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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蔣英實]

물시계, 해시계, 우량계

미상

장영실 대표 이미지

장영실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출신 배경

장영실(蔣英實, 생몰년 미상)은 조선 초기의 과학기술자로, 본관은 아산(牙山)이다. 성종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아산의 성씨(姓氏) 중에 ‘장씨(蔣氏)’가 실려 있으며, 『아산장씨세보(牙山蔣氏世譜)』에는 장영실이 아산 장씨의 시조 장서(蔣壻)의 9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고, 어머니는 기녀였다. 그런데 장영실의 아버지가 언제 귀화했는가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아산장씨세보』의 기록 사이에 차이가 나타난다. 먼저 『세종실록』에는 장영실의 아버지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지역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출생한 후 조선으로 귀화했다는 것이다.

반면, 『아산장씨세보』에서는 장영실의 9대조인 장서가 고려에 귀화하여 아산 장씨의 시조가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장서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으며, 금(金)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을 때 송나라 조정이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의 분열로 어지러워지자 중국을 떠나 고려로 이주하여 아산에 정착했다고 한다. 또, 장영실의 부친 장성휘(蔣成暉)는 전서(典書)를 역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장영실의 선대(先代)가 중국에서 귀화했다는 것은 모두 인정하는 바이지만, 귀화시기에 대해서는 실록과 『아산장씨세보』 사이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장영실의 가계에 관한 더 이상의 자료가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 정확하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장영실이 어린 시절에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1421년(세종 3) 세종이 장영실을 불러 선기옥형(璇璣玉衡) 제도를 연구하게 했을 당시 장영실의 신분을 ‘동래(東萊)의 관노(官奴)’를 기록한 것을 볼 때, 그의 본래 신분이 관노, 즉 천인(賤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경위로 관노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기녀였기 때문에 장영실도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천인이 됐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2 뛰어난 기술로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다

동래현의 관노로 있던 장영실은 뛰어난 기술 재능을 인정받아 조정에 발탁되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장영실의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셨고 나 역시 그를 아낀다고 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장영실이 처음 발탁된 것은 태종대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장영실의 재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어 조선의의 과학기술 문화를 꽃피웠던 시기는 세종대였다.

문헌 기록에서 장영실의 활동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21년(세종 3)으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장영실은 남양부사(南陽府使) 윤사웅(尹士雄), 부평부사(富平府使)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세종 앞에서 선기옥형 제도를 연구·토론했는데, 세종은 이들의 연구 결과에 크게 만족하였다. 이어 세종은 이들 세 사람은 명나라에 각종 천문 기계에 관한 내용을 배우고 오도록 하였다. 또, 세종은 장영실 등이 명나라에 갔을 때 『조력학산(造曆學算)』을 비롯한 각종 천문 서책을 구입하고 흠경각(欽敬閣)과 보루각(報漏閣)의 혼천의(渾天儀) 도식(圖式) 견본을 가져올 수 있도록 명나라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미리 보내 요청할 것을 지시하였다.

장영실 등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1422년(세종 4)으로, 이들은 세종의 바람대로 각종 천문 관련 서적들을 구입했으며, 흠경각과 보루각의 제도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이에 세종은 ‘양각혼의성상도감(兩閣渾儀成象都監)’을 설치하여 흠경각과 보루각, 혼천의 등을 제작하는 작업을 추진했는데, 장영실·윤사웅 등에게 이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1422~1423년경에 장영실을 면천(免賤 : 천인 신분에서 벗어남)하여 상의원(尙衣院)의 별좌(別坐)에 임명하려는 뜻을 가지고, 이를 이조판서 허조(許稠)와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등과 함께 의논하였다. 이에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반대하였고, 반면 조말생은 장영실 같은 이는 상의원에 두는 것이 적합하다며 찬성 입장을 보였다. 이처럼 당시 조정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자 세종은 자신의 뜻을 일단 철회하였다. 하지만 세종이 장영실을 관직에 임용하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으며, 이후 유정현(柳廷顯) 등과 논의를 통해 장영실을 상의원별좌에 임명했다.

장영실이 상의원별좌에 임명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1425년(세종 7) 4월의 실록 기사에 장영실의 관직이 사직(司直)으로 기록된 것을 볼 때, 상의원별좌 임명은 1425년 이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실록 기사는 『연려실기술』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1425년(세종 7) 10월에 양각(兩閣), 즉 흠경각과 보루각이 준공되자 세종은 두 곳을 돌아본 후 장영실의 공을 크게 치하하면서 그를 면천(免賤)시키고 실첨지(實僉知)을 제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장영실의 면천과 관직 제수가 1425년 10월 이후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장영실이 1425년 4월에 이미 사직으로 재직했던 것으로 기록한 『세종실록』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연려실기술』이 후대의 저술임을 고려할 때, 『연려실기술』의 내용에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후 장영실은 각종 과학 기계 제작에 많은 공헌을 하면서 관직도 점차 올라갔다. 1433년에는 자격궁루(自擊宮漏)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오위(五衛)의 정4품 군직(軍職)인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

이어 1438년(세종 20) 흠경각에 설치할 천문 관측 기계의 제작이 끝나 흠경각 제도가 완성되자 종3품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차하였다.

