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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李從茂]

대마도 정벌의 주역

1360년(공민왕 9) ~ 1425년(세종 7)

이종무 대표 이미지

이종무 장군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장. 태종의 측근으로서 제 2차 왕좌의 난 때 공을 세워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대마도 정벌을 이끈 사령관으로 유명하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돈문(敦文), 호는 설죽(雪竹)이다.

2 무장으로서의 출세

이종무(李從茂)는 1360년(공민왕 9) 통산군(通山君) 이을진(李乙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군기시윤(軍器寺尹)을 지낸 이길상(李吉祥)이고, 아들로는 이승평(李昇平)·이덕평(李德平)·이사평(李士平)·이후평(李厚平)을 두었다. 이종무는 젊어서부터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능하여, 무장으로서의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종무가 태어난 시대는 고려 왕조가 내우외환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연해 지역을 초토화시킨 왜구의 침략은 고려의 기틀 자체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이었다. 이렇듯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최영·이성계를 비롯한 무장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종무의 아버지 이을진 역시 무장으로서 왜구 토벌전에서 활약하였고, 이종무도 이를 따라 왜구와 싸움으로써 무장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이종무가 처음 역사에 이름을 알린 것은 1381년(우왕 7)의 일이었다. 이종무의 아버지 이을진은 1379년(우왕 5)에 충주단양도병마사(忠州丹陽道兵馬使), 1381년(우왕 7)에는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1383년(우왕 9)에는 강릉도원수(江陵道元帥), 1385년(우왕 11)에 재차 강릉도원수로 임명되는 등 왜구와 싸우는 일선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종무가 1381년(우왕 7)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종무는 이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에 임명됨으로써 사서(史書)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이종무의 존재는 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이종무의 지위가 아직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이을진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을진은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팔도도통사조전원수(八道都統使助戰元帥)로 출전하였다가 위화도회군에 동참하였으나, 이후 우왕의 복위를 꾀한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1392년(태조 1)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 다시금 장(杖)을 맞고 유배되었다. 즉 이을진은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였음에도, 이후 정세의 격동에 휘말려 조선 건국에 반대한 인물로 몰려서 실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종무는 왕조 교체 이후에도 무장으로서 일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실력으로 다시금 무장으로서 출세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1397년(태조 6) 이종무는 옹진만호(甕津萬戶)로 임명되었는데, 마침 왜구가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힘껏 싸워 적을 격퇴했으며, 그 공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진되었다가 조정으로 들어와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고려 말 왜구 토벌을 통해 입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 왕조에 들어와서도 왜구를 방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무장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이종무는 이후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李芳遠)의 측근이 되어,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원이 권력을 잡는 데 일조하였다. 그는 1400년(정종 2)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큰 공을 세웠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으며, 통원군(通原君)으로 책봉되었다. 이는 이종무가 무장으로서 출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종무는 40~50대 내내 안팎으로 의주병마사(義州兵馬使),, 남양수원등처조전절제사(南陽水原等處助戰節制使), 안주도도병마사(安州道都兵馬使),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 겸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등 고위 무관직을 잇따라 역임하였다. 또한 1412년(태종 12) 10월에는 새해를 하례하기 위한 정조사(正朝使)의 정사(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17년(태종 17)에는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되기도 했다. 아울러 1418년(태종 18)에는 다른 신료들과 함께 태종의 부름을 받아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기로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하였으며, 태종의 명을 받고 세자를 교체한다는 소식을 종묘(宗廟)에 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이종무가 단순한 무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봉호는 1406년(태종 6)에 장천군(長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이종무는 상왕이 된 태종을 시위하거나, 명에서 온 칙사를 맞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종무가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탄탄대로만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태종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그의 일파가 태종의 군사권 장악을 비판하였다는 트집을 잡아 강상인의 옥을 일으켰는데, 이때 이종무 역시 강상인(姜尙仁)의 진술에 이름이 나와 조사를 받게 되었다. 비록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판명되어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일시적으로나마 생명의 위협에 처했던 것이다.

3 대마도 정벌의 승장(勝將)

강상인의 옥이 마무리된 이후, 이종무는 다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거나 어가를 호위하는 등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남쪽 바다로부터 이종무의 일생에 가장 큰 전기가 될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한편으로는 침입해 오는 왜구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실시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는 고려 말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418년(태종 18)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사망하고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뒤를 잇자, 왜구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대마도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흉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져 대마도인들의 생활이 곤경에 처했다. 이에 대마도에서는 대규모 선단을 조직하어 조선과 명의 연안을 약탈하게 되었다. 1419년(세종 1) 5월, 대마도에서 출발한 왜구는 5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는 등 약탈을 자행하고, 이어서 연평도를 거쳐 명의 요동반도로 진출하였다. 이것이 비인현왜구사건이다.

