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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鄭仁弘]

영남 의병장, 왜병을 격퇴하다

1535년(중종 30) ~ 1623년(광해군 15)

정인홍 대표 이미지

내암 정인홍 선생 선대배위및 후손증직 교지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남명 조식(曺植)의 수제자,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의병장, 북인 정권의 영수, 선조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기 북인의 정치적, 학문적 수장으로서 정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2 가계와 학통

정인홍의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증조할아버니는 정자(正字) 정희(鄭僖), 할아버지는 언우(彦佑), 아버지는 건(倫), 어머니는 진주 강씨이다. 1535년(중종 30) 경상남도 합천 상왕산(象王山) 아래 남사촌에서 태어났다.

1550년(명종 5) 15세의 나이로 당시 경상우도의 대표적인 학자로 칭송받고 있던 조식에게 나아가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顒)·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동문수학하였다. ‘정인홍은 타고난 천성이 효성스러웠고 몸가짐이 강직하고 방정하였다. 젊어서부터 남명선생에게 배웠는데 남명이 큰 그릇으로 여겨 말하기를 “덕원이 있으니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인홍 역시 남명을 존경하고 따랐다. 독실하게 학문에 전념하여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는데 밤낮을 계속하여 열심히 노력하였다.’ 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조식의 허여함을 받아 그 수제자가 되었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칼을 턱 밑에 괴고 혼매한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이르러 방울은 김우옹(金宇顒)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심법(心法)을 전한다고 한다.

조식에게서 방울을 물려받은 김우옹 또한 ‘(조식은) 사람에게 정신과 기개를 가르쳐 흥기된 자가 많았는데 최영경·정인홍 같은 사람들이다’고 하여 정인홍을 높이 평하였다.

또한 그는 조식의 절친한 벗인 성운(成運)에게도 나아가 배웠다. ‘젊어서 조식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 분 모두가 스승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남인과 북인의 정치적 대립만큼이나 퇴계학과 남명학 간의 학문적 대립 또한 심각하였는데, 퇴계학의 입장에서는 ‘이황(李滉)의 학문은 한결같이 주자를 표준삼아 논변과 저술에 크게 발명함이 있었던’ 반면 ‘조식의 학문은 의리를 강론하는 것을 크게 꺼려하였으니 이는 주자가 육씨(陸氏)를 공격한 바였고, 경(敬)을 논함에 심식(心息)이 서로 의지하는 것을 요체로 삼았으니 이는 도가의 수련법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유가에서는 일찍이 이러한 공부의 과정이 없었다.…(남명이) 절개가 높고 기상이 곧아 자부심이 지나쳤으나 실상은 한번도 학문의 공부에 깊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이황이 높고 뻣뻣한 노장으로 지목하였다’고 바라보았다. 이는 남인쪽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퇴계학과 남명학의 학문적 성향 차이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한편 정인홍의 학문 또한 조식의 학문 성향을 그대로 잇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조식이 칼을 물려주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식의 추상같이 맑고 강인한 기질은 정인홍에게로 그대로 전수되었다. ‘(정인홍은) 모가 나고 날카로워 사람들과 화합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의(義)를 숭상하고 사(邪)를 미워하는 마음이 시종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여 논의할 즈음에는 칼로 끊은 듯이 하고, 남에게 의롭지 못한 행실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마치 노예처럼 비루하게 여기고 원수처럼 미워하였으며 비록 평소 알고 지내던 명유석사로 불리는 자라도 조금만 아부하고 구차스레 화합하려는 태도가 있으면 절대로 함께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꺼리고 병통으로 여겼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잠시 사헌부에 있었을 적에는 백료들이 숨을 죽이었고 여러 차례 주현을 맡았을 때에는 고을 사람들이 경외하였다. 비록 물러나 있을 때에도 강개하게 나라를 걱정하여 난리가 나자 창의하였으되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니 절조와 풍재가 남이 따르기 어려운 바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3 선조 전반기 동인·북인으로서의 정치 활동

조식문하의 제일인자로 이름을 떨치던 정인홍은 1573년(선조 6) 38세 되던 해 조목(趙穆)·이지함(李之菡)·최영경(崔永慶)·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천거되어 6품직 벼슬에 나아가게 된다.

당시 조정의 명사 이이(李珥)는 정인홍의 빼어난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석담일기』에 ‘인홍은 조식의 뛰어난 제자로 강직하고 엄격하며 효제에 독실하여 높은 행실로 추천되어 6품관을 제수받았다’고 하였다.

