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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林慶業]

대명의리를 몸소 실천하다

1594년(선조 27) ~ 1646년(인조 24)

임경업 대표 이미지

임경업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조선 후기의 장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지켜냈으며, 청의 요구에 따라 명을 공격할 때 몰래 명나라를 도왔다. 이후 명으로 건너가 청과 싸우다가 조선에 돌아와 역모에 동참했다는 모함을 받고 처형되었다.

2 병자호란 때까지의 이력

임경업은 1594년(선조 27년)에 충주 달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이다. 그의 7대조는 서북면 도순문사를 지낸 임정(林整)이지만, 그의 대에는 거의 이름이 나지 않을 정도로 한미한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도중이었으며, 그의 삶은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 명청교체(明淸交替) 등 굵직굵직한 풍파를 헤쳐나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모아 군대놀이를 하였고, 젊어서는 궁마(弓馬)를 업으로 삼았으며, 병서를 비롯하여 글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1618년(광해군 10년) 동생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원래 무과에 합격한 자는 관직을 받기 전에 부방(赴防)이라는 명목으로 일정 기간 변경에서 근무를 해야 했고, 임경업 역시 함경도 갑산에서 복무하였다. 1620년(광해군 12년)에는 삼수 소농보(小農堡)의 권관(權官)에 부임하여 정식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이때 군량과 군기를 충실히 마련한 것이 평가되어 품계가 절충장군에 이르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는 첨지중추부사로서 반정공신 김류(金瑬)의 막하에 있었는데,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李适-亂)이 일어나자 출진을 자원하여 정충신(鄭忠信) 밑으로 들어가 전공을 세워서 진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품계도 가선대부로 올랐다. 이듬해에는 방답첨사로 임명되었고, 1626년(인조 4년)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임경업은 낙안군수로 재임할 당시 청렴하고 성심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여 인조[조선](仁祖)로부터 표리(表裏) 1습을 하사받기도 했다.

1627년(인조 5년)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 휘하의 좌영장(左營將)으로서 후금군과 싸우기 위해 북상했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강화가 체결되어 전투를 치르지 않고 임지인 낙안군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왕감군 접반사(王監軍 接伴使)를 거쳐 체찰부의 별장이 되었고, 1629년(인조 7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어 체찰부의 별장을 겸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평양중군(平壤中軍)이 되었다.

1631년(인조 9년) 평안도 선천에 있는 검산산성 방어사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임경업은 서북 변경을 지키면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정묘호란을 겪은 후 청천강 이북은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후금군 및 가도(椵島)에 주둔한 모문룡 휘하의 명군의 약탈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경업은 정묘호란 이후 퇴락해 있던 용골산성(龍骨山城), 운암산성, 능한산성(凌漢山城) 등을 수축하여 청천강 이북의 방어를 강화하였고, 곧 정주목사로 승진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현실적으로 뒷받침하기 어려운 청천강 이북의 방어를 포기하고 청천강 이남의 안주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재편하자는 청북 포기론이 대두되었다. 이는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유사시 수도권을 방어하여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는 전략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청천강 이북의 백성들을 적의 공세 앞에 무방비로 버려두는 것이었고, 따라서 주민들의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임경업은 이러한 반발을 조장했다고 하여 탄핵받아 의금부에 갇혔으나, 곧 풀려났다.

1632년(인조 10년) 부친상을 당했으나, 조정에서는 이듬해 1월에 그를 기복(起復)시켜 청북방어사에 임명하였다. 여기에는 김류가 임경업을 높이 평가한 것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또한 임경업이 오랫동안 청북에 있으면서 명성과 성적이 현저한 것이 발탁 배경이었다.

