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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무옥(誣獄)인가 역모(逆謀)인가

1546년(명종 1) ~ 1589년(선조 22)

정여립 대표 이미지

기축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조선 선조대 동인(東人)·서인(西人)간 당쟁 구도 하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장본인이다. 서인측은 정여립을 위시하여 동인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주장, 결국 동인정권이 몰락하고 서인정권이 구성되었으나 실제로는 역모의 장본인인 정여립이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자결하였기에 기축옥사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무옥 및 역모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오고 있다.

2 가계와 출사

정여립의 본관은 경상도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이다. 그의 8대조는 고려말 공민왕대 여진과 왜구를 물리쳤던 대호군 정인(鄭絪)으로 전라도 김제에 정착하였다. 증조는 정극량(鄭克良), 조부는 정세완(鄭世玩), 부친은 익산군수·첨정 정희증(鄭希曾), 모친은 박찬(朴纘)의 딸로 이즈음 대대로 전주에서 세거해오고 있었다. 정여립은 전주에서 태어났으나 김제 금구 방면으로 장가들어 그곳으로 이거하였는데, 이곳은 현재의 모악산 금산사 아래로 알려져 있다. 후에 그가 전주·진안 등지에서 대규모의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던 사실을 보면 이 일대에서 그의 가문적 기반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여립이 기상이 있고 총명하여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던 점에 대해서는 모든 기록들이 일치하지만, 역모자라는 편견으로 인해 그의 어린 시절이나 성품에 대해서는 과도한 악평들이 덧붙어져 있다. 가령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였을 때 꿈에 정중부(鄭仲夫)가 나타났고 태어날 때에도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는 기록, 정여립이 7~8세 되던 해 까치 새끼를 잡아 죽인 일이 있는데 여종이 이를 부친에게 고해 꾸지람을 받게 되자 여종의 배를 갈라 죽였다는 기록, 또 나이 15~16세가 되자 아버지가 현감이 되었는데 정여립이 고을 일을 마음대로 처단하여 아전들이 그의 말만 따랐다는 기록 등이 있으나 이는 기축옥사를 역모로 바라본 서인측의 입장이므로 가감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고, 1570년(선조 3) 24세가 되던 해 문과에 급제한 후 당시 사림세력의 명사이자 서인의 중핵이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일세의 이목을 끌었다. 벼슬생활도 순탄하여 1583년(선조) 37세 되던 해에 예조좌랑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이처럼 그는 이이와 성혼의 촉망을 받던 서인계 인사였으나 1584년(선조 17) 홍문관 수찬이 된 후부터는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동인계로 선회하여 이이, 성혼, 박순(朴淳) 등 서인의 주요 인사들을 비판하게 된다. 이처럼 급작스러운 변화의 원인은 분명치 않지만 이때 이이의 죽음으로 서인이 약해지고 동인이 힘을 얻게 되자 정여립도 서인을 버리고 동인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특히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정여립이 이이를 스승으로 섬기어 선비라는 이름을 칭탁하고 갑자기 중한 명망을 얻었다. 당시 의논이 그를 이조에 끌어들이려고 하였는데 이이가 중지시켰다. 이이가 졸하고 나서 정여립이 동인의 세력이 커짐을 보고 도리어 동인에게 붙어서 경연에서 이이를 헐뜯었다”는 기록이 그러하다.(『이연평행장(李延平行狀)』·『묵재일기(默齋日記)』)

3 학문 성향과 당색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정여립의 기질과 학문 성향이 동인, 그중에서도 북인의 영수격 인물인 이발(李潑)을 위시하여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등 화담 서경덕(徐敬德) 계통 및 남명 조식(曺植) 계통 인물들과 잘 맞았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여립과 동향이자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이발은 서경덕학파 민순(閔純)의 문인이었으며 조식에게 배우기도 했다. 또한 정인홍이나 최영경 등은 조식의 수제자들이었다. 조선의 붕당이 당시의 시대이념이던 조선성리학 이념을 둘러싼 각 학파간의 학문적 견해 차이를 기반으로 분립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할 때 결국 정여립의 기질적 성향, 또 이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학문적 성향이 차츰 서인계 보다는 동인계, 그중에서도 이발을 중심으로 북인계 성향에 근접해 갔던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정여립이 이이를 공척하자 서인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선조 또한 평소 “여립은 패기가 많아서 옆에 가까이 있게 하는 데는 맞지 않다”며 그의 강한 기질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일월록』), 이때에 이르러 선조의 노골적인 질시를 받게 되었다.

