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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

퇴계학, 퇴계를 연구한다

1501년(연산군 7) ~ 1570년(선조 3)

이황 대표 이미지

이황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조선의 영원한 스승

이황(李滉)은 인간 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강학(講學)을 통해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수준을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는다. 기대승(奇大升)과의 논쟁은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향약 제정과 서원 건립은 성리학적 정치관이 곳곳에 퍼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인품과 처세 또한 동시기 여러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세 학자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되었다. 또한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남인(南人)은 조선 후기 정치의 큰 축으로 활동하였다.

2 사화의 시대

퇴계 이황이 태어난 16세기 조선 정치는 사화(士禍)로 인해 매우 혼란했다. 전반적으로 본다면 의리(義理)와 도학(道學)을 내세운 새로운 정치집단인 사림(士林)이 정계 전반으로 진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 질서가 점차 태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勳舊派)의 반발은 매우 거셌다. 이러한 반발은 결국 사림이 큰 피해를 입은 사화로 드러났다.

1498년(연산군 4) 첫 사화가 벌어졌다.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빌미가 되어 김종직의 문인 김일손(金馹孫)이 사형당하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이 처벌받았으니, 바로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죽음과 관련된 자를 처벌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벌어졌다. 당시 김굉필 등이 죽음을 당하였고 연산군은 이미 죽은 이들까지 부관참시(剖棺斬屍 : 관을 파내어 시신을 참하는 형벌)하도록 명하였다.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은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민심을 잃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조선](中宗)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새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사림계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정국을 일신하려 하였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기묘사림(己卯士林)은 이 때 중용되어 소격서(昭格署) 혁파, 현량과(賢良科) 실시 등을 통해 성리학적 정치 질서를 구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반정공신(反正功臣) 녹훈 삭제 문제로 훈구파와 크게 대립하였고 결국 1519년(중종 14) 조광조, 김식(金湜), 기준(奇遵) 등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1545년(명종 즉위)에는 명종[조선](明宗)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과 인종[조선](仁宗)의 외삼촌 윤임(尹任) 등 외척 세력의 대립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벌어져 또다시 사림파 인물들이 해를 입었다.

성리학적 정치 질서의 실현을 위한 사림의 분투는 계속되었으나, 기존 기득권 세력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시대는 새로운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3 무신 집안의 막내 아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스승인 이황은 무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선대는 진보(眞寶)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진성(眞城)이라 하였다. 이황의 6대조 이석(李碩)은 진보현의 아전으로 있다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5대조 이자수(李子修)는 고려조에 관직이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는데, 특히 홍건적 토벌에 무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또한 그는 왜구의 침략을 피해서 진보에서 안동(安東) 주촌(周村)으로 이사하여 살기 시작했다. 이는 이황의 가문이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된다.

이황의 고조부 이운후(李云候)는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증조부 이정(李禎)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던 무인으로, 세종대에 여진족 정벌에 큰 무공을 세웠다. 이후 한산군수(韓山郡守), 선산부사(善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셋째 아들 이계양(李繼陽)이 바로 이황의 조부로, 이황의 고향 예안현 온계리로 옮겨 온 주인공이다. 그는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 합격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여 후손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후일 이황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강학(講學)에 몰두한 것은 그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가학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무신 집안에서 이황과 같은 대학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 또한 이계양의 공이 크다. 그의 두 아들은 이계양의 교육으로 인해 뛰어난 학자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계양의 첫째아들이자 이황의 부친인 이식(李埴)은 특히 학문을 좋아하였다. 공부에 전력하기를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찾고 굶주린 자가 밥을 찾듯이 하였다. 옛것을 상고하는 데에 힘을 써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밤낮으로 연구하였다. 학문이 점차 증진하면서 동생 이우(李堣)와 함께 학자들에게 칭송받았으며, 특히 박학다식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황의 숙부인 이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당시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판(戶曹參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황의 선조 중에서는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셈이다. 또한 이우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황에게는 아버지이자 스승의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대학자가 성장할 여건은 마련되어 있던 셈이다.

4 도학에의 정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식은 본래 의성 김씨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의성 김씨는 2남 1녀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춘천 박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그 막내가 바로 이황이다. 그러나 이황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황의 친모 춘천 박씨는 졸지에 장가든 첫째를 빼고도 6남 1녀에 달하는 자녀들을 떠맡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오히려 자녀들의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박씨는 농사와 양잠에 힘을 써서 가세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공부에도 돈이 필요한 법, 근검절약하면서도 자녀들 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때가 되면 학비를 내어 취학을 시켜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문장 뿐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는 것 또한 중요시하였다. 과부의 자식이라 행실이 불량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인의 가르침 덕분일까, 이황은 예의 바르고 우애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

이황은 6살 때에 처음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이면 일어나 단정한 태도로 전날 배운 것을 외워본 후에 엎드려 가르침을 받았다. 어른을 대할 때면 항상 공손한 태도로 대하였으며, 밤중에 깊이 잠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면 곧 깨어나 대답하였다고 한다. 8살 때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베였는데 이황이 이를 붙들고 울자, 부인이 손을 다친 형도 울지 않는데 왜 우느냐고 물었다. 이황은 이에 피가 저렇게 흐르니 왜 아프지 않겠냐고 대답하였다. 이황의 인자한 마음과 우애로움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2살부터는 숙부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이(理)라는 글자의 뜻을 탐구하다가 이우에게 물었다. “모든 일에 있어 옳은 것이 바로 이(理)입니까?” 이우는 이를 듣고 벌써 글의 뜻을 알았다면서 기뻐하였다. 이우는 이황과 그의 형 이해(李瀣)를 두고, 죽은 형이 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라며 칭찬하였고, 또한 이황에게 가문의 미래를 이끌 것을 기대하였다.

