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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張承業]

조선왕조의 마지막 천재화가

1843년(헌종 9) ~ 1897년(고종 34)

장승업 대표 이미지

장승업 필 화조영모어해도

국립중앙박물관

1 배경과 생애

조선 말기 최대의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승업에 대한 많은 것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위암 장지연(張志淵)의 『일사유사(逸士遺事)』,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나온 단편적인 일화들, 그리고 그의 제자인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 등을 통해 후대의 김은호(金殷鎬), 김용준(金瑢俊) 등에게 전해진 일화 등으로 알려진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근본적으로 구한말의 혼란, 장승업 자신이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는 점, 예술인에 대한 대우가 박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대한매일신보』에 장지연의 『일사유사』가 실려있으며 이것이 장승업에 대한 얼마 안 되는 단편적인 자료들 중 하나이다

그와 유사하게 자유분방한 성격의 화가로 알려진 최북의 경우에도 단편적인 일화들만이 남아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화가와 같은 예술가 계열의 인물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리 높지 않고 이들의 생활 방식 자체가 워낙 자유분방하고 스스로 글들을 많이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국 이들에 대한 파악은 어디까지나 남들의 입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진 내용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단지 그의 출생년도와 본관은 어느 정도 추적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반인 대원 장씨 집안 출신으로 1843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 ‘대원’이라는 지명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안악군 조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현재로서는 황해도가 장승업의 출생지로 유력시되고 있다.

대원 장씨가 상당히 희성이지만 조선 시대에 나름 여러 과거 합격자들을 배출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명종 7년 식년시에 진사로 급제한 장예근, 그의 아들 장문한과 장운한, 손자 장문유 그리고 인조 8년 식년시에 진사가 장홍책 등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모두 사마방목에서 개성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장승업 본인은 고아였고 그의 선조 때에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아로서 떠돌아다니던 장승업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그림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도 여러 설들이 존재하는 듯 하다. 혹자는 한약국에서 일했다고 하고 혹자는 야주개(夜珠峴)에서 민화를 그리던 환장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래도 가장 유력해보이는 것은 고아로서 떠돌아다니다가 수표교에 살던 역관 이응헌의 집에 의탁하여 살면서 어느 순간 그림의 재능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일사유사』의 이야기이다. 이응헌의 집에는 원·명대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다수 소장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서 이를 감상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를 곁눈질하면서 구경하던 장승업이 갑작스럽게 그림 재능에 눈을 떠서 전생에 화가였던 듯이 붓을 자유자재로 놀리는데 그림이 저절로 높은 경지여서 이에 감탄한 이응헌이 그를 후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도시 문화가 발달하고 고동서화의 감상 취미가 널리 확산된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이야기이다. 과거 그림 감상을 잡기 정도로 취급했던 양반들도 청 고증학의 영향과 도시 생활의 여유로움 등으로 인해 점차 예술 감상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그림을 품평하고 감상하는 일정한 감식안이 발달하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 광통교 일대에는 일정한 수준의 서화 시장이 존재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장승업과 유사한 행태를 보인 괴짜 화가 최북만 해도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는 기록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어느 정도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집단이 존재할 수 있을 정도로 서화에 대한 당시인들의 관심이 제법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이응헌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림에 대한 관심은 양반 사대부층을 넘어서 중인층들에게도 확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소위 ‘손노인’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정도 재산을 갖춘 인물들은 양반들의 고동서화 취미를 흉내내고 그들의 문화적 감성을 흉내내고자 했다. 어떻게 보면 상위 계층의 문화를 흉내냄으로써 그들과 동화되거나 혹은 신분적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했던 조선 후기 중인층의 서러움이 일정정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응헌 또한 이러한 문화적 감식안을 가지고자 노력했던 중인계층의 일원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위의 손노인보다는 급이 매우 높은 인물이어서, 『조선시대잡과합격자총람』에 의하면 본관은 금산(金山)이며, 원래는 계사(計士)였으나 18세 때 역과 시험에 합격하여 한학 역관이 되었고 벼슬은 나중에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여기에 그는 추사 김정희로부터 〈세한도〉를 그려 받은 서화금석 수장가 이상적(李尙迪)의 사위였다. 이상적은 김정희의 〈세한도〉를 청나라로 가져가서 발문을 받아오고, 조선 말기 청나라와의 서화, 금석문 교류에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응헌이 오른 벼슬의 품계나 그의 인맥 등을 고려해보아도 그는 어설프게 양반가의 문화적 감식안을 흉내내는 수준의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승정원일기』에 수록된 역관 이응헌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고종 원년에는 당하역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당상 역관이었던 이상적, 유재관과 더불어 청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역관으로 선발되어 의주에서 대기할 것을 지시받게 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행 경험을 통해 문화적 안목을 키우고 장승업의 초기 예술 세계에 영향을 줄 청의 그림들을 소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상적의 제자 김석준(金奭準)은 이응헌에 대해서 ‘일을 주관하는 재주가 뛰어나다’고 높이 칭송했는데, 이응헌이 감식안 뿐만 아니라 비슷한 문화적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하는 능력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의 후원은 장승업에게 있어서 화가로 출발하는데 상당히 유리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승업의 초기 스승으로는 혜산 유숙(柳淑)이 있다. 유숙은 이한철(李漢喆), 백은배(白殷培) 등과 더불어서 19세기의 대표적인 화원으로서 장승업보다 16살 연상이다. 유숙 또한 일찍부터 이응헌, 김석준 등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수계도권(修契圖卷)〉을 보면 장지완(張之琬), 현기(玄錡) 등 유명한 시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같은 그룹에서 어울리면서 장승업을 접하고 그의 초기 화풍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실제로도 그의 산수화나 화조화 가운데 일부는 장승업의 초기 화풍과 유사한 면이 지적된다.

