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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이산, 왕정체제를 강화하다

1752년(영조 28) ~ 1800년(정조 24)

정조 대표 이미지

정조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탄생과 어린 시절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둘째 아들로 1752년 9월 22일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산(祘)이고, 자는 형운(亨運)이다. 정조가 탄생하기 전 꿈에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상으로 들어왔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어두었는데, 왕이 태어나기 하루 전에 큰 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자욱해지더니 몇 십 마리의 용이 하늘로 꿈틀거리며 올라가는 형상이 보였다고 한다. 할아버지 영조(英祖)는 그해 봄에 첫 손주인 의소세손을 잃고 상심했었는데, 새로 태어난 원손의 용모를 보고 자신을 닮았다며 기뻐하고, 그날로 원손으로 칭호를 정했다.

정조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은 정말 어린 아이가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놀이면 놀이, 공부면 공부 모두 당시인들의 감탄을 자아낼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말도 배우기 전에 문자를 보면 좋아했고, 효자도(孝子圖)나 성적도(聖跡圖)와 같은 감계를 담은 그림들을 좋아했으며, 공자처럼 제물을 차려놓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사치스러운 의복이나 노리개붙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첫 돌이 돌아왔을 때 수많은 돌잡이 거리들을 거들떠도 안보고 책만 붙들고 보았다.

1754년 8월에 원자 보양청을 설치하고 원손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고, 1755년 봄에 소학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영조가 그 싫증내지 않고 강하는 모습을 보고 하늘이 우리에게 복을 내린 것 같다며 연신 감탄했다고 한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책을 읽어 혜경궁이 건강을 염려하자, 그 때부터 남모르게 등불을 가려두고 세수하고 글을 읽을 정도로 공부를 좋아했다.

1759년 2월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윤6월에 명정전에서 책봉의식을 거행하였다. 영조가 소학의 구절을 직접 써서 내리면서 세손에 대한 기대를 표현했다. 1761년 영조를 모시고 처음 거둥했을 때의 일화이다. 영조가 운종가에서 거리에 가득한 도성 사람들을 본 후 그들이 세손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자 세손은 ‘선하기를 바란다’고 하였고, 또 영조가 선을 행하기 쉬운지 어려운지 묻자 ‘선을 행하기가 쉽다’고 답하였다. 영조는 정조가 너무 자신감이 지나치지 않은가 염려하였는데, ‘쉽다고 생각해야 용감하게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영조가 기뻐했다고 한다. 이해 3월에 입학의례를 거행할 때에는 성균관 박사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을 하여, 구경하던 이들이 성인이 났다며 감탄했다. 다음해 2월 청풍 김씨 김시묵(金時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2 아버지의 죽음을 딛고 왕위에 오르다

1762년 윤5월 11살의 왕세손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참담함을 겪어야 했다. 경희궁에서 영조를 모시고 있으면서 낮 동안에는 좌우를 떠나지 않았고, 밤에는 영빈(暎嬪)의 곁에서 위로했다. 1764년 영빈의 병이 위독했을 때에는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 혜경궁과는 떨어져 지냈는데,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들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수저를 들었다고 한다.

영조는 1762년 7월 명나라의 전례를 따라 세손을 동궁으로 삼고 춘방(春房)과 계방(桂房)을 설치하였고, 경연이나 빈대에 시좌하여 학문과 정무를 배우도록 했다. 때때로 영조가 동궁에게 경전의 뜻이나 실제의 일에 대응할 방안을 물으면, 번번이 감탄할 만한 대답을 내놓아 할아버지를 흡족하게 했다. 1764년에 영조는 할아버지에게서 손자로 직접 계승시키지 않고, 효장세자[진종](孝章世子 眞宗)의 후사로 삼아 계승시키겠다고 방침을 바꾸었다. 정조가 즉위한 후 주변의 말을 듣고 사도세자를 추숭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영조는 여러 차례의 조치를 통해 왕세손으로의 계승을 확고하게 했지만, 왕세손이 즉위했을 경우 자신 및 자기 정파에 미칠 파장을 염려하며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1774년 11월 영조가 노쇠하여 정무를 보기 어려운 상황을 말하고 왕세손에게 대리청정 시키고자 하였다. 홍인한(洪麟漢) 등이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서명선이 상소하여 대리청정을 막아온 홍인한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고, 12월에 경현당에서 대리청정의 조참을 행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유서(諭書)와 은인(銀印)을 내렸고, 정조는 즉위 후에도 이를 앞세우고 행차하여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이어준 뜻과 은혜를 기억하고자 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정조는 왕이 될 자격 자체를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영조가 세손을 동궁으로 삼아 계승시키려 한 이후에도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며 끝끝내 이를 방해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정조는 이러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서연도 착실히 해나가고 영조의 지지 속에서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방법도 배웠다.