임경업은 청북 방어사로서 의주의 백마산성에 머물면서 성을 수축하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그 해 4월에는 명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수 공유덕, 경중명이 후금으로 달아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의주부윤 윤진경과 함께 명군과 연락하여 작전을 폈으나 두 장수를 사로잡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공을 명나라에서 인정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임경업이 올린 장계에는 명군과 조선군이 협력하여 두 장수를 포위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명군을 지휘한 도독 주문욱은 임경업의 공을 크게 칭찬하여 조선 조정에 포상하도록 했다.

이후 부친상을 마치기 위해 고향에 돌아갔고, 그 사이 정봉수(鄭鳳壽)가 청북방어사를 대신하였다. 상을 마친 1634년(인조 12년) 임경업은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고, 다시 후금과 통하는 문호를 지키는 의주진 병마절제사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거지인 백마산성을 지키기에는 군사가 너무나 모자랐고, 청북 전체를 수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형편이었다. 임경업의 증언에 따르면 백마산성을 지키는 데만 해도 4835명이 필요한데, 의주에 거주하는 백성이 남녀노소 6백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1300명의 군사를 그대로 머물게 하였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재정의 부족도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에 임경업은 조정의 지원을 받아 상인들과 무역을 하고 둔전을 설치하여 재정을 확충하고자 했다. 1635년(인조 13년)에는 박로가 사신으로 후금에 들어갈 때 상인들을 몰래 보내어 무역하려던 시도가 발각되어 파직되기도 했으나, 당시 도원수였던 김자점(金自點)이 상소하여 그의 죄를 용서할 것을 청하여 다시 의주부윤으로 복직되었다. 이후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의주의 수비를 더욱 강화하였다.

결과적으로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청군은 임경업이 굳게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임경업은 청군이 침공해 온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수비를 굳게 하는 등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포위되고 각지의 근왕병이 청군에 패배함으로써, 조선은 청군에 패하고 말았다.

3 명과 청 사이에서 : 대명의리를 위한 선택

병자호란이 조선의 패배로 끝나자, 지금까지 명과 협력하여 청과 싸웠던 임경업은 도리어 청에 의해 기용되어 명을 치는 전쟁에 동원되었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받고 귀국하는 길에 눈엣가시였던 가도의 공략을 지시하였고, 조선에서는 유림(柳琳)과 임경업이 이를 돕기 위해 발탁되었는데, 이는 이후 임경업이 계속해서 청의 부름을 받는 단초가 되었다.

임경업이 서북 지역을 방어하면서 또 하나 문제가 된 것이 명과의 관계였다. 비록 병자호란으로 명과의 공식적인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명에서는 조선과 연합하여 청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명에서 온 배들이 평안도 해안에 출몰하면서 조선과 접촉하려는 것은 청의 경계를 불렀고, 임경업은 이에 대한 대처에 고심해야 했다. 임경업의 보고에 따르면 이 때문에 난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문서를 받고 이들을 접대해야 할지 조정의 훈령을 청하고 있었다.

난처한 상황에서 임경업의 입장은 명에 대한 의리를 최대한 지킨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청에 끌려가는 삼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인 홍익한(洪翼漢)을 전송하는 자리에서 그의 의기를 높이 칭송하며 대명의리에 공감을 표하였다.

임경업은 명과의 관계를 잘 미봉하고, 청의 요청에는 가능한 한 소극적으로 응하는 태도를 취했다. 1638년(인조 16년)에는 명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봉황성까지 갔으나 기일에 늦었다는 이유로 입국을 거절당하고 되돌아왔다. 1640년에는 청에서 명의 군사적 근거지인 금주(錦州)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 수군을 동원하였는데, 임경업은 이때 이완(李浣)과 함께 전선 120척과 군사 5천을 이끌고 안주를 출발해 금주로 향하였다. 하지만 전진을 늦추고, 명나라 배와 만나 교전을 회피하며, 배가 표류했다고 속여 대오에서 탈락시키는 등 태업했다. 7월에는 청의 지시에 따라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청군을 따라 전장으로 갔으며, 나머지 부대는 모두 귀국시켰다. 그러나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에 가 있던 김신국(金藎國)의 보고에 따르면 청에서는 임경업의 태업에 대해 분통을 터뜨릴 지경이었고, 소현세자는 변명에 전념해야 했다.