이들 외에 장승업의 초기 인생에 큰 도움이 된 인물로서 한성판윤(判尹)을 지낸 변원규(卞元圭)가 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장승업은 초년에는 변원규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다고 하는데 이 변원규는 역관으로서 청나라와의 외교업무에 깊이 관여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고 중인으로서는 드물게 한성판윤까지 지낸 인물이다.

장승업의 그림의 추이로 보았을 때 그의 재능이 만개한 것은 40대 이후인 듯 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단지 과거의 그림들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사물들을 열심히 모사하는 경우도 종종 보였다고 한다.

장승업은 40세 되던 해, 즉 1882년 이후 오경연의 집을 드나들게 되던 시점부터 중국화를 많이 보게 되고, 이때부터 그림에서 일정한 방향의 변화가 나타났다고 한다. 오경연은 조선 말기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서화가였던 조선 말기 유명한 정치가이자 서화가였던 오경석의 네 번째 동생으로 오세창의 숙부이기도 하다. 오경연 역시 그림을 좋아하여 전기(田琦)에게 선수화를 배우기도 하였고, 집안에 제법 많은 산수화를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승업은 그와의 교유를 통해 그의 집안에 수장된 그림들에서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후 그의 독창적인 그림 세계를 정립해가는 과정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장승업이 궁중에 여러 번 초빙되었다가 매번 달아나서 고종의 노여움까지 샀다는 이야기는 장승업과 관련하여 비교적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며 그의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노여움을 사서 처벌받을 뻔하지만 민영환(閔泳煥)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장지연이 남긴 일화에 의하면 장승업은 술을 몹시 좋아하여 그림 도구를 구한다고 하고 달아나기도 하고 금졸의 의복을 훔쳐 입고 달아나기도 하는 등 기행을 일삼은 듯 하다. 술을 좋아하고 구속을 싫어했던 장승업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이에 민영환은 장승업을 궁중에 두는 대신 자기 집에 초빙하여 적당히 술을 대접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여 처음에는 장승업도 제법 성실하게 임했지만 결국 얼마 안 있어 또다시 술집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장승업은 통제불능의 기인의 이미지이지만 그래도 현재 화원으로서 그린 그림들이 몇 점 남아있어 그가 궁중에서 요구한 그림을 몇 점은 그려서 바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민영환과 장승업은 상당히 호의적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며 전반적으로 여흥 민씨들과 두루 친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흥 민씨 집안의 여러 인물들에게 그려준 것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여러 점 남아있다.

장승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괴했던 인물이었다. 술을 워낙 좋아했고 그림을 꼭 완성시킨다는 의무감도 없었고, 여색을 좋아하면서도 결혼은 견디지 못하여 나이 40여 세에 부인을 얻었으나 하룻밤 자고 버린 다음 종신토록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으로 장승업이 오다가다 자유롭게 들리는 소실 비슷한 존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조석진과 안중식이 동대문 밖 조그만 집에 거주하던 장승업의 부인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장승업이 부인과의 일반적인 결혼생활을 견디지는 못했던 것 같고 대체로 불규칙하고 자유분방하며 난잡한 삶을 누렸던 것 같다.

말년의 행방은 명확하지 않다. 『일사유사』에 의하면 1897년에 죽었다고 되어있으나 그 명확한 죽음의 시기는 사실 분명하지 않으며, 죽음의 상황 또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장승업은 평소 사람의 생사란 뜬 구름 같은 것이어서 죽는다고 떠들 필요가 무엇이냐고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의 가치관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후대의 영향

장승업의 제자로는 안중식과 조석진이 있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장승업으로부터 정식으로 사사를 받았다기보다는 이들이 개인적으로 흠모하면서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화론과 조언을 듣는 방식으로 장승업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이들이 장승업을 흠모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그들의 제자들 역시 자연히 그 영향을 받고 그에 관한 신화적 일화들이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의 그림을 흠모하는 재력가들에게 술과 거처를 제공받고 그림을 그려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적에는 여전히 불분명한 점이 많이 남아있지만 그것이 그를 더욱 신비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있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1911년 서화미술원(書畵美術會)에서, 나중에는 민족 미술가들이 설립한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 많은 후진들을 양성한다. 이도영(李道榮), 이상범(李象範), 허백련(許百鍊), 김은호(金殷鎬), 노수현(盧壽鉉), 박승무(朴勝武) 등 현대 전통 화단의 대가들은 거의 대부분 이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장승업과 그의 제자 안중식, 조석진은 이후 고종 시대를 대표하는 3명의 화가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중 안중식, 조석진은 여러 제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위에 열거한 인물들 외에도 이한복(李漢福), 조명선, 최우석(崔禹錫) 등이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 장승업으로부터 이어진 근대의 전통화법이 안중식과 조석진을 거쳐 여러 화가들에게 확산되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23년에 그의 그림이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등의 그림과 같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장승업이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32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승업의 그림 중 한폭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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