1776년 3월 10일 정조는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즉위하는 그날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효장세자를 추숭하도록 하고, 동시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종통도 중하지만 아버지의 은혜 또한 끊을 수 없는 것으로 그에 대해 보답하는 도리를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즉위 초반에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들을 제거하고 이 모든 문제가 척리들의 세도에서 기인했다고 보아 다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개혁을 준비해나갔다.

3 규장각과 정조의 정치 개혁

정조가 왕으로 있을 당시 조선은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오래된 현안들이 많이 있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당파의 폐단을 개혁해야 했다. 영조와 마찬가지로 정조는 당쟁으로 갈라진 조정의 화합을 도모하고, 널리 인재를 구하여 그들과 함께 조선의 묵은 문제들을 풀어나가고자 했다. 다만 영조가 여러 당파들이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개진하는 것을 강권적으로 금지시키고 조정의 관직을 고르게 나누어주는 방식의 탕평정책을 썼던 데 비해, 정조는 조선 정치가 오랫동안 존중해 온 사대부의 명의를 더욱 북돋워주고, 이해관계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이들이 국가와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큰 목표 아래에서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정조는 기왕에 정치를 오염시키고, 정치적 권력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쓰는데 앞장섰던 척리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도덕적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사대부들을 중용하고자 했다.

정조의 이와 같은 생각은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규장각 제도는 정조 즉위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1781년(정조 5)에 완비되었다. 창덕궁 후원에 터를 잡아 새로운 전각을 세우고 기왕의 홍문관, 예문관, 사헌부, 사간원이 가지고 있던 명예와 권한을 규장각 각신들에게 부여하였다.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기 위한 연구 및 평가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만들 초기에는 왕이 국가의 공적 기구들이 있는데도 사적인 권력 기관을 만든다는 비판도 있었다. 즉위 초반 유례없는 권한을 부여하며 개혁 정치를 보좌하게 했던 홍국영(洪國榮)이 그 권력을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다가 축출 당하였기에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사인들을 모은다는 의심도 쉬 가시지 않았다. 정조는 자신의 개혁을 주도할 사대부들이 진정한 실력과 명예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고,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하며 제도적으로 이들이 일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주고자 하였다.

규장각에는 당시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내외의 서적들을 고루 갖추어 놓고, 이를 연구하며 조선에 필요한 개혁의 방안을 내놓기를 기대했다. 젊은 신진 관료들을 선발하여 이들과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며, 실력이 있으면 가문이나 당파,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발탁하여 필요한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또한 가장 보기 좋은 활자로 출판하여 조선의 문화적 수준을 과시했다. 또 이들이 왕의 가장 가까이에서 고문과 보좌의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척리들이 가까이 올 여지를 주지 않으려 했다. 정조대 모든 개혁들은 규장각에서의 연구에 바탕하여 규장각을 거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조는 규장각의 각신들과 함께 매년 봄에 내원에서 만나 꽃을 감상하고 활쏘기하고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는데, 척리들만 들어와 놀 수 있던 내원을 사대부들에게 열어줌으로써 이들을 가족과 같이 여긴다는 뜻을 내외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누적된 당파 간의 갈등은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가문의 사적인 원한관계로 얽힌 조정의 관료들은 다른 당파의 사람들과 한 조정에 서는 것을 원수와 한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이라 하여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아직 조정에 들어오지 않은 유생들까지도 서로를 경원시하며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 공격하려 했다. 정조는 모든 사안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의 행적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 옳음에 승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당파 간의 갈등을 봉합해나갔다. 각 당파에서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의리론에 엄정한 이들에게 지위를 주고, 이들이 사안마다 각자의 당인들을 설득하고 조정 안에서 협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원칙을 벗어나 사적인 원한과 공적인 분노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엄격하여 처벌하여 정치를 정상화시키려 했다. 때때로 이러한 의지가 지나쳐 특별한 사안에 대해 금령을 내려 언론을 억압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정조 시대의 조정에서는 정치적으로 가장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노론 뿐 아니라 숙종과 경종, 영조대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패퇴했다고 여겨지는 남인(南人), 소론(少論)들도 등용되어 경륜을 펼칠 수 있었다. 서명선(徐命善), 윤시동(尹蓍東), 김종수(金鍾秀), 채제공(蔡濟恭) 등 다양한 정파의 인물들을 정승에 임명하였는데, 단지 당파를 아우르는데서 그치지 않고 각 정파에서 의리에 투철한 인물들을 등용하였다.