1576년(선조 10) 지평, 1580년(선조 13) 장령으로 승진하였는데 대체로 ‘사람을 탄핵할 때 강한 세력을 피하지 않고 금령(禁令)을 엄하게 펴서 기강이 자못 숙연함을 깨닫게 하였다’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선조대 사림정치가 진전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림세력 내에서의 세력 분기 현상이 생겨나 동·서·남·북 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식의 문인들인 남명학파는 북인의 당색을 띠게 되었는데, 조식의 문인중 두각을 드러내고 있던 정인홍은 자연스럽게 북인의 영수격 존재가 되었다.

1575년(선조 8년) 무렵 이즈음 크게 성장한 사림세력 내에서 척신정치 척결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대결 구도로 드러났다.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인 심의겸은 명종대 척신정치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하였고 김효원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새롭게 등장한 사류였기에 이들의 대립은 자연스럽게 척신정치 척결에 대한 입장 차이로 전화하게 되었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은 서인으로 불리었는데 상대적으로 노성한 부류였고 학통적으로는 이이·성혼(成渾)의 문인들이 많았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측은 동인으로 불리었는데, 상대적으로 연소한 부류였고 학통적으로는 서경덕(徐敬德), 이황, 조식의 문인들이 많았다.

동인은 학통 면에서 서경덕, 조식, 이황 등 상대적으로 여러 계열이 뒤섞여 있었기에 그 안에서 학문적 정치적 입장 차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동인의 영수 역할을 하던 이발(李潑)은 서경덕학파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조식에게 배우기도 했다. 이에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 최영경(崔永慶) 등 조식 계열과는 친밀하였으나 유성룡을 위시하여 이황 계열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찍이 유성룡과 이발이 틈이 있었는데, 유성룡 일파는 김성일·이성중(李誠中)·이덕형(李德馨) 등이고 이발 일파는 정여립(鄭汝立)·최영경·정인홍 등으로 서로 배척하였지만 형적은 드러나지 않았다’는 기록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동·서의 대립과 갈등은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로 폭발하게 된다. 동인 중에서도 이발계였던 정여립은 중앙에서 서인과 불화하다가 귀향한 후 대동계(大同契)라는 조직을 만들어 세력을 전국적으로 확장하였는데, 서인들은 이를 역모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옥사를 벌였다. 강경 서인인 정철(鄭澈)이 위관이 되어 옥사를 엄히 다스려 기축옥사 이후 3년간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천여인에 이르게 되었다.

기축옥사로 정인홍은 삭탈관직되었을 뿐아니라 동문으로 정치적 동지였던 최영경을 잃었다. 서인들은 정여립 일당의 공술에서 나왔던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인물이 동인 최영경이라고 무고하였다. 이로 인해 최영경은 옥사하였는데, 당시 정적 정철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인해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결국 이듬해 이 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졌고 1591년(선조 24)에는 최영경이 신원되었다.

기축옥사를 통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발계, 곧 서경덕·조식계에서는 이후 서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고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이황계에서는 서인에 대한 입장도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는데 이러한 입장 차이로 인해 서경덕·조식계는 북인(北人), 이황계는 남인으로 재차 당색이 나뉘게 되었다. 이처럼 선조 전반기 분당 과정에서 조식계는 애초 동인이 되었다가 기축옥사를 계기로 북인이 되었는데, 정인홍은 그 중심에 있었다. 특히 기축옥사를 겪으면서 더욱 과격한 강경론자로 선회하게 되었다.

4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정인홍은 5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향리 합천을 근거지로 하여 대규모의 의병을 일으켰다. 경상도 일원에서 초유사(招諭使)로서 의병들을 모집하였던 김성일(金誠一)에 의하면 ‘근일 고령의 전좌랑 김면(金沔), 합천의 전장령 정인홍, 현풍의 전군수 곽율(郭慄), 전좌랑 박성(朴惺), 유학 권양(權瀁) 등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다. 인홍은 정예병이 거의 수백 명이며 창군(槍軍)은 수천 명이나 됩니다.’ 고 하여 정인홍의 휘하에 정예병 수백 명과 창군 수천 여명이나 되는 병력이 포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만큼 정인홍이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해 6월 진주목사를 거쳐 11월 영남 의병도대장에 제수되었으며 1593년(선조 26)에는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를 방어, 맹활약을 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62세의 나이로 다시 창의하였다. 이처럼 정인홍은 임진왜란시 경상우도 의병활동의 중핵을 담당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명망은 더할 수 없이 높아졌고 이후 북인세력이 정치적 우세를 점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5 임진왜란 후 선조말 대북(大北)으로서의 정치 활동

임진왜란이 끝나자 1602년(선조 35) 그는 전공으로 대사헌·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는데 과격한 언론을 행사하여 반대당인 서인과 남인을 공격하였다.

