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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鄭道傳]

조선의 왕을 만들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 1398년(태조 6)

정도전 대표 이미지

정도전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탄생과 출사 그리고 유배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성공시켜 조선왕조 개창을 가능하게 한 장본인으로 평가받는 고려 말·조선 초의 사상가·정치가이다. 본관은 봉화이고, 호는 삼봉(三峯)이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영천 우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봉화 지역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직을 세습하는 집안이었으나 정운경이 1326년에 사마시, 1330년에 동진사에 급제하면서 가문에서 처음으로 중앙 정부의 정식 관리가 배출되었다. 어머니는 영주의 선비 집안 출신으로 산원 벼슬을 지낸 우연(禹淵)의 딸이고, 정도전의 형제는 모두 셋으로 둘째는 정도존(鄭道存), 셋째는 정도복(鄭道復)이다.

‘도(道)’를 전하고[傳] 보존하고[存] 회복시키기[復]를 바란다는 뜻을 자식들의 이름에 반영한 것으로 보아 정운경은 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이것이 자식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에도 수록된 1386년(우왕 12)에 작성한 〈포은봉사고서(圃隱奉使藁序)〉에서 정도전은, 16~17세 때 성률(聲律)을 공부하느라고 대우(對偶)를 만들고 있을 때 민안인(閔安仁)이 찾아와 자신이 정몽주(鄭夢周)의 추천으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두 책을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공부하고 있다고 하여서 스스로도 두 책을 구해서 보았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 때마침 빈흥과가 있어서 정몽주가 공부하던 삼각산에서 내려와 삼장(三場)에서 장원하여 명성이 자자하였고, 자신이 찾아가 뵙고 평생의 친구처럼 지내며 가르침을 받았다는 일화도 함께 적고 있다.

정몽주가 연속으로 삼장에서 장원을 한 것은 1360년(공민왕 9)이므로 이로부터 계산하면 정몽주가 빈흥과에 응시하기 시작한 것은 1358년이고 정도전의 출생년도는 1342년일 가능성이 높다.

정도전도 정몽주가 빈흥과에서 장원한 그 해(1360년)에 성균시에 합격하였고, 2년 뒤인 1362년(공민왕 11) 10월 지공거 홍언박(洪彦博)과 동지공거 유숙(柳淑)이 주관한 진사시에서 동진사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부터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이존오,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상충(朴尙衷) 등과 교유하면서 강론하여 문견을 넓혔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1363년(공민왕 12) 봄 충주 사록에 임명되어 부임하였고, 1364년 여름에는 전교주부(典校主簿), 1365년에는 통례문(通禮門)의 지후(祗候)가 되었다. 이듬해 1월 부친상을 당하여, 부친을 영주 선영에 장사지냈다. 같은 해 12월 모친상도 있어 부친과 함께 모시고 여막에서 삼년상을 마쳤다. 정몽주가 《맹자》 1질을 보내 주어 이 기간 동안 제전을 지내는 날 이외에 매일 한 장이나 반 장씩 읽고 연구하였다고 하는데, 이후 정도전이 역성혁명을 성공했던 것에 비추어 보면, 삼년상 기간 중의 《맹자》 탐구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한편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산을 나누면서 억세고 건장한 하인은 아우와 누이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늙고 약한 하인은 스스로 차지하는 우애를 보여주었다고 전한다.

삼년상을 마친 후 삼봉의 옛 집으로 돌아와 기거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성균관[조선](成均館)이 중건되자 조정에서는 이색에게 대사성을 겸임시키고,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박의중(朴宜中), 이숭인 등에게 교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정도전도 이 때 천거로 성균관 박사가 되어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이때부터 고려에서 성리학이 흥기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조선왕조의 개창과 성리학의 연관관계를 고려하면 중요한 사건이라 평가할 수 있다.

1371년 7월 신돈(辛旽)이 처형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개경으로 달려갔다. 공민왕(恭愍王)이 신돈을 처형한 연유를 태묘에 고하는데 전 지후로서 태상시(太常寺)의 박사(博士)에 제수되어 그 고유하는 예법을 마련하였고, 악기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예의정랑(禮儀正郎)이 되었고, 예문응교(藝文應敎)로 옮겼으며,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전선(銓選) 관장하기를 무려 5년이나 했다고 한다.

