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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張禧嬪]

일장춘몽 권세를 누리다

1659년(효종 10) ~ 1701년(숙종 27)

장희빈 대표 이미지

창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환국의 정쟁 속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삶

숙종[조선](肅宗)은 기존의 붕당 연합의 구도가 점차 폐단을 드러내며 대립과 갈등의 골이 심해지자,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붕당을 자주 교체함으로써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하는 정국 운영 즉 ‘환국’의 방식을 취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정치적 부침이 심한 붕당은 서인과 남인이었다. 장희빈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남인의 정치적 행보와 운명을 함께 했으며, 남인과 서인 대립의 기폭제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딸로 궁중 나인으로 들어와 숙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왕자를 낳은 이후 왕비의 지위에 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명예는 남인의 득세에서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역으로 남인의 몰락은 그녀의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장희빈은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약을 먹고 죽음에 이르렀다. 그녀의 몰락은 이후 남인의 정치적 패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이후 그녀의 아들인 경종[조선](景宗)과 노론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영조(英祖)의 갈등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2 숙종대 환국과 서인∙남인의 정치적 부침

장희빈이 생존한 시기는 숙종 초반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극대화되었던 시기이며, 장희빈은 그 속에서 남인과 서인 대립의 기폭제가 된 동시에 남인의 몰락을 가져왔던 인물이다. 15년간 집권한 현종의 뒤를 이어 14세에 왕위에 오른 숙종은 45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換局)’이라 하였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680년(숙종 6)에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발생하였는데, 남인 영수 허적(許積)이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한 일을 계기로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였다. 이 사이에 서인은 자체 분열을 일으켜 송시열(宋時烈)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졌다. 1689년(숙종 15)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은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층으로 재등장하고, 5년 뒤 장희빈이 사형을 당하면서 남인은 몰락하고 이후에 이전처럼 재기가 어렵게 되었다.

3 역관의 딸로 태어나 숙종의 후궁이 되다.

장희빈(?~1701(숙종 27))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빈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조선시대 선산과 칠곡 사이의 작은 현에 불과했던 인동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왜적을 크게 무찔렀던 연유로 1604년(선조 37)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인동 장씨는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데, 장금용은 고려시대 대광보국 벽상공신 상장군으로 옥산부원군을 지냈기 때문에 본관을 옥산으로 쓰다가 조선말에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되면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장희빈의 부계는 아버지 장형(張炯), 조부인 장응인(張應仁), 증조부 장수(張壽)이다. 이들은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을 때, 각각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장희빈의 조부인 장응인은 역관으로서 중국어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 쓰고, 풍류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희빈의 종숙부인 장현(張炫) 역시 주목할 만한데, 1639년(인조 17) 역과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에 가서 6년을 머물며 여진족 사정을 파악했다. 귀국해서 당상관이 되어서는 역관의 우두머리로 40년간 30차례 북경을 다니며 국사를 도맡아 주선하였다. 장현은 이미 효종(孝宗) 초기부터 ‘나라 안의 부자’라고 불릴 만큼 재산을 모았고, 품계가 종일품 숭록대부까지 올라가기도 하였지만 종실, 남인계 인물과의 친분을 이유로 경신환국 때에는 역모에 연루되어 형벌을 받고 유배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희빈의 가계는 대대로 역관 가문으로서 재력도 좋았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유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씨는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다. 그녀가 남다른 자색으로 숙종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 것은 1680년(숙종 6)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사망한 이후부터였다. 둘의 관계를 눈치 챈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는 장씨와 숙종의 관계를 우려하며 궁 밖으로 쫒아냈다.

1681년(숙종 7) 인현왕후(仁顯王后)는 명성왕후에게 총애를 입은 궁녀를 여염집에 두는 것은 미안한 일이기 때문에 궁으로 불러들이도록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명성왕후는 그녀의 자질이 좋지 않은데, 주상이 꾐을 받게 된다면 때문에 국가의 화가 크게 미칠 수 있는 일이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명성왕후가 사망하자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다시 장씨의 일을 아뢰고,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 역시 왕에게 권장함으로써 장씨는 다시 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 무렵 항간에는 “궁인 장씨를 위한 별당을 세우려 하는데, 밖에 알려지지 않도록 밤에 몰래 재목을 나르게 한다.”거나, 때마침 일어난 수해에 대해 사람들은 예로부터 여인을 총애하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말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시기 부교리 이징명(李徵命)은 이러한 민심을 근거로 근래에 일어난 천재지변은 매우 놀랄 만한데, 『사기(史記)』에 의하면 외척의 집권으로 혹은 여인의 극성으로 연유하였다고 하니, 최근 들어 일어난 천재지변이나 국가의 화란 역시 이와 무관할 수 없다고 운을 떼었다. 이어서 궁인 장씨의 종숙부인 장현이 이전 경신환국에 연루된 인물이라는 점과, 국가의 화란은 여인에 대한 총애에서 말미암으니 장녀를 내쫒아서 정치를 원상태로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 상소를 읽은 숙종은 크게 분노하면서 이징명을 파직하였고, 이후에는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봉하는 등 장씨에 대한 대우는 더욱 융숭해졌다. 그런 가운데 1688년(숙종 14) 장씨가 왕자 균을 낳았다.