선조는 그를 스승을 배반한 송나라 형서(邢恕)라는 인물에 비할 정도였다.

물론 동인들은 계속 그를 천거하였으나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였고 이에 정여립은 과감하게 벼슬을 버리고 귀향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처럼 정여립은 중앙 정계에서 파란을 일으켰으며 특히 선조의 질시를 받은 상태에서 귀향을 하였기에 낙향 이후에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반골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게 되었고 결국 역모를 도모했다는 엄청난 혐의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4 귀향과 대동계 조직

정여립은 귀향후 글읽기와 무술 연마에 주력하였다. 비록 중앙에서 밀려나기는 하였으나 동인 정국 하에서 여전한 명망과 영향력을 지녀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전라도 일대에서의 그의 명망은 더욱 높아갔는데 특히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해갔다. 대동계를 통해 많은 인재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 들었음은 1587년(선조 20)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전라남도 여천군 삼산면 손죽리에 속하는 작은 섬)에 침범했을 때 대동계 인사들의 주도로 왜구를 물리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지금도 진안군 상전면 수동리 내송마을에 자리한 죽도 일원에서는 정여립과 대동계에 대한 일화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때 왜변에 열읍(列邑)이 군사를 조발(調發)하였는데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이 일에 미숙하여 어찌 할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립을 청하여 군대를 나누게 하였더니 여립이 사양하지 않고 담담하여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군병이 모였는데, 부서를 나누어 인원을 배치하는 것까지 하루가 안 되어 마무리지었다. 그 장령(將領)들은 모두 여립이 만든 대동계에 들어 있는 친밀한 무사였다.

이후 대동계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과 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모사(謀士)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정여립이 귀향후 조직한 대동계의 모습과 활약상을 통해 정여립이 북인계가 된 기질적, 학문적 배경이 더욱 잘 이해된다.

조선과 같은 유교 문치주의 사회에서 특히 문반 관인 출신의 인물이 왜구들을 물리칠 정도의 무사 조직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하며 더하여 여기에 모여든 인물들이 전형적인 사림학자들과 거리가 먼 기인·모사들이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당시 이이·성혼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이 성리학이념에 상대적으로 충실하였다면 동인세력, 그중에서도 북인계는 노장, 병법, 천문, 역법, 양명학 등도 두루 포용하는 회통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는데 정여립 역시 그러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여립은 잡술에 두루 통하여 감여(堪輿)와 성기(星紀) 등에 관한 서적을 중국에서 사다가 무리들과 강설하였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5 기축옥사

정여립이 대동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던 사실을 두고 많은 논란과 의심이 제기되었을 것임을 짐작해보게 되는데 실제로 1589년(선조 22) 10월 정여립이 역모를 하였다는 고변이 나오게 된다. 곧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은 연명으로 정여립 일당이 역모를 꾀하였다며 고변하였다. 이들의 고변에서 의하면 정여립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고 했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연말에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으며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고도 했다. 이 고변에 따라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어 처벌되었으니 이것이 이른 바 기축옥사이다.

선조는 정철(鄭澈)을 우의정, 성혼을 이조참판으로 임명하여 서인정권을 구성하였는데, 특히 정철은 1583년(선조 16) 이발의 탄핵을 받고 이듬해에 고향인 전라도에 물러나 있다가 정여립 사건 이후 정언신을 대신해 우의정이 되었고 사건의 위관이 됨으로써 기축옥에 깊이 관여했다.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정여립은 그의 제자인 안악 교생 변숭복을 통해 역시 그의 제자인 안악교생 조구(趙球)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도망하여 대동계의 서실이 있던 진안 죽도 일원에 숨어 있다가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43세 되던 해였다.