이황은 점차 성리학에 정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세 때 숙부 댁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접하였다고 한다. 도학(道學)으로의 정진에 뜻을 두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는 성리학의 정수를 접하고서는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린 느낌이었다고 술회한다. 일생 동안 추구해야 할 학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은 것이다.

23세 때 이황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조선](成均館)에 처음 유학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기묘사화 직후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성균관마저 그 혼란함에서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황의 엄격한 행동거지는 찬사의 대상이 아니라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선비의 기상이 땅에 떨어진 시기에는 올바른 행위도 겉치레에 불과했던 것이다. 실망한 이황은 결국 두 달 만에 성균관을 떠났으나, 서울로의 유학이 소득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후일 저명한 학자로 성장하는 김인후(金麟厚)를 만나 교분을 나누었던 것이다. 당시 김인후는 이황을 영남의 수재로 칭송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 때 『심경(心經)』이라는 또 다른 성리학의 고전을 접하였는데, 이 역시 이황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황은 33세인 1533년(중종 28)에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23세 때 유학한지 10년만이었으나, 여전히 당시 성균관의 선비들은 과거를 중시하고 도학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지고 있어, 이황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기풍이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었는지 진중한 언행마저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10년전 에 비해, 많은 선비들이 퇴계의 학식과 언동을 존경하며 따랐다고 한다. 이황과 같은 인물들이 시대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가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이황은 여주에 거주하던 김안국(金安國)을 방문하였다. 김안국은 김굉필의 문인이며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던 인물이다. 이황은 그를 찾아뵌 후 비로소 정인군자의 언론을 들었다는 감회를 표출하였으니, 이황이 학문과 정치에 있어 어디에 뜻을 두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 혼탁한 벼슬길에서 고군분투하다

퇴계 이황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49세 사직서를 제출한 시기까지 이황은 벼슬살이에서도 그 학문과 인품으로 성공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이황의 벼슬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황은 1521년(중종 16) 21세 때 결혼한 허씨가 1527년 세상을 떠나자 1529년 안동 권씨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이황의 장인인 권질(權礩)은 정언(正言) 권전(權磌)의 형이었는데, 권전은 기묘사림으로 기묘사화 당시 파직된 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 이황은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있다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발탁되었는데, 당시 간관(諫官)이 권력층의 사주를 받아 이황이 권질의 사위라는 것을 이유로 사관이 될 수 없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이황은 사관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실권자 김안로(金安老)가 만나보자 청하였으나 이황이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존 권력층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대표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황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535년에는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노(倭奴)를 동래(東萊)까지 이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주(驪州)의 목사로 있던 이순(李純)과 신륵사(神勒寺)에서 노닐며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참동계(參同契)』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1536년에는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는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해 1539년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탈상한 후에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경연에 들어 수차례 임금의 행동거지에 대한 간언을 올리기도 했으며, 외척의 득세를 경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종 말 다시 정국이 혼란해지는 기미를 보였으며, 퇴계 또한 벼슬살이를 계속하려는 마음을 버리기 시작하였다.

중종과 인종이 잇따라 승하하면서 어린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윤 일파와 소윤 일파 등 양대 외척 세력이 권력을 두고 다투기 시작하였다. 결국 을사사화가 일어나 여러 선비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황 또한 을사사화를 주도한 이기(李芑)의 계략으로 인해 관직이 잠시 삭탈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외척이 들끓는 중앙 정계를 벗어나 지방에서 인재를 육성하여 이 인재들을 통해 중앙의 정치 질서를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기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548년(명종 3) 이황은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였다. 10월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상피제(相避制)로 인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옮겨갔다. 지방관으로서 이황은 고을을 정성스럽게 다스리고 백성을 측은히 여겨, 정사가 청렴하고 간결하였기 때문에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1549년 12월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감사에게 청하였다. 군의 북쪽에 위치한 백운동은 고려 때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살던 곳으로, 이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서원을 세워 안유를 제사하고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하였다. 이황의 요청에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과 판액,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다. 조선 시대 사림 중심 정치를 대표하는 서원의 흥성(興盛)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혼탁한 중앙 정계를 대신하여 지방에서 사림을 육성하고 궁극적으로 중앙 정계의 혁신까지 가져오고자 한 이황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다.