이로써 동래현의 관노였던 장영실은 자신의 탁월한 재능 하나로 천인 신분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종3품의 직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장영실은 전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442년 3월, 장영실이 감독하여 제작한 국왕의 가마가 부러지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고로 장영실은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을 받았다.

의금부에서는 장영실이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형률에 따라 장(杖) 100대를 쳐야 한다고 세종에게 보고했고, 이에 세종은 장영실의 그간의 공로를 고려하여 2등을 감형(減刑)하도록 지시하였다.

결국 장영실은 장 80대의 형을 받고 파직되었고, 이후로 장영실의 모습은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3 세종대 과학 기술 문화를 꽃피우다

장영실은 이천(李蕆)·이순지(李純之)·김담(金淡) 등과 더불어 세종대의 과학 기술 발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핵심 인물이었다.

세종대 과학 기술 분야에서 장영실이 세운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천문 관측 기계와 시계를 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각종 기계의 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1432년(세종 14)부터이다. 이 해에 세종은 예문관 대제학 정초(鄭招)와 제학 정인지(鄭麟趾)에게 천문 관측 기계에 관한 제도들을 연구하여 간의(簡儀)를 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정인지·정초 등은 문헌에서 관련 제도를 찾아 연구하는 일을 맡고 장영실과 이천은 기술자 감독의 일을 맡아 우선 목간의(木簡儀)를 제작했고, 이를 이용해서 북극의 고도를 측정하여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이에 장영실 등은 구리를 이용한 기계 제작에 착수하여 1438년(세종 20)에 모든 제작을 완료하였다.

장영실 등이 제작한 천문 관측 기계와 시계는 ① 대소간의(大小簡儀), ② 혼의혼상(渾儀渾象), ③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의 해시계류, ④ 일정성시의(日星定時儀), ⑤ 자격루(自擊漏) 등 모두 다섯 종류이다.

간의의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종실록』의 1433년(세종 15) 7월 21일 실록 기사에 세종이 간의(簡儀) 제작을 명하여 경회루 북쪽 담 안에 대(臺)를 쌓고 간의를 설치하게 했다는 내용이 있고, 같은 해 윤8월 26일 기사에 경회루(慶會樓)에서 잔치를 베풀어 간의 제조(簡儀提調) 정초·이천·정인지 등을 위로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433년 7~8월경에 간의가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혼의혼상에서 혼의(渾儀)는 혼천의(渾天儀)이고, 혼상(渾象)의 지금의 지구의(地球儀)와 같은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혼천의를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는 기사가 1433년 6월 9일과 8월 11일에 두 차례 등장하고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혹 6월에 제작하여 올린 후 발견된 미비점을 보완하여 8월에 다시 올린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각종 일구[해시계]들의 경우, 1434년 10월 청계천의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 앙부일구를 처음 설치하여 시간을 측정했다는 기사가 있고, 1438년 1월의 기사에는 4종류의 일구가 모두 완성됐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434년부터 1437년 사이에 차례로 제작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일성정시의는 1437년 4월에 완성되었다. 이 기계는 모두 4벌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내정(內庭)에 두었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서 관측에 사용했으며, 나머지 둘은 함길도와 평안도의 절제사(節制使) 군영에 하나씩 설치하여 군중 경비에 사용하도록 했다.

물시계인 자격루는 1434년 7월부터 이를 보루각에 설치하고 공식적으로 사용했다는 기사에 비추어 볼 때, 1434년 6월 이전에는 제작이 완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기계들이 모두 완성되자 세종은 경복궁 안에 건설한 흠경각에 이 기계들을 설치하고 사용하도록 했는데, 흠경각 역시 장영실이 건설한 것이었다.

이로써 천문 관측과 시간 측정을 위한 기계와 건물들이 모두 완성됐으며, 이 모든 것이 장영실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한편, 장영실 천문 기계 제작 외에도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또, 그는 1432년(세종 14) 1월에는 평안도 벽동(碧潼)에서 푸른 옥[靑玉]을 채굴하는 일을 주관했고, 1438년 9월에는 경상도 채방별감[채방사](採訪別監(採訪使))이 되어 창원(昌原)·울산(蔚山)·영해(寧海)·청송(靑松)·의성(義城)·안강(安康) 등지에서 동철(銅鐵)과 연철(鉛鐵) 생산을 감독하는 등 광물 개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장영실은 세종대 과학 기술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핵심 인물이었다. 서거정(徐居正)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세종대의 여러 장인(匠人)들 중에서 오직 장영실만이 세종의 지혜를 받들어 기묘한 솜씨를 발휘했고, 그 결과가 모두 세종의 뜻에 부합했으므로 세종이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고 하였다. 이어 서거정은 장영실을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는데, 앞서 검토한 장영실의 업적에 비추어 볼 때 서거정의 평가는 과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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