1602년(선조 35) 대사헌으로서 서인의 영수 성혼을 공격하였는데, 기축옥사시 성혼의 행적에 대해 ‘정철을 몰래 사주하여 고현(高賢)을 죽이고 사림을 더럽혀 욕되게 하였으니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지시하여 우리 강토를 유린한 풍신수길(豊臣秀吉)과 대략 동일하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또한 남인의 영수 유성룡과도 사이가 매우 나빴으니 ‘(정인홍은) 유성룡을 매양 공손홍(公孫弘 : 한 무제때 승상으로 겉은 관대한 듯 하지만 속마음은 악독한 인물)이라 배척하였고 유성룡 역시 정인홍의 속이 좁고 편벽됨을 미워하니 서로 공격하는 것이 물과 불 같았다’는 기록, ‘(정인홍이) 유성룡과 크게 맞지 않아서 양파의 문인들이 서로 배척하므로 남북의 당이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말 정인홍의 과격한 언사는 많은 물의를 일으켰지만 선조는 ‘혹자는 과격하다고 하고 혹자는 말에 병통이 있다고도 하지만 그 사람은 다른 이와 달리 빌붙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굳센 절조는 백 번 꺾으려 해도 꺾지 못할 것이다’고 평하였다.

이렇듯 선조말 정인홍은 북인의 영수로서 반대당인 서인·남인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였고, 결국 유성룡이 이끄는 남인세력이 실세한 이후 홍여순(洪汝諄)·이산해(李山海) 등과 함께 정국을 주도, 북인 우위의 정국을 이끌어 내었다. 이렇듯 북인세력이 강해지면서 북인 내에서도 분당이 생겨나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홍여순(洪如諄)의 대사헌 임명을 둘러싸고 정인홍·이산해(李山海)·홍여순은 대북이 되고 유영경(柳永慶)·김신국(金藎國)·남이공(南以恭)이 소북이 되었는데 1604년(선조 37) 무렵이 되자 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소북이 우세해지게 되었다.

이후 대북과 소북은 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게 된다. 1606년(선조 39) 선조와 선조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사이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였는데 그는 선조의 유일한 적자로서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선조의 서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지 오래였지만 선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선조는 점차 영창대군으로의 세자 교체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유영경 등 소북 세력은 선조의 뜻에 부응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지지하였고 정인홍·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 등 대북 세력은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이 와중에 1608년(선조 41) 선조가 광해군에게 전위하고자 하자 유영경이 비밀히 아뢰어 막았다. 이는 선조가 세자를 영창대군으로 바꾸어 세울 의사가 있음을 알고 선조의 내심을 쫓으려 한 것이었다.

이때 정인홍은 향리 합천에서 상소를 올려 유영경을 강하게 탄핵하였다.

대북에 대한 공격 기회를 잡은 소북세력은 다시 정인홍을 공격하였고 정인홍을 위시하여 이이첨·이경전 등 대북의 핵심세력은 모두 귀양을 가게 되었다.

6 광해군대 대북정권의 성립과 산림재상 정인홍

이렇듯 광해군과 대북의 지위가 극도로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된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선조가 승하하게 되자 광해군이 조선의 제15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정인홍과 대북의 핵심 인사들은 곧 유배에서 풀려났고 정인홍은 바로 대사헌에 기용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강력한 지원을 배경으로 하여 소북세력을 일거에 몰아내고 대북정권을 수립하였으며 광해군대 대북정권의 핵심인물이 된다.

정인홍이 광해군대 정국의 핵심인물로 등장한 것은 무엇보다 임진왜란에서의 공훈, 그리고 선조 치세말 정국에서 불안한 위치에 놓여 있던 광해군에 대해 끝까지 의리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후 정인홍은 광해군 15년간의 치세동안에 서울이 아니라 향리 합천에 머물면서 산림의 위치에서 광해군을 돕고자 하였고 광해군의 묵인하에 이에 그의 문인이자 정치적 대리인격으로서 이이첨을 중계자로 하여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1612년(광해군 4) 우의정, 1614년(광해군 6) 좌의정, 1618년(광해군 10)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광해군은 치세 내내 주요한 국정 현안을 정인홍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정인홍의 견해는 대부분 수용되었다.

정인홍은 광해군대 왕권 안정을 가장 우선시하였고 이에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들은 철저히 처단하고자 했다. 광해군 즉위초 임해군 역모사건에서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문제가 된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철저히 처단하자는 입장이었다.

