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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李恒福]

오성, 청백리로 남은 외교가

1556년(명종 11) ~ 1618년(광해군 10)

이항복 대표 이미지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

국립중앙박물관

1 난세의 조정자

이항복(李恒福)의 자(字)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또는 동강(東岡)이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오성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환란이 계속된 난세에 조정의 중심 관료로서 능력과 인품으로 여러 갈등을 조정하여 해결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외교를 통해 난리를 극복하였고, 붕당 간의 갈등이 지속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조정자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인품이 비굴하거나 모사꾼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강직한 성품과 청빈한 생활로 명성을 얻은 이항복이었기에, 여러 이익이 엇갈리는 난세에서 혼란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관료 집안의 말썽쟁이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 그의 선조는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이다. 이항복의 집안은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5대조 이연손(李延孫)은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고조 이숭수(李崇壽)는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증조부 이성무(李成茂)는 안동판관을 지냈다. 이항복의 직계 선조 중에서는 유일하게 조부 이예신(李禮臣)만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포천에 묘역(墓域)을 가려 정하면서 자신의 뒤에 반드시 이세(二世)가 연달아서 현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한다. 과연 묘역의 음덕이 있었던 것일까. 이예신의 아들 이몽량(李夢亮)은 세 임금을 섬기면서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다.

이몽량은 중종[조선](中宗) 대에 벼슬길에 나아가 예문관 검열,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으며, 명종[조선](明宗)이 즉위한 후 공신에 책록되고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조식(曺植)을 천거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러워 일찍이 화를 내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우애가 두터워 형이 죽고 난 후 형수와 조카가 곤궁해지자 항상 봉록에서 정해진 양을 떼어주었으며, 혼자 사는 누이의 5남매 모두에게 혼수를 준비해 주었다. 남을 돕기를 즐기는 이몽량의 성품은 이항복에게도 이어졌다.

이항복은 1556년(명종 11) 10월 15일 서울 서부 양생방(養生坊) 지금의 서소문동, 남대문로 일대)에서 이몽량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모친 최씨가 이항복을 임신하였을 때 상을 당한 후라 병약했기 때문에 낙태를 시도하였다. 그래서인지 이항복은 오른쪽 갈비뼈와 어깨, 등이 검게 썩은 채로 태어났고 이후에도 새 살이 돋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갓 태어난 이항복은 2일 동안 젖도 물지 않고 3일 동안 울지도 않아 집안사람들이 매우 걱정하였다. 이에 지나가던 점쟁이 박견(朴堅)을 시켜 아이의 명운을 점쳐보게 하였다. 그런데 걱정하던 집안사람들과는 달리 점쟁이는 오히려 이몽량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 아이는 고관대작이 될 것이니 공보다도 두 계급이나 더 높겠습니다.”

점쟁이의 말대로, 이항복은 어려서부터 영특했다. 재주가 뛰어나고 식견과 도량이 보통 아이들과는 크게 달랐으므로, 이몽량 또한 이항복을 두고 장차 가문을 창성하게 할 아이라며 기특히 여겼다. 8살이 되자 비로소 글을 읽고 짓기 시작했다. 이몽량이 시험삼아 검(劍)과 금(琴), 두 글자로 변구(騈句)를 짓게 하였다. 그러나 이항복이 즉시 시를 지어 읊었다. “검에는 장부의 기상이 있고, 거문고에는 천고의 소리가 담겨 있네(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 이몽량을 비롯해 옆에서 구경하는 이들이 모두 이항복이 크게 될 아이라 감탄하였다.

그러나 이몽량은 막내아들이 성공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이항복이 9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린 이항복은 자신을 아껴주던 아버지가 죽자 몸이 수척해질 정도로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항복은 12, 3세 때부터 이미 아버지 이몽량처럼 재물을 아끼지 않으면서 남을 구제하곤 하였다. 그가 새 저고리를 입고 다니자, 다 해진 옷을 입은 이웃 아이가 보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저고리를 즉시 벗어 이웃 아이에게 주었다. 심지어는 자기가 신고 있던 신을 벗어서 맨발로 다니는 이에게 선 듯 내어준 일도 있었다. 이러한 행동을 기이하게 여긴 어머니 최씨가 이항복의 뜻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거짓으로 화를 내며 이항복을 나무랐다고 한다. 그러자 이항복은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차마 주지 않을 수가 없다면서 남을 돕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난세의 조정자로서의 기질은 이미 이때부터 드러났던 모양이다.