1374년(공민왕 23) 9월 왕이 시해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마침 김의(金儀)가 명나라 사신과 함께 요동에 있었는데, 시해 소식을 듣고는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다. 이에 정도전이 정몽주 등과 함께 이인임(李仁任)에게 ‘공민왕은 죽고, 명나라 사신을 돌아가지 않았으니, 명나라에 알리지 않으면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고, 최원(崔源)을 달래어 보내서 사태를 수습하였다.

이인임 등이 다시 원(元)을 섬기기 위하여, 종친·기로(耆老)·백관들과 더불어 연명으로 글을 지어 원의 중서성(中書省)에 바치려고 하자, 정도전은 박상충·임박(林樸) 등과 함께 강력히 반대하기를, “선왕이 이미 남쪽의 명(明)을 섬기기로 결정하였으니, 지금 북원을 섬기는 일은 당치 않다.” 라고 하며 서명하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에는 공민왕의 시해와 어린 우왕(禑王)의 즉위, 신흥 유신의 상대적 성장과 권문세족의 대립, 명의 흥기와 북원의 패퇴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고려의 정국은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결국 1375년(우왕 1) 8월 조칙을 반포한다는 명목으로 온 북원의 사신을 이인임과 지윤(池奫)이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김구용, 이숭인, 권근(權近)과 함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글을 올려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인임과 경복흥(慶復興)은 그 말을 거부하고 정도전에게 북원의 사신을 맞아들이게 강요하였다. 정도전은 경복흥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원 나라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결박을 지어 명나라로 압송하겠다."하니, 경복흥은 ”그렇게 하면 반역자 김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며 화를 내었다.

정도전은 태후에게도 북원 사신을 맞이하면 안 된다고 아뢰었더니 경복흥은 화가 나서 이인임과 함께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에 우왕이 정도전을 전라도 나주 회진현(會津縣)으로 유배를 보냈다. 정도전은 나주 부곡인 거평의 소재동에 있는 황연(黃延)의 집에 세 들어 살았다.

유배기간 동안 많은 남방의 학자들이 정도전을 좇아 배우는 사람이 많았고, 문학작품도 다수 남겨, 훗날 귀양지에서 지은 산문은 ≪금남잡제≫로, 시는 ≪금남잡영≫으로 편찬되었다.

1377년(우왕 3) 7월, 유배지에서 삼봉의 옛 집으로 돌아왔고, 또 4년이 지난 뒤에 서울 밖에서는 마음대로 살게 허가되었다. 그래서 삼각산(三角山) 밑에 집을 짓고 글을 가르치니,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1384년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고, 시에서 “옛 친구들은 편지조차 끊어 버렸네”라고 토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383년(우왕 9) 가을, 정도전은 동북면[동계](東北面(東界)) 도지휘사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를 찾아 북동면 함주의 군막으로 갔다.

1384년 여름에도 정도전은 함주를 한 번 더 찾는다.

둘의 만남은 뒤에 역성혁명을 위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정도전 개인적으로는 오랜 유랑의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성계의 후원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고, 7월에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천추절을 축하하러 갔다. 당시 고려는 명과 국교를 맺지 않은 상태였고, 고려에서 보냈던 사신 김유(金庾), 홍상재(洪尙載), 김구용 등은 명에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정몽주, 정도전 일행이 제때에 금릉(金陵 남경)에 당도하니, 명은 우호의 뜻을 보이고 역류하고 있던 김유와 홍상재 등을 돌려보냈다.

1385년 4월 귀국하여 곧바로 성균좨주(成均祭酒) 겸 지제교(知製敎)를 제수받았다. 1387년에는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갔다.

2 개혁정치를 주도하고 혁명을 성공시키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을 위해 출병한 이성계가 5월 22일 압록강 위화도에서 말 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회군하였다.

회군한 이성계는 최영을 유배 보내고 우왕을 폐위하였다. 이로써 이성계가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한손에 잡게 되었고, 고려의 운명은 뒤바뀌게 된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준(趙浚)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으로 천거해 혁명을 위한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우왕이 폐해진 후 그 아들 창왕(昌王)이 왕위를 이었다. 조민수(曺敏修)와 이색 등의 지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1389년 정도전, 조준, 정몽주, 설장수(偰長壽) 등이 주도하여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였다.