‘(임해군 역모사건에 있어) 대신들도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 살려주라고 하여 명예를 취하였는데, 정인홍은 은혜를 베풀어 살려주라고 한 것을 큰 죄라고 하였고…또 붕당이 나라를 그르친다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은혜를 베풀어 살려주라는 설이 대금(大禁)이 되어 영창대군에 대한 논의에서는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이처럼 광해군의 왕권을 안정시킨 위에서 대북정권의 사상적 정통성을 강화하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이는 그의 스승인 조식의 학문과 사상을 재평가하고 높이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1610년(광해군 2) 조선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동방오현(東方五賢 :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이황)이 문묘에 종향되었다. 정인홍의 스승 조식은 이황과 동시대에 활동한 유학자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종향되지 못하였는데, 여기에는 평소 이황학파와 조식학파간의 대립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황은 조식의 학문을 도가풍이며 성리설에 깊이가 없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정인홍을 위시한 조식학파 역시 이황이 절조 면에서 조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바라보면서 두 문파간에 큰 대립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앞서 1605년(선조 38) 정인홍이 지은 『발남명집설(跋南溟集說)』을 둘러싼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간의 대립으로도 드러났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1610년(광해군 2) 정인홍은 이미 종향이 결정된 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의 부당함을 상소하니 이른 바 ‘회퇴변척(晦退辨斥)’이다. 이때 그의 주장의 핵심은 퇴계학의 입장에서 남명학을 바라보는 입장을 문제삼은 것이었다. ‘일찍이 고 찬성 이황이 조식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뻣뻣한 선비는 중도(中道)를 요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또 성운에 대해서는 청은(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작은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으니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 여러 해이다’고 하였다.

그가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자 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특히 성균관 유생들은 그를 유적(儒籍)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였으나, 광해군은 그를 비호하였고, 1614년(광해군 6) 정인홍이 조식에게 영의정을 증직할 것과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자 영의정직을 증직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정해 내렸다.

이처럼 정인홍은 대북정권의 학문·사상적 정체성 정인홍은 국정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 :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였으니 조선후기 산림의 정치 행태의 전형에 다름아니었고 이에 조선후기의 사대부들은 정인홍을 산림의 원형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곧 ‘광해조 때 이이첨이 용사하여 정인홍을 삼공(三公)의 서열에 두고, 큰일이 있으면 언제나 서로 화응하여 유현의 여론을 빙자하면서 자기들의 사욕을 이행하였다. 이로부터 당국자들도 덩달아 그들을 본받으므로 조정의 판세는 하루아침에 변하여, 산림처사 한 사람을 추대할 때 반드시 영수로 칭하고 비록 어질고 간사한 것이 다르더라도 산림처사라는 구실을 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인홍의 정치관의 핵심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보민(保民) 정치에 있었다. 특히 광해군 즉위 후에는 국왕이 군자당(君子黨)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가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요소는 철저히 척결하여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정인홍이 정국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 조선사회는 붕당의 형성과 함께 붕당정치가 전개되는 시점이었다.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남인과 북인, 소북과 대북의 분당을 거치며 정인홍은 반대 당파와의 대립에서 강경노선을 견지하였으며, 광해군 즉위 후 대북이 집권하면서 반대당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비타협적인 입장을 보였다. 정인홍은 구양수의 [붕당론(朋黨論)]을 인용하여 군자, 소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이 속한 대북이 군자당이라는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정인홍은 광해군의 왕권안정이라는 최상의 목표만을 위해 강경하고 비타협적으로 정국에 임했기에 여론의 불만을 초래했고, 심지어는 자파 문인들이 이탈하는 상황까지 맞이하였던 것이다.

7 인조반정과 정인홍의 죽음

이처럼 정인홍은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대북정국의 정신적 지주이자 실세로서 활약하였다.

하지만 그의 나이 88세가 되던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 정권이 무너졌다. 그 결과 대북정권은 붕괴되었고, 정인홍 역시 참형을 면치 못하였다.

처형 이후 서인과 노론 주도의 정국이 전개되면서 정인홍은 조선후기 내내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 내내 정인홍이 신원되지 못한 이유는 그의 강직한 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의 태도는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왕에 대한 의리와 충성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성과 과격성, 반대세력을 조금도 용인하지 않는 비타협성은 반대세력을 결집시켜주는 빌미를 제공해 주고 만 것이다.

‘그가 패륙(敗戮)됨에 미쳐서는 그의 문도(門徒)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오히려 비분강개[悲歌慷慨]하여 한결같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이 때문에 합천(陝川) 등지 여러 고을에는 관면(冠冕)이 대대로 끊어지고 사풍(士風)이 떨치지 못했으니, 이는 인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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