왜구의 침입 및 요동으로의 진출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에서는 태종이 주도하여 왜구의 주력이 빠져나간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칠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신하들은 모두 적이 대마도에 돌아간 다음에 일망타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유독 조말생(趙末生)만은 허술한 틈을 타서 쳐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의하고,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에 임명하여 원정군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정벌군의 진용은 이종무 자신이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우박(禹博)·이숙묘(李叔畝)·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로 삼아 이종무를 보좌하게 하였다. 좌군(左軍)은 유습(柳濕)이 좌군도절제사(左軍都節制使)로서 통솔하고,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로 삼았으며, 우군(右軍)은 이지실(李之實)이 우군도절제사(右軍都節制使),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이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가 되었다. 이종무가 아홉 명의 절제사를 거느리는 편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이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 참찬 최윤덕(崔潤德)이 삼군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임명되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정벌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할 책임은 오로지 이종무에게 주어졌다. 그의 나이 60세 때의 일이었다.

이종무는 삼군도체찰사로 임명된 뒤 정벌 준비에 착수, 5월 18일에 태종과 세종의 전송을 받고 출발하여 거제도로 내려갔다. 이때 거제도에 집결한 병력은 병선 227척, 총병력 17,285명이었고, 65일치 군량을 준비한 상태였다. 이종무가 이끄는 정벌군은 6월 17일 출항하였다가 역풍으로 한 차례 회항한 뒤, 19일에 다시 거제도를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하였다. 정벌의 목적은 왜구의 주력군이 없는 사이 그 본거지 대마도를 섬멸하고, 가능하면 돌아오는 왜구를 격멸하는 데 있었다.

6월 20일 오시(午時), 정벌군 중 10여 척이 먼저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대마도인들은 처음에 약탈하러 나간 자신들의 선단이 돌아오는 줄 알고 환영하다가, 이윽고 정벌군의 대군이 두지포(豆知浦)에 정박하자 대거 도망쳤고, 다만 50여 명이 방어하다가 험한 곳으로 도망쳐 정벌군과의 교전을 피하였다. 이종무는 먼저 귀화한 왜인 지문(池文)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했으나, 대답을 듣지 못하자 정벌군을 나누어 파견하였다. 이때 적선 129척을 빼앗아 쓸 만한 20척을 빼고 모두 불사르고, 가옥 1,939호를 불태웠으며, 밭에 있는 곡식들도 베어버렸다. 또한 114명을 참수하고 21명을 사로잡았으며, 붙잡혀 있던 중국인 131명을 구출하였다. 이종무는 적들에게 식량이 없다는 중국인들의 증언을 듣고는 훈내곶(訓乃串)에 책(柵)을 세워놓고 적들의 왕래를 막으며 장기 주둔할 태세를 보였다. 이종무가 이끄는 정벌군은 서전(緖戰)에서 큰 전과를 거둔 것이다.

이후 이종무는 선단을 두지포에 정박시키고 날마다 군사를 상륙시켜 수색하여 가옥 68호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9명을 참수하였으며, 중국인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그럼에도 대마도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자, 26일 이종무는 정벌군을 전진시켜 이로군(尼老郡, 원래 일본어로는 니이군(仁位郡))에 도착, 좌군과 우군을 먼저 상륙시켰다. 그러나 대마도에서는 험한 곳에 매복하여 기다렸다가, 좌군절제사 박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접근하자 습격하여 좌군이 패전, 추격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비록 우군절제사 이순몽과 병마사 김효성(金孝誠) 등이 힘껏 싸워 적을 격퇴했으나, 조선군에서 전사하거나 해안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백 수십 명이나 되는 손해를 입었다. 대마도에서 조선군의 장기 주둔을 우려하여 글을 보내 수호(修好)를 청함으로써 체면을 살리기는 했지만,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정벌에 한 점 오점이 남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국지적 전투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일단 꺾이고, 또한 대마도에서 글을 보내 철군을 청함으로써 명분을 얻은 정벌군은 7월 3일 거제도로 돌아왔다. 비록 인명 피해가 있었지만, 전함은 한 척도 잃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큰 피해 없이 돌아온 셈이었다. 조정에서는 이종무를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로 삼는 등 여러 장수들을 승진시키고, 장수들에게 갑옷과 옷을 주며 술을 하사하는 등 격려했으며, 전사자에 대한 보상을 주어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리고 좌의정 박은(朴訔)의 진언에 따라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의 배 30여 척이 대마도로 돌아오는 때를 맞추어 다시 대마도로 가서 격파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왜구가 명군에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태종은 대마도의 재정벌을 중지하고 일부 장수들을 해안에 배치해 돌아오는 왜적을 경계·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정벌군 사령관으로서의 이종무의 임무는 이로써 일단락된 것이다.