그들은 우왕이 신돈의 종이었던 반야의 소생으로 공민왕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돈과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왕씨’가 아닌 ‘신씨’로서 거짓 왕이 왕위를 찬탈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로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왕과 창왕의 연이은 폐위를 통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정치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해 나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전(私田)개혁이 추진되었다. 당시 고려에서는 관직생활의 대가로 지급된 수조지가 반납되지 않고 권문세족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유화되어,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고 국가는 공전(公田)의 감소로 재정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조준이 1388년 7월 사전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한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1389년(창왕 1) 4월 왕명에 따라 도당(都堂)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정도전과 윤소종(尹紹宗) 등은 사전개혁을 지지한 반면, 이색, 이림(李琳), 유백유(柳伯濡), 권근, 우현보(禹玄寶) 등은 전면적인 사전개혁을 반대하고 개선론을 주장하면서 나뉘었다.

이후 사전개혁의 추진과정에서 이색 계열과 조준, 정도전 계열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일어난 ‘이초의 옥(彛初之獄)’은 소위 온건개혁파와 역성혁명파의 대결 구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명나라에 망명하여 공양왕이 왕씨가 아니라 이성계의 인척이며 이성계가 장차 명나라를 침범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다. 이때 정도전은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것이 무고임을 변명하였다.

이성계 일파는 윤이와 이초의 배후로 이색을 지목하면서 이를 계기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몽주가 이색의 처벌에 반대해 혁명 세력에서 이탈하고 반이성계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1391년 들어 가뭄이 계속되자 공양왕은 교서를 내려 재이(災異)를 그치게 할 방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김자수(金子粹), 김초(金貂), 박초(朴礎)등 성균관 관원들을 움직여 잇달아 상소를 올려 보제사(普濟寺) 탑 공사의 중지와 불교 배척을 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직접 상소를 올려서 불교 숭상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공양왕을 견제하면서, 이색과 같이 불교계와 연계되어 있는 세력과 스스로를 구분지음으로써 반대 세력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정도전은 이어 이색과 우현보가 우왕과 창왕을 왕으로 옹립한 것은 반역행위라고 비판하면서 처단해야 한다는 글을 도당에 올렸다.

대립이 심화되면서 정도전 등과 반대 세력 간의 목숨을 건 투쟁이 이어졌다. 1391년 9월 반대세력인 대사헌 김주(金湊)와 형조 관원들이 정도전을 탄핵하였고, 이로 인하여 정도전은 봉화로 유배되었다가 10월에는 나주로, 12월에는 다시 봉화로 이배(移配)되었다. 이 때 정도전의 두 아들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듬해 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영주로 돌아갔지만 정몽주 등은 이성계가 낙마해서 부상을 당하는 사고를 계기로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을 시켜 조준·남은(南誾)·남재(南在)·윤소종·조박(趙璞)등 이성계 일파의 직첩(職牒)과 공권(功券)을 거두고 정도전을 처형하여 후세에 경계를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실제 이들이 귀양 간 곳으로 김귀련(金龜聯)·이반(李蟠) 등을 보내서 국문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즉 이성계의 주변 인물을 국문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이성계를 압박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여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어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였다.

아울러 이숭인·이종학(李鍾學)·조호(趙瑚)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조금 후에 김진양과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우간의(右諫議) 이내(李來)·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사헌 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와 장령(掌令) 김묘(金畝)·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이신(李申) 등을 귀양 보냈으며, 이후 이숭인·이종학도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로써 이성계의 반대 세력은 힘을 완전히 잃게 되었고, 정도전은 정계로 복귀하였다.