한편 정조의 시대는 기왕의 주자성리학 일변도의 학문에서 벗어나 북학(北學)이나 서학(西學) 등 새로운 학문을 통해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지식인들이 늘어났다. 정조가 중용한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도 서학에 경도된 인물로 공격받기도 했다. 정조는 이러한 사상적 문제들을 주자학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으로 여기고, 한때의 호기심이나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일탈 정도로 치부했다. 서교의 문제를 조선의 유교적 질서를 근본에서부터 허무는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회유하고 가르쳐 고치게 할 수 있다고 하며 보호막을 쳐 주었다.

이에 비해 경화 벌열의 자제들이 사대부로서의 책무를 자각하지 못하고 소품문이나 유희적 글쓰기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가졌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자유로운 문학 활동에 대한 탄압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처분을 내려 반성을 촉구했다.

정조는 진정한 사대부 정치를 펴 나가기 위해 조정의 다양한 당파들을 화합시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 아니라, 경향 분기가 가속화되면서 침체되어 있던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각 지역 유생들에 대한 특별시험을 통해 지방의 숨은 인재들을 발탁하고, 구언에 응하여 시무에 대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을 장려했다. 또 서얼 및 잡류들의 통청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 그들의 재주에 따라 적재적소에서 공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이 정조의 인재등용책에 의해 발탁되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정조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만년에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에 잘 드러나 있다. 군주가 진정 의리의 중심을 잡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사대부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잘 재량하여 씀으로서 왕도정치를 행하고자 했다.

그가 바쁜 정무의 와중에서도 늘 쉬지않고 학문에 힘썼던 것은, 이해관계에 따라 수많은 갈래 위에 서있는 조선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조정하고 화합시키며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군주의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조가 군사로 자임했던 것은 군주이면서 스승이기까지 원했던 오만함의 표현이 아니라 백성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는 군주 아니면 스승이므로 그 세도에 대한 무거운 책무감을 스스로 감당하고자 노력하겠노라는 의미였다.

4 정조가 꿈꾼 조선_정조의 경제-사회 개혁

정조는 정치 및 문화방면의 개혁 뿐 아니라 조선 사회의 공공성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여러 사회경제적 개혁을 시행하였다. 민사국계를 바로잡으려는 정조의 고심은 왕이 되기 이전부터 할아버지의 치세 동안의 고민을 이은 것이었다. 1776년 대리청정을 하던 시절 정조는 궁방의 전토의 일부를 민간에 돌려주도록 하였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하는 방안에도 기본적으로 찬성하였다.

국가 재정의 고갈 및 지속적인 부족 사태는 오랫동안 조정의 고민이었지만 민간의 경제적 여건도 좋지 않은 상태여서 과도한 세금을 줄이면서 재정을 건전화한다는 양립불가능한 정책을 고심해야 했다. 토지 소유의 불균형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다만 정조는 조선이 오랫동안 정전(井田), 균전(均田), 한전(限田)의 이상을 실험해왔다고 생각했고, 단지 경전이나 역사 속의 이상적인 정책을 반복해서 되뇌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 이상들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상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급속히 생겨나는 난전의 폐단, 도고의 문제 등을 관리하는 방안도 논의하였다.

정조가 추진한 개혁은 그가 건설한 신도시 화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었다.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장하면서 건설하기 시작한 도시였다. 정조는 1804년 즉 세자가 15세가 되는 때에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를 떠날 결심을 했는데, 이때에 상왕이 머무를 행도로서 화성을 건설한 것이었다.

축성 과정에서부터 비용을 줄이고 평지성이지만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곽 축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연구·적용시켰다. 또 화성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경제적 연구도 진행하였다.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새로운 농법 및 농업 경영 방식을 통해 자립적이고 안정적인 소득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수원 일대에 상인들을 이주시키고, 이들이 상업을 통해 이주한 도시민들의 생업을 보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농업 및 상업을 통해 도시의 자립이 가능하도록 했다.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민산(民産)을 풍족하게 하면서 조화로운 공존의 생활방식을 추구하려 했던 유교적 이상정치의 오랜 꿈은 후대로 유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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