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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鄭麟趾]

문화발전과 정치안정에 기여하다

1396년(태조 5) ~ 1478년(성종 9)

정인지 대표 이미지

정인지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출생과 가문의 배경

정인지는 자가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로 조선이 건국된 지 다섯 해 되는 1396년(태조 5년) 출생하였다. 그는 태종대 처음 출사하여 성종대 사망하였는데, 그가 활동한 시기는 조선의 각종 제도 문물이 완성되어 가고 있던 시점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정인지는 당대의 문장가이자 엘리트 관료로서 15세기 조선이 이룩한 정치적, 문화적 업적들 대부분에 손길이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인지의 본관은 하동(河東)이었는데, 그의 가문은 정인지의 5대조인 정지연(鄭之衍)이 경관직에 오르며 사족 가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인지의 증조부 정익(鄭翊), 조부인 정을귀(鄭乙貴) 등은 특별한 관력이 확인되지 않고, 부친인 정흥인(鄭興仁)이 석성현(石城縣)의 현감을 지냈다. 이로 보아 정인지의 가문은 여말선초 향리 집안에서 흥기하였지만, 정인지 대까지는 명문 가문으로 발돋움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이었다. 정인지의 모친은 진천의(陣千義)의 딸이었는데, 진천의도 특별한 관직을 역임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역시 정인지의 가계와 마찬가지로 한미한 사족가문이었을 걸로 추측된다.

2 생애와 주요한 업적

정인지의 유년시절과 생장과정, 교유한 인사나 사제관계는 특별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의 아버지 정흥인이 내직별감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 소격전(昭格殿)에 들어가 집안을 일으킬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자, 그의 아내가 신기한 꿈을 꾸고 정인지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5살부터 독서를 시작하였으며 유달리 총명하여 눈이 스치기만 하면 글을 암송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1411년(태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4년(태종 14년) 권우(權遇)가 주관하였던 식년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급제 후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예빈시의 주부로 발령받았고, 이후 사헌부의 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 주요직책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태종이 세종에게 정인지는 크게 등용할 만한 인재라고 추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정인지는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거쳐 집현전의 응교로 발령받았다. 집현전은 세종이 집권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구로서, 국가의 제도 정비에 필요한 각종 학술연구의 중심기관이었다. 정인지의 집현전 발령은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당대의 문사들과 교유할 수 있는 기회였고, 또한 그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1427년(세종 9년)에는 기존의 관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과 중시 시험에서 다시 한 번 장원으로 뽑혔고, 곧 집현전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후 정인지는 세종이 주도하는 여러 편찬 사업에 책임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1431년(세종 12년) 세종은 대제학이던 정초(鄭招)와 더불어 정인지에게 당시 사용하던 역법(曆法)을 현재 조선의 사정에 맞게 개정하게끔 지시하였다. 당시 정인지는 천문학에는 밝지 못했던 모양인데, 세종은 이를 알면서도 그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이 작업의 결과물이 바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었다. 이 『칠정산내편』은 이후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 등이 만든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과 함께 묶여 『칠정산』이 되었다.