3 조선의 건국과 왕자의 난

정몽주 제거 이후, 정국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방향으로 치달아 갔다. 공양왕이 이성계의 병문안을 오고 태조와 맹약을 맺고자 하며 불리한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하였으나 이미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왕대비의 교지라는 형식을 빌어 공양왕을 쫓아내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7월 16일 국새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으로 찾아간 이들은 배극렴(裵克廉)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김인찬(金仁贊)·조인옥(趙仁沃)·남재·조박·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황거정(黃居正)·임언충(任彦忠)·장사정(張思靖)·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와 한량(閑良)과 기로(耆老)들이었다. 태조는 옥새 받기를 몇 차례 거부하다가 결국 17일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개국 직후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使司), 판호조사(判戶曹事),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 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모두 겸임하였다. 주요 정책의 결정, 관료 인사, 재정 운영, 군사, 문한 등 국가 경영의 핵심적인 실권을 한 손에 장악하였다. 그리고 새 나라를 위한 기틀을 다지는 일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1398년(태조 7)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으로 말미암아 정도전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1차 왕자의 난’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세자 책봉이었다. 건국 과정에서 공이 있었던 장성한 아들들을 배제하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세자 책봉을 정도전이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함으로써 빌미를 제공했고, 사병 혁파나 재상중심의 정치구상 등에서 번번이 이방원과 갈등을 빚은 바 있었다. 결국 대립하던 이방원과 정도전 세력은 결국 극단적인 해결 방식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찬성 최습(崔隰)의 딸인 경주 최씨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인 정진(鄭津)은 1차 왕자의 난 때 죽지 않고,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었다가 이후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정진은 정내(鄭來)와 정속(鄭束)을 낳았는데, 2남인 정속의 장남이 정문형(鄭文炯)으로 우의정을 지냈다. 정도전의 2남인 정영(鄭泳)과 3남인 정유(鄭游)는 각각 소윤(少尹)과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였는데, 둘 다 왕자의 난 때 살해당하였다.

4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꾸다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설계자’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우선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저술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위한 제도적인 틀을 만들었으며,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정총과 함께 엮어서 전왕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불씨잡변(佛氏雜辨)을 남겨 불교가 기반하고 있는 윤회설이나 인과설 등의 불합리성을 설파하고 성리학의 우위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였다

정도전은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통치 규범과 국정 운영 체제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겼는데, 대부분 그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경국전≫은 1394년(태조 3) 5월 30일에 완성한 정치 이론서로 개국의 기본 강령을 논하였다. ≪주례≫의 육전 체제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용하였고, 한·당·송·명의 제도들도 부분 수용하였다. 이 책에서는 보위를 바르게 하는 일(正寶位), 국호의 의미(國號), 국가의 근본을 안정시키는 일(正國本), 세계(世系), 교서(敎書) 등 다섯 개 항목의 총론을 서술한 다음 치전(治典)·부전(賦典)·예전(禮典)·정전(政典)·헌전(憲典)·공전(工典) 등 육전의 관할 사무를 규정하고 있다.

≪경제문감≫은 ≪조선경국전≫이 만들어진 다음해인 1395년에 편찬되었는데, ≪조선경국전≫이 국정 전반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고 하면, ≪경제문감≫은 ≪조선경국전≫ ‘치전’의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상권에서는 재상 제도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고찰하고, 재상의 직책에 관해 서술하였으며, 하권에서는 대관(臺官), 간관(諫官), 위병(衛兵), 감사(監司), 주목(州牧), 군태수(郡太守), 현령(縣令) 순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우를 망라하여 역사적 변천 과정을 서술하였다. 또한 해당 직책을 실제로 맡았던 역사적 인물의 성패에 대한 것도 아울러 기록하였다.

2년 뒤인 1397년에 완성한 ≪경제문감별집≫은 ≪경제문감≫의 보유편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군도(君道)라는 이름 아래, 요임금과 순임금으로부터 송과 원대에 이르기까지 군주가 모범과 경계로 삼을 만한 중국 역대 제왕의 사적을 기록하고 고려 역대 왕의 치적도 함께 적고 있다. 특히 고려 왕에 대한 서술은 이제현(李齊賢)과 사신들의 사찬(史贊)을 채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의논(議論)이란 제목 아래에 경전에 있는 성현들의 격언을 모아 붙여두었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생각한 이상적 국가 운영의 형태는 어떤 것이었을까? ≪조선경국전≫을 중심으로 그것을 보충하는 의미의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을 관통하는 것은 그가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권력이 집중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관권 남용’의 문제도 해결하기 위하여 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감독 기능을 부여하고자 했다. 언관과 간과, 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