이종무는 8월 4일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올 때 태종과 세종은 함께 낙천정(樂天亭)에 거둥하여 맞이하였으며, 주연을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였고,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내렸다. 대마도 정벌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서, 이종무는 이때 무장으로서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4 다사다난한 말년

태종과 세종의 환영을 받은 이종무는 곧이어 찾아온 명의 사신을 영접하는 등, 이전과 다름없이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대마도 정벌 과정에서 일어난 불미스런 사건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박실이 이끄는 부대가 이로군에서 패배한 데 대해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거셌는데, 조사가 진행되면서 패전의 책임이 박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벌군 사령관이었던 이종무에게도 있다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로군의 전투에서 이종무가 정벌군 중 일부만을 상륙시켰으며, 전세가 불리해진 박실이 구원을 청했음에도 이종무가 들어 주지 않은 것이 패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태종과 세종은 정벌이 전체적으로 승리로 끝났으며, 정벌군이 공을 세운 것을 감안하여 죄를 묻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사건이 이종무를 곤경에 빠뜨렸다.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에 출정하면서 죄가 있는 김훈(金訓)과 노이(盧異)를 데리고 간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김훈은 옥구진병마사(沃溝鎭兵馬使)로 재직 중 조모(祖母)의 상을 당하였음에도 빈소에 가지 않고 마음대로 상경하여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던 상왕 정종(定宗)을 남몰래 만나보고 활과 화살 및 입던 옷을 받은 바 있었다. 조선 초 불안하던 정치 상황에서 이는 정종의 복위를 획책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김훈은 사형을 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태종이 관대하게 처분하여 장형을 당하고 귀양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반면 노이는 간관으로 재직하다가 태종을 비판하다가 사실이 아닌 내용을 전파한 죄로 귀양을 갔다가 풀려난 인물이다. 이종무는 김훈이 공을 세우기를 자원하고, 노이 역시 무재(武才)가 있다 하여 이들을 데려갔는데, 문제는 이들이 당시 석방된 상태이기는 했으나 불충하다는 죄목을 벗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이종무는 태종에게 이들을 데려가겠다고 보고하기는 했으나, 태종의 비답이 오기 전에 이들을 이미 배에 태운 상태였다.

정벌 과정에서의 실책은 불문에 붙여졌으나, 불충의 죄를 지은 이들을 허락이 내리기도 전에 배에 태워 데려간 것은 태종이나 세종도 완전히 감싸주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이종무는 의금부에 하옥되어 국문을 받았고, 사헌부에서는 김훈이 이종무와 결탁하였다고 하여 이종무를 모반으로 논해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대마도 정벌이 완전히 종료된 지 3개월이 지난 11월, 태종과 세종은 이종무가 공신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원하는 지역에 부처(付處)하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하지만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받은 이종무는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국문을 당할 때에 “늙은 놈이 죽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옳았다.”고 하며 언사와 안색에 원망하는 빛을 나타냈는데, 이것이 처벌 논의를 더욱 촉발하였다. 이로 인해 대간을 비롯한 신료들로부터 이종무에게 극형을 가해야 한다는 논의가 빗발쳤으나, 태종과 세종은 그의 성격이 솔직하여 그런 것이라 하여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다만 그의 직첩과 그에게 지급된 과전(科田)을 회수하는 선에서 처벌을 그쳤다.

태종은 1420년(세종 2) 6월에 사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종무를 용서하여 서울 밖에 살도록 허락하였고, 9월 말에는 이종무의 고신(告身)을 돌려주었으며, 10월에는 이종무를 다시 장천군으로 봉하고 그의 과전을 돌려줌으로써 그를 완전히 복권시켰다. 이종무의 그간의 공이 참작된 것이다. 이후 이종무는 1421년(세종 3) 12월에는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으로 봉작이 올랐고, 1422년(세종 4)에는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의 제조(提調)로서 도성의 경영에 참여하였으며, 1423년(세종 5)에는 명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어 이듬해 귀국하는 등 고위 신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종무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8월에 이종무를 사은사로 파견하고, 11월에는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 권희달(權希達)을 진하사(進賀使)로 연이어 파견하였다. 그런데 권희달은 명에 사신으로 가서 공식 석상에서 조선에서 바친 말은 똥을 싣고 다니던 말이라고 외치는 등 행패를 부렸으며, 또한 조그마한 일로 부하 및 중국 인부를 매질하는 등 세세한 문제들도 더불어 일으켰다. 이로 인해 1424년(세종 6) 3월 여러 사람들이 처벌을 받았는데, 이종무는 역시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다시금 직첩을 빼앗기고 부처(付處)되었다. 이번 처벌 역시 이종무로서는 자신의 실수라기보다는 남의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뒤집어쓴 측면이 컸다.

이듬해인 1425년(세종 7) 1월 이종무는 직첩과 과전을 다시 돌려받았고, 다시금 장천부원군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은 6월 9일, 그는 향년 66세로 사망하였다. 조정에서는 내관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의를 하사하였으며, 조회를 3일간 정지하여 공신의 죽음에 예우를 표하였다. 그의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이종무는 젊었을 때부터 대마도 정벌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토벌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태종의 신임을 얻어 공신이 되었고, 군의 요직에 임명되었으며, 외교능력도 인정받아 두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비록 두 차례 위기를 겪었으나, 그간의 공훈을 토대로 오래지 않아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세종이 그에게 제사를 내리는 교서(敎書)에 적힌 바와 같이, 이종무는 간성(干城)의 장수요, 사직(社稷)의 신하였다. 그는 대마도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끈 무장으로 후대에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이종무의 묘는 현재 경기도 용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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