아버지를 잃고 잠시 일탈의 시기를 가진 것일까. 이항복은 좀처럼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 어려서 연약했던 이항복은 15살 정도가 되자 건장해졌으며, 사내아이답게 용맹을 좋아하였다. 그는 당시 씨름이나 공차기 같은 놀이에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항복이 멋대로 노는 모습을 본 고모부가 어머니 최씨에게 이를 전할 정도였으니, 운동을 잘 했던 것을 넘어 꽤 말썽을 부리고 다닌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당시 병석에 누워있던 어머니는 고모부의 전언을 듣고 화를 내며 이항복을 불러 꾸짖었다. “미망인(未亡人)이 곧 땅속에 들어갈 판인데 너는 오히려 무뢰한들과 놀고 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효심이 뛰어났던 이항복은 울면서 어머니의 가르침을 들었다. 이후로는 호방한 버릇을 씻어버리고 학업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3 떠오르는 명망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항복은 시집간 누님에게 의탁하여 지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슴에 간직한 채 경전을 읽으며 학업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본격적으로 학문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금세 유명해졌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그를 당대의 유명한 인사들도 한번 만나보고자 청할 정도였다. 영의정까지 역임한 권철(權轍) 또한 그의 소문을 들은 이들 중 하나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손녀를 이항복에게 시집보냈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권율(權慄)이 이항복의 장인이 된다.

권율이 이항복을 사위로 맞은 데 대해서는 다른 일화도 전해진다. 이항복과 권율의 집은 서로 이웃하고 있었는데, 이항복의 집에서 자라던 감나무 가지가 담을 넘어 권율의 집 쪽으로 뻗어나갔다. 그러자 권율의 하인들이 감나무 가지가 넘어왔으니 그 가지의 감은 자기들 것이라면서 감을 따먹었던 모양이다. 이를 본 어린 이항복은 권율의 집으로 찾아가 권율이 기거하던 방문에 대뜸 주먹을 찔러 넣고, 놀란 권율에게 물었다. “이 주먹은 누구 것입니까?” 권율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니 주먹이 아니겠느냐.” 그러자 이항복이 받아쳤다. “그런데 뿌리가 우리 집에 있는 감나무 가지에서 왜 대감님댁 하인들이 마음대로 감을 따먹습니까?” 당돌한 이항복의 기지에 감탄한 권율은 결국 이항복을 사위로 삼았다는 것이다.

1574년(선조 7) 권율의 딸과 혼인한 이항복은 1580년(선조 13)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급제한 이항복은 이이(李珥)와 만난 적이 있었다. 이항복이 국가의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아본 이이는 조용히 이항복더러 자신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석담(石潭)으로 한 번 찾아오라고 일렀다. 그런데 당시 이이가 이조판서로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항복은 권력을 탐한다는 소리를 듣기가 싫어 일부러 찾아가기를 피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이가 세상을 떠나니 이항복이 대학자와 교유를 지속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4 평생의 지기, 이덕형

평생의 지우(知友) 이덕형(李德馨)을 만난 것도 이 때 즈음이다. 이항복과 이덕형의 사이는 오성과 한음이라는 애칭으로도 유명하다. 서로 다른 붕당에 속했음에도 평생 절친한 친구로 지낸 이들의 우정으로 인해, 세간에는 이들의 어릴 때부터의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이들은 과거에 급제하면서부터 서로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해 급제한 이항복, 이덕형, 이정립(李廷立)이 모두 학문이 뛰어나기로 유명하여, 당시 사람들이 경진년(庚辰年)에 급제한 세 명의 이씨라 하여 ‘경진삼이(庚辰三李)라 불렀다.

이항복이 벼슬길에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선조[조선](宣祖)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강연을 위해 재능 있는 신하들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당시 이이가 5명을 선발하여 추천하였는데, 여기에 이항복과 이덕형이 모두 포함되었다.

명실 공히 이후 조정을 이끌어나갈 인물들로 뽑힌 것이었다. 권율 및 이이와의 인연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항복은 정치적으로 서인(西人)에 속했다. 이덕형은 북인(北人)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사위로서 광해군 재위 이후에는 남인(南人) 계열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항복과 이덕형은 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어려운 시대를 맞아 조정을 이끌었다.