6 도산에 깃들다

이황은 결국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방에서 제자를 기르는 방법을 택하였다. 병으로 감사에게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명하고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50년(명종 5) 2월 비로소 퇴계(退溪)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귀향과 은거의 기쁨도 잠시, 혼탁한 중앙정계의 물길은 이황의 가문에게도 몰려왔다. 가장 친했던 넷째 형 이해가 당시의 권력자 이기의 모함에 빠져 곤장을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고 말았던 것이다. 중앙 정계를 떠나고자 한 이황의 선택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형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이황의 문명(文名)은 드높았기 때문에 이후에도 수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주며 그를 중앙 정계로 복귀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는 한사코 벼슬길에 다시 나서기를 거부하였다. 끈질긴 구애에 이기지 못해 벼슬에 나아간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오래지않아 다시 사직하기를 반복하였다.

1559년(명종 14)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강학에 본격적으로 힘쓰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해에는 신진학자 기대승에게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논변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논쟁’이다.

이황은 인간 본성의 선함을 확신하면서, 그 본래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수양에 학문의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선한 감정인 사단과 악한 감정인 칠정을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단은 본성의 선함으로 인한 감정이며, 칠정은 바깥의 사물에 의해 동요된 상태이다. 또한 이황이 보기에 본성의 도덕성은 만물을 관통하는 이치인 이(理)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선한 감정인 사단을 이(理)가 발동한 것으로, 악한 감정인 칠정을 기(氣)가 위주가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황의 설명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또한 사단이 대표하는 인간 본성의 도덕성을 중요시한 이황의 의견에는 동의를 표하였지만, 사단과 칠정, 그리고 이(理)와 기(氣)를 지나치게 분리한 이황의 설명에는 미진한 점이 있다고 보았다. 세상 만물은 모두 이(理)와 기(氣)가 합쳐져 발생한 것이기에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여 발동하였다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 모두 이기(理氣)가 합쳐진 것이고 사단과 칠정 또한 본래 선과 악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칠정은 모든 감정을 아우르는 명칭이며, 그 중에서 절도에 맞은 것들만을 추려 사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몇 년간의 논쟁 끝에 기대승은 결국 이황의 견해대로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며 논쟁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와 패배로 판단할 수만은 없다. 이황 또한 새파란 젊은 학자 기대승의 논지를 받아들여 자신의 견해를 수차례 수정하였고, 바로 이 점에서 기대승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이황의 학구적인 태도와 인품에 감탄하면서 존경을 표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 논쟁은 단순히 두 학자 사이에서 진행되었던 논쟁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두 학자가 논쟁하면서 주고받았던 편지는 조선의 다른 학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며, 각 학자들은 자기들 나름의 탐구를 통해 논쟁에 대한 평을 내놓기에 이른다. 결국 조선의 학계는 이황의 문인을 중심으로 한 학파와 기대승의 논지를 계승한 이이(李珥)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를 중심으로 재편되게 된다. 또한 이 학파는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서인(西人)으로 자리 잡아 사림이 중심이 되는 붕당정치를 이끌었다. 도덕성을 중심으로 한 사림 주도의 정치를 바랬던 이황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종은 이황을 계속 중앙정계로 복귀시키려 하였지만, 한번 마음을 굳힌 이황은 좀처럼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자신을 꼭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때에만 몇 차례 나아갔을 뿐이었다. 명종은 퇴계가 있는 도산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뒤 병풍으로 만들어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랬다.

명종이 승하한 후 왕위에 오른 선조 또한 이황을 깊게 사모하여 수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이황은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1568년(선조 1) 8월 「무진육조소」를 올려 ‘계통을 중히 하여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막아서 양궁을 친하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독실히 하시어 정치의 근본으로 삼을 것’, ‘도덕과 학술을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할 것’, ‘심복(心腹)에게 맡기셔서 이목(耳目)을 통하게 할 것’, ‘성심으로 몸을 닦고 살펴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할 것’을 간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성군이 되기 위한 학문의 원리를 열 가지 도설로 정리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 새로운 임금에게 거는 기대를 드러냈다. 선조는 이를 병풍으로 만들게 하며 고마움을 드러냈고, 이후 이 도설은 수차례 경연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후 이황은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을 계속하다 1570년(선조 3) 12월 지병이 악화되자 주변을 정리한 후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이황이 병환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황의 죽음이 전해지자 애도하는 뜻으로 3일 동안 정사를 폐할 것을 명하였으며, 영의정의 예에 따라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1572년에 이황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으며, 그 2년 뒤에는 지방 유림의 공의로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이황이 강학활동을 하던 도산서당에 전교당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다. 이 서원은 1575년(선조 8)에 한호(韓濩)가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편액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영남유학의 총본산으로 인정받았다.

퇴계 이황은 혼란한 정치 상황을 목도하고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여 조선 성리학의 새 장을 열었으며, 그의 인품과 행보 역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또한 이황은 강학 활동을 통해 많은 문인들을 길러내어 이들은 중앙 정계의 한 축으로 성장하였다. 후대에 이르면 퇴계 이황에서 이어지는 문인들은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기풍을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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