『칠정산내편』은 원나라와 명나라에서 사용하던 역법을 조선에서 사용할 수 있게끔 교정한 것이었다. 역법이란 태양과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이를 바탕으로 시간을 측정하고 달력을 만드는 것인데, 원나라나 명나라가 위치하던 중국대륙과 조선이 위치한 한반도는 지리적인 위치 차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오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여러 상수들과 변수들을 새로 설정하여 시간과 달력을 계산해 낼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칠정산내편』으로, 당시 조선의 천문학 역량을 총동원한 역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완전히 과학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지는 못하였고, 다소 미신적 부분에 근거하여 서술된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역법을 차용하되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역법을 개정한 것은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 정인지는 천문학의 정비와 함께 세종의 아악정비에도 참여하였는데, 1430년 완성된 『아악보』의 서문도 그의 손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본래 유교에서 음악은 예와 더불어 통치의 기본수단으로 인식되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음악을 바르게 하는 것은 옛 성왕대 부터 통치자의 매우 중요한 과업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은 고려시대 쓰던 음악을 계승하였으나, 세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이미 고려의 악기들은 많이 없어지거나 망가진 상태였고, 음악의 악보나 연주법 역시 이상적인 고대의 음악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에 세종은 박연(朴堧) 등을 중심으로 아악을 정비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는데, 그 결과가 바로 『아악보』였다. 당시 만들어진 아악은 중국의 고전에 등장하는 음악과 당송대의 문헌에 나온 음악, 그리고 현재 명나라에 사용되는 음악을 꼼꼼히 비교하는 한편으로 악기의 재료로 조선에서 나는 기장과 옥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예문관대제학과 이조좌참판, 충청도관찰사등을 역임하였고, 1439년(세종 21년)에는 집현전직제학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에도 형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고, 1440년에는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1442년 예문관대제학에 다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사륜요집』의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사륜요집』은 중국 역대 황제의 명령인 제고(制誥), 조칙(詔勅)을 모아 만든 『사륜전집』을 요약하여 만든 책이었다.

한편 이 시기 정인지는 세종의 핵심사업 중 하나였던 세금개혁, 즉 공법(貢法)에도 깊숙이 참여하였다. 당시 조선의 세금은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란 제도였는데, 답험이란 세금을 거두는 관리가 세금을 부과할 토지마다 가서 작황을 판단하는 것을 말하고, 손실이란 그 판단에 따라 수세액을 얼마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작황에 따라 백성들의 부담량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었지만, 실제 시행상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첫째로 조선의 전체 토지를 소수의 관리들이 모두 답험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고을의 아전 등에게 맡겨 처리하여 답험 결과가 공정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둘째로는 매 해 마다 관리를 파견해야 했는데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이 백성들을 못살게 굴기도 하고, 또 지방에서 그 관원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각종 비용이 들어가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해마다 나라의 수입이 달라지는 어려움도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점 때문에 매해 고정량의 세액을 거두는 공법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관원의 반대에 부딪쳐 강력히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있던 정인지는 세종의 공법 시행을 지지하면서 그 세부 계획을 상소로 올렸다. 본래 관리들이 세종의 공법에 반대했던 명분 중 하나는 유교경전 중 하나인 『맹자』에서 공법을 잘못된 세금제도로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인지의 상소에서는 ‘ 『맹자』에서 비판한 공법은 본래의 공법이 아니라 후세에 공법을 잘못 운용한 탓’ 이라고 하여 세종의 공법 시행이 선왕의 아름다운 법을 다시 시행하는 것이라 칭하였다. 아울러 충청도에서 시행할 수 있는 공법의 세부 법안을 건의하였다. 정인지의 이 상소로 세종은 공법 추진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이후 정인지는 공법 시행을 담당하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의 제조직을 맡게 되었으며, 이후 새로 시행되는 공법을 실제 현장에 적용하는 임무를 맡고 삼도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돌며 토지의 전품을 판정하는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1445년(세종 27년)에는 의정부의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는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완성하여 찬진하기도 하였다. 『치평요람』은 중국 역사에서 정치의 귀감이 될 만한 군주의 언행, 사실 등을 뽑아 만든 서적이었다. 이 서적은 세종이 직접 정인지에게 편찬을 지시하였고, 책의 이름 역시 직접 내려준 것이었다. 세종은 『치평요람』의 편찬을 정인지에게 맡겼으나, 세종의 아들이었던 진양대군 이유(훗날의 수양대군, 세조)에게도 이 일을 감독하게 할 만큼 주의를 기울였다. 이 작업은 약 4년간 이어져 1445년(세종 27년)에 150권의 규모로 편찬을 마치게 되었다. 『치평요람』은 세종 이후 군주들도 경연 등을 통해 애독하는 책이 되었으며, 특히 인조, 효종, 영조 등이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한편 정인지는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깊숙이 간여하였다.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작성자와 작성연대를 알 수 있는 문자로, 조선의 높은 음운학 수준을 보여주는 결과물이었다.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 25년) 28자의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져 훈민정음이란 명칭으로 반포하였다가, 1446년(세종 28년) 어제를 붙이고 창제의 원리, 초성과 중성, 종성의 개념과 내용을 밝힌 이후 정인지의 서문을 붙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훈민정음』을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또 정인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는데 1445년(세종 27년)에 완성하여 세종에게 찬진하였다. 『용비어천가』는 총 125장의 시로 조선의 건국과정을 노래한 악장으로서, 세종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중국의 고대 성왕들부터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노래한 이후,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이자춘](桓祖) 등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의 공덕을 칭송한 이후 태조와 태종의 치적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가의 본문은 정인지 외에도 안지(安止), 권제(權踶)등이 지었고,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이 그에 주석을 달았다. 원문인 훈민정음본 외에도 한문시로도 만들어졌으며, 음악을 붙인 악보로 『세종실록』에 부록으로 실리기도 하였다.