숙종은 왕자가 출생한 지 채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지금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서 명호를 정하려 하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바치고 물러가라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숙종의 뜻밖의 발언에 대해 신료들은 난색을 표하며, 다른 날 중궁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이어서 보란 듯이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 이러한 숙종의 처신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가 지극하여 국가의 화가 조석에 미칠 것이라 두려워하였다.

명호의 문제가 일단락되고 남인의 집권을 위한 일련의 움직임이 있을 무렵인 2월 1일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명호를 정한 것이 너무 성급한 조처였으니, 환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분노하며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성문 밖으로 내칠 것을 명하였다.

원자로서의 명호를 정하는 구체적인 문제에서 시작된 이 문제는 정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송시열의 처벌, 그것은 곧 서인에서 남인으로의 환국 즉 ‘기사환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1년에 걸쳐 전 현직 관료와 재야 유림을 막론하고 100명 이상의 서인이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물러난 자리는 남인이 주도하였고 이전의 경신환국에서 화를 당한 많은 남인들이 신원되었다. 그 결과 숙종 14년 12월에 열에 한두 명에 불과했던 정부요직에서 남인의 비중은 숙종 15년까지 8할이 넘게 되었다.

4 환국의 여파와 장희빈의 파란만장한 삶

남인이 기사환국으로 소생하여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남인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장희빈에게는 큰 기회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였다. 장희빈의 증조, 조부, 부친 모두 의정(議政)을 부여 받았으며, 장희빈의 부친인 장형에게는 1689년(숙종 15)에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의 칭호가 주어졌으며 급기야 1690년(숙종 16)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장씨는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되었다.

결국 장희빈은 환국의 과정에서 남인의 집권과 궤를 같이하여 희빈에서 왕비에 이르는 영예를 안았지만 그가 왕비로서 누릴 수 있는 시간은 3년에 그쳤다. 기사환국 이후 숙종은 극도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고,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에게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갑술환국’으로 드러났다.

기사환국이 일어 난지 5년 후인 1694년(숙종 20) 3월,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이 폐비의 복위를 도모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내용인 즉 노론이 남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서인의 재집권을 꾀해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한다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남인의 음모임이 밝혀졌고, 이후 남인의 숙빈최씨(淑嬪崔氏)에 대한 독살설까지 불거짐에 따라 숙종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갑자기 비망기를 내려 남인을 축출하고, 기사환국으로 몰락했던 서인을 다시 등용하는 갑술환국을 단행했다. 남인들은 기사환국 때보다 훨씬 많은 수가 처벌받았으며, 남인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여 두 번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장희빈이 남인의 정치적 흥망과 운명을 같이 했다면, 인현왕후는 서인과 그것을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서인의 재집권과 궤를 같이 하여 인현왕후가 복위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억울한 정상을 모두 이해하였고, 자신은 권간에게 조롱당하여 잘못 처분하였음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흉악한 자를 내치고 옛 신하를 다시 등용할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로서 인현왕후는 다시 복원되었고, 서인이 재집권을 함으로써 장희빈의 앞날은 불투명할 밖에 없었다. 이로써 장희재(張希載)를 중심으로 한 장씨 집안에서는 서인 타도를 위한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1696년(숙종 22)에는 장희빈 부친인 장형의 묘에서 흉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남인의 자작극이었음이 밝혀져서 문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이후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 저주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에 숙종은 희빈 장씨가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고자 신당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축(祈祝)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것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그 정상이 죄다 드러났으니, 종사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자진할 것을 명하였다.

이 일로 장희빈은 물론 장희재까지 사형을 당하였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희빈에서 왕비로 다시 희빈으로 급기야 사약을 먹고 자진하기까지 파란만장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서인과 남인의 대립,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숙종이 실시한 환국정치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장희빈은 바로 정치 문제의 핵이었고, 또한 갈등, 대립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었다.

5 남인의 몰락, 그리고 경종과 영조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혐의를 받은 장희빈은 사약을 먹고 사사(賜死)되었다. 이일의 여파로 장희빈 및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소론도 몰락하게 되고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며, 이후 남인의 재집권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장희빈의 몰락은 남인의 몰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또한 노론을 등에 업은 숙빈 최씨와의 갈등은 이후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후의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계열과 노론 측에 가까웠던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후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계열간의 갈등의 불씨를 남겨놓은 것으로, 후대 피비린내 나는 경종 초반의 옥사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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