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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鄭齊斗]

양명학, 강화학파의 태두

1649년(인조 27) ~ 1736년(영조 12)

정제두 대표 이미지

정제두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정제두는 1649년(인조 27) 서울의 반석방(盤石坊)에서 진사 정상징(鄭尙徵)과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로, 정제두의 11대조는 고려 말의 절의지사로 잘 알려진 정몽주(鄭夢周)였다. 그의 증조부 대까지는 한림, 참봉 등의 벼슬을 하며 중앙 정계로 진출하지 않았으나, 조부인 정유성(鄭維城)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의정에까지 이르며 현종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부친은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에 일찍 사망하여 특별한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였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읜 정제두는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비록 아버지는 일찍 여의었으나 조부 정유성은 말년까지도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거물이었으며, 종형(從兄)인 정제현(鄭齊賢)은 효종의 부마였을 정도로 가세는 유지되었다. 이처럼 할아버지의 영향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제두는 10세 때에 송준길(宋浚吉)을 만나 재능을 칭찬받는 등 어린 시절에는 큰 굴곡이 없었다.

16세가 되던 해인 1664년(현종 5)은 그의 홀로서기가 시작된 해였다. 이 해에 할아버지 정유성과 백부 정창징(鄭昌徵)이 모두 사망하였으며, 종형인 정제현 역시 사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제두는 할아버지의 장례를 주관하여 치르게 되었다. 이듬해 부인 윤씨를 맞이한 정제두는 본격적으로 벼슬과 학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2 중년: 홀로서기, 명성을 쌓다

1668년(현종 9) 정제두는 처음으로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4년 뒤인 1672년에도 다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때에도 전시(殿試)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 때 아우인 정제태(鄭齊泰)가 이미 과거를 통해 명성을 날릴 조짐이 있었기에, 정제두는 과거에 대한 뜻을 포기하고, 평생 학문에 매진하기로 결심하였으며, 이후 조정의 명에 의해 관직에 임명되기는 하였으나 다시는 전시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후로 학문에 전념한 정제두는 그의 평생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박세채(朴世采)에게서 본격적인 수업을 시작하였다.

박세채 뿐 아니라, 역시 그의 선배 세대이자 훗날 소론의 중심인물이 된 윤증(尹拯)과도 학문적인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박세채와 윤증과의 교류는 그의 학문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사상과 학문세계는 비록 정제두와는 상이한 측면이 있었다. 특히 양명학(陽明學)의 주장에 깊이 감화되어 이를 연구하였던 정제두와는 달리, 그의 스승들은 양명학에 비판적인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박세채의 경우 양명학에 심취한 정제두를 위해 따로 글을 지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宋時烈)로 대표되는 기성학자들이 주자학의 기본 입장과 텍스트 해석에 충실히 입각한 학문 경향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박세채 등은 주희의 설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맹신하지 않고 의심할 부분이 있을 경우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학풍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스승들의 학문태도는 정제두가 주자학적 일변도인 조선에서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양명학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학문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1671년(현종 12) 첫 번째 부인 윤씨가 사망하였으며, 이듬해에 서한주(徐漢柱)의 딸 남양 서씨와 혼인하였다.