1449년(세종 31년)에는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곧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 해 세종이 사망하고 문종이 즉위하였다. 세종의 능은 영릉(英陵)인데, 영릉에 세워진 신도비문을 정인지가 작성하였다. 태조의 신도비문은 권근(權近)이, 태종의 신도비문은 변계량(卞季良)이 작성하였던 전례에서 보듯이 죽은 국왕의 비문을 작성하는 것은 당대의 문장가이면서 생전의 왕과 관계가 깊은 노신들이 주로 맡았던 일이었다. 특히 세종 이후에는 국왕의 능에도 신도비를 세우지 않도록 결정함으로서 영릉의 신도비는 조선 국왕의 마지막 신도비이기도 하였다.

문종이 즉위한 이후 정인지는 좌참찬에 제수되었다. 1451년(문종 1년)에는 수양대군 및 김종서와 함께 『신진법』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본래 조선의 진법은 정도전이 최초로 만든 이후, 세종대 초반 변계량에 의해 한 차례 개정을 거친 것이었다. 진법이란 군대를 편제하는 방법, 군사를 지휘하는 신호체계, 진(陣)의 종류와 진을 만드는 방식, 군사 훈련 방식 등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진법은 변계량의 진법의 주요한 내용은 계승하면서 세부적 내용이 변화하였던 것인데, 그 중에서도 군사 훈련과 관련된 내용은 크게 변화하였다. 특히 문종대에서 세조대는 군사체제의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시점이었으므로, 이러한 진법의 변화는 향후 군사제도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한편 1452년(문종 2년)에는 김종서(金宗瑞)와 더불어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지휘하여 완성하였다. 고려사의 편찬은 국초 태조대부터 꾸준히 시도되었다. 그러나 편찬자마다 개인적인 시각이 너무 투영되어 공정성을 잃은 역사서가 되거나, 반대로 사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어 소략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문제점을 통감한 세종이 김종서와 정인지에게 고려사를 정리하여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 결과가 1451년(문종 1년) 편찬되어 현재 전하는 『고려사』였다. 다음해 『고려사』가 기전체로 되어 있어 열람이 어렵다는 이유로 편년체로 바꾸고 내용을 추린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출간으로 국초부터 50년 이상 지속되었던 전대 왕조 역사에 대한 정리 작업은 일단락을 맺을 수 있었다.

