당의 폐해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그는 붕당은 곧 이해관계를 두고 서로 싸우는 데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라 파악하였다. 이해관계가 절박하면 붕당도 심해지고, 이해관계가 오래되면 붕당도 고질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관직이 한정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므로, 붕당의 폐해가 끊이지 않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이익은 당시 정치제도의 폐단을 크게 세 가지로 파악하였다.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폐단, 인재를 등용하면서 문벌을 숭상하는 폐단, 과거 시험에서 문사(文辭)가 기준이 되는 폐단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그는 이 세 가지 중에서 과거의 폐단이 가장 크다고 하면서, 인재를 추천하는 방식인 효렴과(孝廉科)나 현량과(賢良科)를 개선책으로 제시하였다.

과거제의 폐단은 또한 그가 파악한 붕당의 폐해와도 연결되는 것이며, 도학(道學)을 중심으로 현실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는 그의 학문적 성향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5 새로운 학풍의 기반

이익은 당시 새로운 학문으로 소개된 서학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아버지 이하진이 청으로부터 구입해온 수천 권의 책을 통해 개방적인 시야를 키워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가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서구의 과학 기술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학은 천주교의 교리와 함께 수용되었다. 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졌던 일부 학자들과 달리, 정통 성리학의 가치를 수호하려 했던 이익은 천주교의 교리 자체에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불교나 도교와 같은 종교적 논의는 거부하였다.

『성호사설』의 항목 종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익의 학문적 관심은 단순히 경학이나 경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역사, 천문, 문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둔 진취적인 학문 태도로 유명했고, 사실 이 다양한 분야가 그에게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고리를 가진 것이었다.

이익의 학문적 경향은 당시 그와 인연을 맺었던 여러 문인들의 성향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접왜고(接倭考)』, 『예경설경(禮經說經)』 등을 편찬한 아들 이맹휴(李孟休),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쓴 안정복(安鼎福), 『중용』과 『주역』을 주로 연구하며 서학의 논리를 비판하였던 신후담(愼後聃) 등에서부터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였던 권철신(權哲身), 이가환(李家煥)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이익의 영향을 받아 성호학파를 형성하였다. 결국 이후 권철신, 이가환 등은 천주교인이 된 죄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익의 학문은 또한 실학의 대가 정약용(丁若鏞)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익은 이황에서부터 정구(鄭逑)를 이어 허목에게로 내려온 남인의 학통을 이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정통적인 성리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가운데 이를 나아가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문제의식으로 삼고자 하였고,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그의 학문은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그 학문이 조선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1763년(영조 39) 12월 17일 이익은 자신이 오랫동안 은거해왔던 성호장에 작별을 고했다. 가벼운 질환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노비도 최소한의 수만 제외하고는 종가로 보내고 주변 친지와 이웃을 돕는 데에 힘썼던 그는 말년에 가난과 질병으로 크게 고생하였으나, 그러한 고생이 그의 인품과 학문까지도 해치지는 못하였다. 이익의 상례는 생전에 그가 정해놓은 규식대로 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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