임경업은 명과의 싸움에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명과 몰래 연락을 취하는 일을 현장에서 담당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崔鳴吉)은 주화론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이 청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명에 알려 양해를 구하고자 하였다. 마침 1638년(인조 16년) 금주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장수 홍승주의 막하에 있었던 조선 출신 승려 독보(獨步)가 압록강에서 조선 군사에게 붙잡혀 임경업에 의해 최명길에게 보내졌다. 최명길은 그를 사신으로 쓰기로 결심하고, 이명한(李明漢)·구굉(具宏)·신경진(申景禛)·강석기(姜碩期) 등과 협의하여 명나라 황제 및 홍승주에게 보내는 글을 써서 독보를 통해 명에 전달하였다. 이후에도 독보는 수차례 조선과 명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임경업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명길과 임경업이 함께 이를 모의, 실행했음은 실록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1640년에 수군을 이끌고 출전하였을 때 배 한 척을 표류했다고 속여 명으로 보내, 금주를 지키고 있는 명나라 장수 홍승주에게 연락하여 조선군이 출정한 것은 본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조정에서도 임경업이 명에 사람을 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소식을 알렸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임경업의 일생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안겨 주었다. 청은 이전부터 임경업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642년 청군이 금주 전투에서 승리하여 명의 장수 홍승주를 사로잡자, 그를 통해 조선에서 독보를 보내어 명과 연락을 취하고 있던 사실이 청에 탄로나 버리고 말았다. 이에 청은 선천부사로서 이 일에 관여했던 이계(李烓)를 잡아 사정을 캐물었고, 이계는 살아남기 위해 조정 대신들 및 임경업이 명과의 연락을 주도했다고 털어놓았다. 청에서는 임경업을 체포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결국 조정에서는 형조판서 원두표(元斗杓)에게 명령하여 그를 심양으로 압송하였다.

궁지에 몰린 임경업은 그 해 11월 6일 황해도 금교역에서 탈출하였다. 그는 붙잡히기 전에 심기원(沈器遠)과 만나 도피자금으로 쓸 은 700냥 및 변장용 승복, 머리 깎는 칼을 받아두었다가 기회를 틈타 탈출한 것이다. 그가 탈출하자 조정에서는 임경업의 행동이 독단적이었음을 강조하면서 그의 가족들을 잡아 심양에 보내고, 그의 소재를 찾는 대로 잡아서 보내겠다며 변명하는 보고를 청에 올렸다.

임경업은 탈출한 후 추적을 피해 머리를 깎고 양구의 조그만 절에 숨어 있다가 영동과 관서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다 1643년(인조 21년) 5월 26일 자신의 첩인 매환(梅環)의 동생 무금(無金)의 도움을 받아 마포에서 배를 타고 황해로 나갔고, 그 해 가을 산동성 제남부(濟南府) 해풍도(海豊島)에 도착하였다. 명으로 망명해 추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 그의 처 이씨는 그 해 9월 심양의 감옥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4 비참한 최후와 민중영웅으로의 재탄생

임경업의 망명 생활은 길지 않았다. 1644년, 명은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에 산해관을 지키던 명의 장군 오삼계는 청에 항복하여 청군을 만리장성 안으로 들여보냈고, 청군은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군을 몰아내고 북경에 진주하여 중국 정복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임경업의 망명처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임경업은 명에서 명군 장수들과 힘을 합쳐 청과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나, 명의 멸망으로 갈 곳이 없게 되었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그의 탈출을 지원했던 심기원이 역모를 일으켰다가 처형되는 사태가 일어나 조선에 돌아가는 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청에서는 임경업에게 초유문을 보내어 귀순을 종용하고 있었다. 청은 애초에 임경업이 청에 들어왔다면 최명길보다도 먼저 풀어줄 생각이었다고 한다.