정인지는 『고려사』 외에도 조선초 국왕들의 실록편찬 사업에도 깊이 간여하였다. 『태조실록』의 증보작업에 참여하였고,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세종실록』 편찬 시에는 세종대 이루어진 지리지, 오례(五禮), 악보, 칠정산 등의 편찬물들을 실록에 어떻게 기입할 것인가가 쟁점이 되었다. 즉, 본래 편년체로 기록하는 실록의 특성에 따라 각 기록이 이루어진 날짜에 수록할 것인가, 아니면 이후 부록의 형태로 따로 권말에 기입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당시 실록 편찬의 총책임자는 김종서였는데, 김종서는 편년체 기록 방식이 옳다고 여겼으나, 정인지는 권말에 기입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결국 현존하는 실록에서는 정인지의 방식대로 권말에 부록으로 지리지와 오례, 악보, 『칠정산』등이 삽입되었다. 특히 논의과정에서 김종서는 정인지와 의견을 달리 하지만, ‘정인지가 문한(文翰)의 직책을 맡고 있어 그의 뜻을 어기기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세종대부터 국가의 주요 편찬사업에 몸담았던 정인지의 식견이 어느정도였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문종의 사후 단종이 즉위하자 정인지는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단종의 사후 국정 운영의 주요한 권한은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등이 자리잡은 의정부에 귀속되었다. 당시에는 크고 작은 건설공사가 여러 차례 행해졌는데, 이때마다 국가의 병력을 끌어다가 건설 현장에 투입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설공사는 정분(鄭苯), 민신(閔伸), 이명민(李命敏)등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의정부 대신들이 있었다. 병조판서인 정인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여 병력동원에 반대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건설공사가 차질을 빚자 김종서는 그를 정2품인 병조판서에서 종1품인 판중추원사로 승진시켜 버렸다. 판중추원사는 비록 직급은 병조판서보다 위일지 몰라도 실제 통솔하는 병력이 없는 한직이었다.

단종 당시 이미 김종서, 황보인 등과 정인지는 서로 정치적인 입장이 달랐던 것이다.

반면 수양대군과 정인지는 세종대 여러 편찬 작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돈독한 사이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이 발생하고 수양대군이 국정을 장악하자 정인지는 정난 2등 공신에 책봉되었고, 1455년(세조 1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좌익 2등공신에 책봉되고 영의정부사로 승진하였다. 또 세자를 교육하는 세자사(世子師)를 겸임하기도 하였다. 세조대 정인지는 줄곧 높은 지위를 유지하면서 국정 원로의 지위를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국왕 즉위 이전부터 막역한 사이였던 세조에 대하여 정인지는 몇 차례 직언과 취중 실수를 하면서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이 되기도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세조가 복세암(福世庵)이란 암자를 세우려고 하자 정인지는 취중에 이에 대해 반대하였다. 세조는 왕자시절부터 불교를 신봉하고 스스로를 호불군주(好佛君主)라고 일컬을 만큼 열렬한 불신도였다. 반면 정인지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였다. 그러나 정인지는 세조의 앞에서 만큼은 불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는데, 술에 취하자 유학자의 입장에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언설을 쏟아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세조는 매우 불쾌함을 드러내면서 정인지를 영의정부사에서 해직시켰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다시 그를 복직시켰으며, 예전과 같이 대우하였다.

정인지가 취중에 실수한 일은 비단 이 때뿐만이 아니었다. 세조와 술자리에서 세조를 ‘너’ 라고 칭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직 왕위에 있는 세조를 ‘태상왕(太上王)’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수들은 경우에 따라 모두 모반이나 반역죄에 해당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런 정인지의 실수에 대해 세조는 불문에 붙일 것을 명하거나, 가벼운 주의로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세조는 정인지가 가진 재주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아꼈던 것이다.