5 계속되는 난세

이항복이 조정에 들어선 시기는 동인(東人)과 서인이라는 붕당이 형성되며 상호 간의 정쟁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이로 인한 각종 옥사와 함께 임진왜란 발발로 인해 정계는 계속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항복은 1589년(선조 22) 발생한 정여립(鄭汝立)의 난, 즉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잘 다스려 선조의 신임을 얻었다. 당시 동인 관료들이 대거 숙청당하였으나 이항복은 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처벌하는 데에만 힘쓰지 않고 죄상을 명확히 가려 피해를 최대한 막고자 하였다고 전해진다.

1591년 이번에는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옹립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 후 유배에 처해졌다. 당시 사람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는 것을 걱정하여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항복은 정철을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잠시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항복을 신임한 선조는 그를 다시 도승지로 발탁하였으나, 정철과 연루하여 공격하는 자들이 많았다. 당시 대사헌이었던 이원익(李元翼)의 비호가 아니었더라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주변의 평가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강직하게 지킨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붕당간의 정쟁이 계속되던 당시 정국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신립(申砬)마저 탄금대(彈琴臺)에서 패배하자, 이항복은 나라를 위해 순국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매일 퇴청한 후 안채로 향하는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채에 기거하면서, 손위 누이와도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끼던 측실이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뵙기를 울면서 청하였으나 단호히 거부하였다. 아마도 왜군이 도성을 점령하면 자결을 하려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떠날 것을 결정하자 자신의 마음을 잠시 접어둔 채로 어가를 호종하였다. 이 와중에 이항복은 국가 위기 수습을 위해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오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이덕형과 함께 명에 원군을 요청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으며, 명군이 참여한 후에는 명과의 외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어가가 북쪽 끝 의주까지 이르자, 이항복은 어가가 요동으로 넘어갔다는 소문 때문에 민심이 동요할 것을 염려하여, 어가가 아직 조선의 영토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에 힘썼다. 결국 이는 각지에서 의병의 활약을 고무시켰으며 명군의 참전, 이순신(李舜臣)의 제해권 장악과 함께 전세를 역전시킨 주요 요인이 되었다. 서울을 탈환한 후 분조(分朝)를 남쪽으로 파견하였을 때에는 광해군과 함께 하며 그를 보필하였다.

6 세태에 굽히지 않은 단호한 조정자

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이 해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臨海君)을 처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이항복은 이를 반대하였다. 이처럼 이항복은 대북이 정국을 주도하는 와중에 광해군과의 의견 또한 일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해군 재위 기간 동안 재상에 임명되었다. 선조 재위 시로부터 계속되어 온 정국에서의 경험,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을 모시던 경험이 인정받은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정국을 조정하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고 판단된다. 일례로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을 비판했던 사건을 들 수 있다. 북인의 산림이던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배향을 비판하였을 때, 당시 성균관 유생들이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하며 그를 유적(儒籍)에서 삭제해버렸다. 이에 광해군이 노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려고 하니 성균관 유생들이 도리어 권당(捲堂 : 일종의 동맹휴학)하며 반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이항복은 광해군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사태를 무마시켰다.

그러나 광해군대 정국은 점차 파행으로 치달으며 더 이상 그로서도 조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항복은 좌의정으로 임명된 후 당시 영의정이던 이덕형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 인목왕후(仁穆王后) 폐서인 등 대북 일파가 주도한 패륜 행위를 막고자 애를 썼다. 결국 그는 탄핵을 받아 오랫동안 몸담은 정계를 떠나 노원에서 은거를 시작하였다.

이항복이 떠나자 그의 지우 이덕형은 의지할 데가 없이 국사를 걱정하며 냉주를 찾아 즐기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항복은 이를 듣고 슬퍼하며 노원으로부터 달려가 장례를 참관하였다. 친구를 떠나보낸 슬픔과 나라에 대한 걱정에 그는 다시 한 번 광해군에게 폐모론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나, 돌아온 것은 유배에 처한다는 처벌뿐이었다. 이항복은 결국 1618년(광해군 10) 5월 13일 유배지 함경도 북청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의 강직한 성품은 나라가 고난을 만났을 때 더욱 빛나 난세의 조정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이정구(李廷龜)의 이항복에 대한 평은 그의 일생을 잘 보여준다.

조정에 들어온 지 40년 동안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누차 이름이 훈적(勳籍)에 올랐으나 집안에는 한두 섬의 비축해 둔 곡식도 없었다. 조정에 당파들이 서로 배척하여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오로지 한마음으로 정도를 부지(扶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혹 어느 한쪽으로 표방하는 듯이 보였으나 공 자신은 시비(是非)의 밖에 초연히 특립(特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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