임경업은 남경(南京)에서 명의 정통을 자처하는 남명 정권에 의탁하고자 했지만, 이곳 역시 청군에 금세 함락되고 말았다. 결국 갈 곳이 없어진 임경업은 1645년 청군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대사령을 내렸기 때문에, 임경업 역시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청에서 조선에 대한 통역을 맡으며 갖은 행패를 부리던 정명수(鄭命壽)가 역관 이형장(李馨長)과 함께 당시 사신으로 와 있던 김자점에게 임경업이 조선의 역적이니 조선에서 처벌해야 한다고 청하라고 일러주었고, 그 결과 청에서는 임경업을 조선에 보내주었다. 정명수는 임경업이 살아나 다시 뜻을 얻게 되면 자신에게 해가 될 것으로 판단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그를 조선에 보냈다 한다.

조선에 연행된 임경업은 심기원의 역모와 관련되어 엄한 추궁을 받았다. 그가 탈출할 때 심기원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심기원의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심기원이 임경업을 명에 보내 명군을 초청하려 했다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임경업은 형장을 맞으면서도 그가 심기원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역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극력 부인하였다. 그러나 김자점, 원두표, 민형남 등 국문에 참여한 신하들 대부분이 그가 역모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판단하여 그에게 형벌을 내릴 것을 주장하였다. 원래 임경업은 김자점의 막하에 있었고, 김자점의 계집종 매환(梅環)을 첩으로 삼을 만큼 친밀한 관계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명으로 떠나면서 김자점 혹은 그의 아들 김식에게 자신의 탈출 사실을 알리라고 한 것이 화근이 되어, 김자점은 임경업의 처형을 주장하게 되었다. 임경업의 말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지면 자신도 심기원의 역모에 가담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인조는 그가 역모에 연관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의 죄명을 벗겨 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임경업은 형리(刑吏)의 모진 매를 이기지 못하고 1646년(인조 24년) 6월 17일에 형장에서 죽고 말았다. 향년 53세였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외쳤으며, 그가 죽자 백성들이 소식을 듣고 불쌍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고향인 충주 달천에 안장되었다. 그는 1697년(숙종 23년) 숙종[조선](肅宗)에 의해 복관되었으며, 그의 처에게도 정표(旌表)가 더해졌다. 또한 1706년(숙종 32년)에는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임경업의 손자 임중번이 그의 원통함을 호소하자 숙종은 그가 역모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인조도 알고 있었으며 그의 행위가 대명의리에 입각한 것이었다는 이유로 그의 신원과 복관을 결정하였다.

임경업은 여러 면에서 강홍립(姜弘立)과 대조되는 무장이다. 강홍립은 성리학에 충실해야 할 문관 출신으로서, 광해군(光海君)의 명령에 따라 후금을 치는 원정군을 이끌었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후금에 항복하였고, 이로 인해 대명의리에 입각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반면 임경업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무장임에도 불구하고 대명의리에 충실하였고, 이는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 송시열(宋時烈), 황경원(黃景源), 성해응(成海應) 등 유수한 문인들이 그의 전기를 지어 그의 대명의리를 추앙하였고, 정조[조선](正祖)는 그에 대한 사실을 모아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를 간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들은 그를 대명의리의 상징으로 기념하고자 하였다.

임경업은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까지 영웅시되었다. 민중들에게는 그가 충의와 지조에 넘치는 용맹한 장수로 비춰졌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점은 그를 비운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에 대한 전설은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며 임경업설화(林慶業說話)로 발전하였으며, 그가 억울한 죽음을 맞지만 간신 김자점이 처형된 후 그의 충의를 왕이 포상한다는 내용의 고전소설 『임경업전(林慶業傳)』은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그를 신으로 모시는 무당들까지 나타났다. 그는 대명의리의 상징을 넘어, 조선을 지킨 용맹한 장수로서 민중들의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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