1468년(세조 14년)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정인지는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의 지위에 올랐다. 원상이란 국가의 원로급 대신들을 임명하여 돌아가면서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 출근하여 업무를 처리하도록 한 것이었다. 때문에 원상은 연륜이나 경험 면에서 여타의 재상보다도 훨씬 우월한 이들이었다. 한편 예종이 즉위한 해에 남이의 옥(南怡-獄)가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는데 공이 있다하여 익대 3등 공신에 봉해졌고, 다음해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즉위하자 왕위 계승에 공이 있다는 명분으로 좌리 2등 공신에 봉해졌다. 이로서 정인지는 모두 다섯 차례나 공신으로 책봉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성종 즉위 이후 정인지는 국가의 최고 원로로 대우받았다. 하동부원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영경연사의 지위에 올랐다. 1478년(성종 9년)에는 성종이 당시 국가의 원로대신을 삼로오경(三老五更)으로 봉하고 이에 대해 예를 올리고자 하는 의식 시행이 검토되었다. 삼로오경은 중국의 고사를 본뜬 행사로서 국왕이 직접 국가의 원로대신에게 예를 표함으로서 국왕의 덕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다. 이 행사는 여러 사람의 논의 끝에 정인지를 삼로에, 정창손(鄭昌孫)을 오경에 봉하고 의식을 진행하도록 결정하였고, 예조로 하여금 행사 진행에 필요한 의주(儀註)까지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인지를 삼로에 봉하자는 논의는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정인지가 가산을 불리는데 골몰하였다는 이유였다. 본래 유교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은 인품 수양에 정진하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고, 문학으로 여가를 보내는 것이었다. 반면 가산을 늘리거나 벼슬을 탐하는 행위는 유학자로서 본분을 잊은 행위로 여러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었다. 정인지는 본인이 삼로에 배향되지 못하는 이유가 가산을 증식한 이유임을 알고, 이를 해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 의하면 정인지는 여러 차례 공신의 은전을 받아 그로 인하여 재산이 늘었을 뿐 특별히 재산을 증식하려 노력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기사 밑에 사평에서는 정인지의 의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의 부유함에 대한 세간의 이야기를 옮겨 적어 놓고 있다.

삼로로 봉해지는 일이 무효화 된 지 얼마되지 않는 1478(성종 8년) 11월, 파란만장한 생을 뒤로 하고 정인지는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그의 시호는 문성(文成)으로 정해졌고, 무덤은 충청도 괴산에 자리하였다. 그는 매우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문장력을 가진 당대의 학자였다. 때문에 국가의 제도 정비, 편찬 사업에 끼친 공로가 매우 많았다. 성격도 활달하고 호걸스러운 면이 있어 문장을 쓸 때 되풀이하여 고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만년에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재산 문제만 제외한다면, 정인지는 실로 모범적인 관료, 학자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집으로는 『학역재집』이 있다.

3 사후의 평가와 가문의 후손들

생전에 고위직을 역임하고 명망있는 삶을 살았던 정인지는 오히려 죽은 이후 한 차례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성종의 아들로 즉위한 연산군이 그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폐출된 과정을 알게 되었고, 당시 윤씨를 내쫒는데 협력한 관원들을 사후 관직을 박탈하고, 종묘에 배향된 신하들은 모두 신주를 종묘에서 빼도록 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하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들의 묘소에서도 석물까지 모두 철거하도록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정인지는 사후에 그의 명예와 후손들의 입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인지의 신원은 곧 복권되었고, 그의 묘소도 아울러 예를 갖추어 다시 만들어지게 되었다. 철폐되었던 모든 석물은 복원되었고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정인지는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인 정현조(鄭顯祖)는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에게 장가를 들어 부마가 되었고, 익대, 좌리공신에도 참여하여 하성군에 봉해졌다. 둘째인 정숭조(鄭崇祖)도 문과에 급제하고 좌리공신에 봉해졌으며 후에 하남군으로 봉해졌다. 셋째인 정경조(鄭敬祖)는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이후 역임한 관직은 자세하지 않다. 막내인 정상조(鄭尙祖)는 관직에 나아간 기록이 없다. 정인지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후광과 본인의 과거 급제, 그리고 왕실과의 혼인 등으로 인하여 대부분 입신양명하였으나, 이후 손자대에는 특별한 관원을 배출하지 못하여 명문가로 발돋움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정인지와 10촌뻘 되는 정여창(鄭汝昌)이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더불어 전국적인 명망을 얻게 되었고, 이후 하동 정씨는 정여창 후손들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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