이처럼 점차 학문의 깊이와 폭을 쌓아가던 정제두였으나, 오히려 그의 학문적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를 천거하려는 움직임 역시 많아졌다. 평생 학문에 매진하고자 했던 정제두의 뜻과는 달리, 그는 평생에 걸쳐 서른 한 차례나 벼슬에 천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천거는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한 1680년(숙종 6)부터 본격화되었다. 김수항(金壽恒)에 의해 처음 벼슬에 천거된 그는, 1682년에는 종부시(宗簿寺) 주부, 1684년에는 공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계속되는 지병으로 인하여 모두 벼슬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사양하거나 곧 체직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1688년(숙종 14)에는 평택 현감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나, 이듬해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문묘에서 출향되자 이에 반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문초를 겪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후 정제두는 숙종[조선](肅宗) 말년까지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거나, 부임 며칠이 되지 않아 병으로 체직되는 등 뚜렷한 관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46세 되었던 1694년(숙종 20)부터 화갑이 되던 1709년까지의 시기는 노년을 바라보는 그에게 가혹한 시기였다. 1694년에는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이듬해에는 스승인 박세채의 상을 치러야 했다. 1698년에는 동생 정제태가 사망하였고, 1700년에는 둘째 부인 서씨마저도 세상을 떠났고, 1708년에는 벗인 박심(朴鐔)의 곡을 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종손마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상심하였으며, 이에 그의 호가 되기도 한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그를 유명하게 한 이른바 ‘강화학파’의 연원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3 말년: 국왕의 총애와 임금의 완성

강화에 은거한 이후에도 그에 대한 천거는 끊이지 않았다. 1709년에는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그를 기용할 것을 천거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어, 호조참의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무려 네 차례나 상소를 올려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처럼 끊임없는 관직 제수, 그리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거나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다시금 벼슬을 내리는 모습은 이미 정제두가 그 학문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조야의 추천이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

71세 때인 1719년(숙종 45)에는 71세 이상의 노인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예에 따라 이곳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자급 역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게 되었다. 숙종 말년에는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직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조선](景宗)이 즉위한 이후 정제두의 관직은 더욱 높아져서, 1722년(경종 6)에는 언관의 최고 요직 중 하나인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조의 장관 자리인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조판서는 인사의 최고 요직의 핵심 관직으로, 여기에 천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제두의 명망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제두는 경종대 내내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관직활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점은 영조(英祖)가 즉위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영조는 그를 수차례 관직에 제수하였으나 정제두는 지속하여 이를 사양하였고, 관직에 나아갔다 하더라도 이내 고령과 신병으로 체직되는 경우가 잦았다. 이와 같이 관직에 집착하지 않고 초야에 남고자 하였던 것은 정제두의 일생 내내 지속되었던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조는 정제두에게 끊임없이 더 높은 직급을 내려주었는데, 그에 따라 그의 벼슬은 우참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그의 양명학적 학풍 역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1711년에 양명학적인 심(心)에 대한 탐구를 담은 『心經集義』를 저술하는 등 기존부터 양명학적 사상을 드러내는 저술을 남기고 있었다.

이후에도 「程門遺訓」, 「中庸說」 등의 저술활동을 이어나가며 자신의 양명학적 체계를 세워나가던 정제두에게 그의 양명학적인 성향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게 된다. 사헌부에서 그의 학문이 양명학적 색채를 띠고 있고 정통 주자학을 배척하였다고 비난한 것이다.

영조는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지만, 정제두의 그러한 학문적 경향은 이미 예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이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스승인 박세채 역시 정제두가 양명하게 빠진 것을 비판하였으며, 최석정(崔錫鼎) 역시 정제두가 양명학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을 비판하는 등, 조선사회에서 정제두의 학문은 쉽사리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제두는 끝내 이와 같은 사상적 경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신으로서 그에게 원자, 훗날의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맡길 정도로 두터웠던 영조의 신임은 비록 그가 조선의 주류 사상계와는 다른 노선을 걷는다 할지라도 지나친 모함을 피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처럼 말년까지 학문활동을 지속하였으며, 세자보양관에 임명되는 등 말년까지 국가의 노신이자 산림의 거두로 활동하던 정제두는 1736년(영조 12) 8월 11일, 88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서거하였다. 정제두는 사후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제두 사후에도 양명학은 여전히 주류가 되지 못한 채, 그의 아들 정후일(鄭厚一), 윤순(尹淳), 이광사(李匡師) 등을 통해 가학으로 계승되어져 나갔다. 조선 당대에는 양명학 배척의 풍조가 있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근대 이후 그의 양명학적 사상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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