정도전의 왕정체제의 문제점으로서 '왕의 자질이 어둡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이 한결같지 않다.' 라고 판단하고, 그것을 천하의 인재 가운데서 선발된 재상이 도와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임금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어진 인재를 골라 재상의 자리에 앉도록 하는 것을 책무로 규정하고, 재상이 실질적으로 정화(政化)와 교령(敎令)을 결정하고 하위 관료를 통솔할 수 있도록 했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적 정치체제에 대한 꿈은 왕자의 난의 원인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세력에게 제거 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를 전체로 놓고 보면 조선의 관료시스템은 종국에는 정도전이 구상한대로 흘러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도전은 고려시기 관직을 담당한 이른 시기부터 의식을 정하거나 예악을 정비하는 일을 맡았다. 이를 이어 조선 건국 이후에도 주요한 제문을 짓는다거나 예악을 정비하여 새 왕조의 위엄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393년(태조 2) 7월 26일, 문덕곡(文德曲)·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錄)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바쳤다. 이에 태조가 악공으로 하여금 이를 익히게 하였고, 정도전이 또 무공(武功)을 서술하여 악사를 지어 바쳤는데 납씨곡[납씨가](納氏曲(納氏歌))·궁수분곡(窮獸奔曲)·정동방곡(靖東方曲) 3편이었다.

이후 전악서(典樂署)의 무공방(武工房)을 설치하여 익혀 새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악곡들은 조선 전기의 주요한 악곡으로 활용되었고, 일부는 춤으로 꾸며 조선후기까지 이어졌다.

5 새로운 나라를 위한 새로운 수도

또 다른 주요한 업적은 한양 천도와 새로운 수도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사업을 총괄하였다는 것이다. 개국 후 3년이 되는 1394년 8월 천도 논의가 다시 본격화되었다. 천도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태조로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각각 도읍을 옮길 만한 터를 글월로 올리게 하였다.

하지만 재상들의 의견은 대체로 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이었고, 이에 대해 태조는 불쾌한 감정을 표출하였다.

정도전은 “국가가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서 풍수의 설에 의한 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새 수도의 건설보다는 민생 안정이 더 시급하니 천도는 천천히 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결국 8월 24일 도평의사사에서 한양 천도를 건의하고 그것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한양천도가 확정되었다.

한양이 천도지로 확정되자 곧바로 9월 1일 수도 건설을 주관하는 신도궁궐조성도감이 설치되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와 좌복야(左僕射) 김주, 전 정당 문학 이염(李恬), 중추원 학사 이직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여 임무를 맡겼다.

태조의 명으로 이들과 정도전 등이 9월 9일에 한양으로 내려와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을 그려서 바치었다. 그런데 정도전은 이미 태조의 즉위 교서를 기초하면서 고려의 종묘, 사직의 경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인데, 종묘는 성 밖에 있으며, 사직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다.’고 해서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한양에서 종묘, 사직, 궁궐, 시장, 도로의 터를 정하는 데 있어서 ≪주례≫의 옛 제도를 적용하려 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겠다.

실제의 공사는 12월 4일 중추원 부사 최원(崔遠)을 종묘를 세우려는 터에 보내고, 또 첨서중추원사 권근을 궁궐 지을 터에 보내서 오방지신(五方祗神)에게 제사지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하루 앞서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였고,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다.

공사는 이듬해 9월 29일에 마무리 되었다. 종묘와 궁궐 공사가 마무리되자마자 윤9월 13일 도성축조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그 직제를 정했으며, 정도전에게는 성 쌓을 자리를 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0월 7일 태조는 새 궁궐과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궁궐의 이름은 큰 복을 받으라는 뜻에서 경복궁(景福宮)이라 이름하고, 연침을 강녕전, 동서의 소침을 연생전과 경성전, 편전에는 사정전[경복궁](思政殿(景福宮)), 정전에는 근정전[경복궁](勤政殿(景福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근정전 아래 동서 누각에는 각각 융문루(隆文樓)와 융무루(隆武樓)라고 하였으며, 궁궐의 남쪽문은 정문이라고 하였다. 이 이름들은 ≪시경≫과 ≪서경≫ 등 유교 경전에서 인용한 것은 새로운 국가의 이념적 기준이 어떠한 가를 내외에 분명히 한 것이었다.