정옥남은 잡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모의 주모자이며 해서 사람 김세겸(金世謙)·박연령(朴延齡)·이기(李箕)·이광수(李光秀)·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한 후 사망하였다. 다시 이들이 체포되어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고, 일부는 불복하다가 장살당하였다. 이처럼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로 단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위관인 정철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이발(李潑), 이길(李洁), 김우옹(金宇顒), 백유양(白惟讓), 정언신(鄭彦信), 홍종록(洪宗祿), 정언지(鄭彦智), 정창연(鄭昌衍) 등 당시 동인의 명사들이 연루되어 처형 또는 유배당하였다. 특히 정여립의 적극적인 후원자이자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는데 그의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비롯한 50여인의 상소로 이산해(李山海), 나사침(羅士忱), 나덕명(羅德明), 나덕준(羅德峻), 정인홍, 한효순(韓孝純), 정개청(鄭介淸), 유종지(柳宗智), 김우굉(金宇宏), 윤의중(尹毅中), 김응남(金應男), 유성룡(柳成龍), 유몽정(柳夢井), 조대중(曺大中), 우성전(禹性傳), 남언경 등 30여인이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혹은 유배되었다. 동인들은 이를 정철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사건은 예상외로 확대되어갔다. 군자감 정 김천일(金千鎰)의 지적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참혹한 화와 연좌의 죄를 눈으로 직접 보고는 앞을 다투어 도망하여 온 마을이 텅빈 곳이 있기에 이르렀고 고난을 겪으며 유리하는 즈음에 왕을 원망하는 소리가 구천에 사무침으로써 6도의 방본(邦本)이 여지없이 좌절되었다.”

6 기축옥사 무옥설

또 이듬해인 1590년(선조 23)에는 양천경(梁千頃) 등이 정여립 일당의 공술에서 나왔던 길삼봉이 바로 최영경이라고 무고하였다.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동인계의 중망을 모으고 있던 진주의 최영경이 기축옥의 실제 모주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최영경은 옥사하였는데, 당시 정적 정철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인해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또한 이듬해 이 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졌고 1591년(선조 24)에는 최영경이 신원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이것만으로도 기축옥사가 얼마나 허술하게 처리되었는가를 알게 된다.

이처럼 기축옥사는 약 3년여간 진행되면서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인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인계 위관 정철의 처사는 법의 준엄한 집행이 아닌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것으로 동인들은 확신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철이 당쟁으로써 무옥을 일으킨 장본이라는 주장과 함께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인물로 송익필(宋翼弼)도 지목되었다. 송익필은 노비 출신으로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성혼·이이가 사림의 영수로 공이 있지만 자기와 친한 이에게만 너무 편벽하였기 때문에 정철에게 미혹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정철을 옹호하니 정철도 그것을 믿고서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었다”는 기록, 또 송익필을 정철의 많은 심복중 한명으로 바라보는 것이 동인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7 기축옥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

이처럼 정작 주모자는 자결하였고 사건은 거대 역모사건으로 확장되어 갔으나 정여립이 과연 역모를 꾀하였는지는 미상이다. 다만 그의 글 중에서 역모와 관련된 것으로 혐의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고 이 부분이 옥사 처음부터 강조되었다. 곧 그가 경전을 끌어대어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天下公物說)’, 또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何事非君說)’라는 말을 하였음이 강조되었고 또한 그가 이전부터 내려오던 『정감록(鄭鑑錄)』 중의 목자(木子 : 李의 의미)는 망하고 전읍(奠邑 : 鄭의 의미)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하여 전읍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낭설을 퍼뜨렸다고도 하며 정여립이 제천(祭天)한 제문이 7장이나 나왔다고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측면들이 서인들의 주장처럼 정여립이 역모를 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겠지만 다만 그가 매우 급진적 사상가로서 탈성리학적인 북인계의 성향을 극단적으로 확대시키고 있었음은 분명히 보여 준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근대의 민족주의사학자 신채호(申采浩)는 “정죽도선생(鄭竹島先生)은 민중군경(民重君輕)을 주장하다가 사형을 입었다”며 이미 400년 전에 군신윤리론을 타파하려 한 혁명가로 높이 평하였다.

기축옥사에 대해서는 조선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크다. 실록의 경우도 광해군대 동인이 편찬한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는 기축옥사가 과도하게 부풀려진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고 서인 집권후 인조대에 수정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서는 기축옥사를 역모의 관점에서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기축옥사는 결과적으로 동인계에 큰 타격을 주었고, 더 나아가 호남권 사림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곧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찍혀 이후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이 어려워졌다.

정여립은 실록은 물론 『기축록(己丑錄)』 이하 각종 개인문집이나 야사 등에서 오로지 기축옥사의 주모자로서만 기록되어 악명이 높다. 『기축록』이하 각종 기록들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잘 수렴되어 있어 전후시말을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류의 기록 외에 그의 인간적 삶의 흔적은 인멸되어 남은 것이 거의 없었지만 다만 요즘 들어 정여립을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가로 재평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의 생가, 주요 활동지 등이 향토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되어가고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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