한양에 성을 쌓기 위한 공사는 1396년(태조 5) 1월 9일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성이 축조된 다음에는 성문을 쌓았는데, 숭례문(崇禮門)이나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방위별로 오덕(五德)을 배치하고 있다. 4월 19일에는 한성부의 5부 아래에 52개의 방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들도 역시 ‘인의예지신’ 같은 유교의 덕목 및 덕과 선, 그리고 국가의 평안을 비는 뜻을 담은 글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런 이름들이 모두 정도전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다만 현재 편년 자료 등에서 이를 증명할 자료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비록 이러한 추정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도성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의 터를 잡고, 성 쌓을 자리도 잡았다는 점에서 정도전은 새 도성의 설계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6 사병을 혁파하고, 요동정벌을 꿈꾸다

정도전은 사병 혁파로 대표되는 군제 개혁을 추진하고, 요동 정벌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 지방의 군권은 절제사 개인에게 위임되어 있어서 국군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절제사의 사병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태조는 개국 직후 왕자·종친·공신들을 절제사로 임명해 지방군을 통솔하게 했지만 여전히 일원적인 지휘체계는 성립되지 못했고 각 지휘관의 사병적 지휘권도 계속 유지되었다.

정도전은 군대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이원화하되 통수권은 중앙에서 장악하며, 지방군은 교대로 상격해 수도를 숙위하도록 하는 부병제를 가장 이상적인 군사 제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부병제를 실시하려면 통수권이 반드시 일원화되어야 하며, 정도전이 군제 개혁을 추진한 목적은 여기에 있었다.

정도전은 1393년(태조 2)부터 진법 훈련 등 각종 군사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각 절제사들이 거느리던 사병 성격의 군대를 자신이 직접 장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1394년 중앙군의 최고 책임자인 판의흥삼군부사에 임명되자 본격적인 군제 개혁을 추진하여 2월 29일 8개 조목의 병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 상서문을 통해 군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병마사 이하 장군들에게 주고, 절제사는 병마사를 감독하는 직무만 담당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부병과 시위의 편제를 개편하고자 했다. 이로써 절제사의 지휘권을 유명무실하게 함으로써 절제사 휘하의 군대를 중앙에서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개혁안을 현실화하는 후속 조치로 정도전은 강력한 군사 훈련을 실시했으며, 훈련에 미숙하거나 명령을 어긴 자를 엄격히 처벌하도록 했다. 이는 정예 군대를 육성하려는 목적 이외에 군사 훈련을 중앙에서 주관함으로써 절제사와의 사병적 연결 고리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1396년에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발생한 표전문 사건 이후 정도전은 군사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표전문은 그 격식과 용어가 까다로워서 잘못 선택한 단어 하나가 외교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1396년 6월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조선이 보낸 외교문서에 무례한 표현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글을 만든 정도전과 정탁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권근을 대신 파견하여 명 황제를 설득함으로써 원만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표전문 사건은 1397년에도 되풀이 되었다.

이에 정도전은 남은을 시켜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라고 상서하였다.

이에 대해서 요동 정벌이 실질적으로 준비되고 있었으며, 이를 간파한 명과 표전문을 빌미로 양국 사이에 긴장상태가 형성되고 있었다는 평가가 있고 한편으로는 요동 정벌을 빌미로 사병 혁파의 반대하는 세력을 억제하려고 했다고 보는 평가로 나뉜다.

1398년 3월에는 남은이 “여러 절제사를 혁파하고 합하여 관군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윤5월 말부터 8월 초까지 군사 훈련의 강도가 최고조에 올랐다. 군사 훈련에 불참하거나 《진도(陣圖)》 강습을 게을리 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문책했는데, 《진도》를 익히지 않았다고 해서 삼군 절도사(三軍節度使)와 상장군·대장군·군관(軍官) 등 2백 92인이 한꺼번에 탄핵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같은 달 26일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과 남은 등이 숙청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사병 혁파를 두고 일어난 갈등이 정도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편이던 태종도 집권 뒤에는 결국 사병 혁파를 추진하여 조선의 국방군 체계를 갖추었다.

정도전은 새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반역의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불명예가 있었다. 이런 정도전의 사상이 국가 차원에서 재평가 된 것은 정조대의 일이다. 정조는 1791년(정조 15) 규장각에 명해 ≪삼봉집≫에 누락된 글들을 수집하고 체제도 정비해 새로 편찬하도록 했다. 현재 주로 이용되는 ≪삼봉집≫이 이때 간행된 것이다. 그리고 고종대 경복궁이 중건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의 공이 인정되어, 1865년(고종 2) 대왕대비의 전교에 따라 정도전의 훈작이 회복되었고, 1871년에는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이 하사되었다. 이로써 사후 거의 500년이 지난 뒤에야 명예를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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