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정종

정종[定宗]

사후 262년 만에 ‘정종(定宗)’이라는 묘호(廟號)를 받다

1357년(공민왕 6) ~ 1419년(세종 1)

정종 대표 이미지

정종실록 표지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 태조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의 형, 조선 제2대 왕

정종은 1357년(공민왕 6)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광원(光遠)이고, 이름은 경(曔)이며, 방과(芳果)는 초명이니 태종 이방원의 형이다. 정종이 그의 나이 18세 때인 1374년(공민왕 23)에 혼인한 김천서(金天瑞)의 딸이 훗날 정안왕후가 된다. 정종은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고려왕조에 무공을 세워 벼슬을 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이후에는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얼마 후 다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 즉위 이전

정종이 조선 제2대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에서 맡았던 주요 역할들은 다음과 같다. 21세인 1377년(우왕 3) 아버지 이성계를 수행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한 것을 비롯하여 고려왕조에 많은 무공을 세웠다. 32세인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 권문세족을 몰아낼 때 이들을 국문하는 데 참여하였다. 34세인 1390년(공양왕 2)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여 왕위에 오르자 1392년(태조 1) 36세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에 임명되면서 왕자로서 병권에 참여하였다.

3 즉위 이후

정종은 동생 정안군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한 후 세자에 책봉되었고 곧 즉위하였다. 1398년(태조 7) 42세의 나이였다. 1398년 9월부터 1400년 11월까지 2년 여 재위하였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한 셈이었으므로 국왕으로서는 다소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정종 대 국정과 관련하여 취해진 주요 조치들은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한 것과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삼군의 직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분리체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방원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400년(정종 2) 초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하륜(河崙) 등이 내세운 ‘적장자가 후사가 없으면 나머지 아들로, 나머지 아들이 후사가 없으면 서자가 계승한다.’는 승계 원칙에 따라 나머지 아들 중의 하나인 정안군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제1, 2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즉위 과정을 살펴볼 때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종은 왕위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한 공로는 정안군 이방원의 몫이 크다고 하면서 정안군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에 힘을 더했다.

세자에 책봉된 정안군은 다시 정종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취하여 1400년(정종 2) 11월 정종에게서 왕위를 이어받았다. 굳이 이러한 형식을 취한 것은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로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종법정신을 표방하겠다는 뜻이었다. 정종은 동생 이방원을 아들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 ‘인문공예상왕(仁文恭睿上王)’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상왕이 된 정종은 제1차 왕자의 난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반기를 든 조사의(趙思義)의 난이나 상왕복위문제 등이 불거질 때마다 태조와 태종 사이에서 편안하지 못했는데, 태조 승하 후 태종의 왕권이 공고해지면서 왕-상왕과의 관계가 안정되었다. 태종은 형식적으로는 아버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10년 위 형님인 정종을 상왕으로 모시며 극진히 받들었다고 한다. 정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후 근 20년을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으로 소일하며 여생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한 이후 태종이 상왕이 되면서 태상왕이 된 정종은 1419년(세종 1) 태종과 세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정종의 유명에 따라 왕비 정안왕후의 능인 후릉(厚陵)에 합장하였다.

처음에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가 이듬해 중국으로부터 받은 공정(恭靖)의 시호를 더하여 ‘공정온인공용순효대왕(恭靖溫仁恭勇順孝大王)’으로 고쳐 다시 받았다. 숙종 대에 묘호를 받으면서 다시 의문장무(懿文莊武)의 시호를 더 받았다.

묘호는 받지 못하였다. 숙종 대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받을 때까지 공정대왕(恭靖大王)이라 불렸다.

4 정종 묘호 논의 과정과 평가

정종은 태조, 태종과 달리 승하 후 바로 묘호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는 정통 임금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 또 국왕이 국왕 대우를 받지 못하면 그 일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까지 대대로 국왕의 그것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었으므로 정종의 자손들은 국왕의 자손이 아니라 대군의 자손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밖에도 여러 왕실 관련 예제나 정치적 관계, 역사적 정통성 등과 관련되어 복합적으로 영향이 따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정종의 묘호 논의는 단순히 왕의 이름을 받는 것이 아닌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묘호를 받기 전 정종 즉 공정대왕에 대한 묘호 논의는 예종 대에 처음 나왔다. 예종이 공정대왕에게 안종(安宗) 혹은 희종(熙宗)이란 묘호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실록에도 아무 이유 없이 묘호를 받지 못한 공정대왕에게 묘호를 올리는 것이 어떨지에 대해 예종이 문득 승정원 승지들에게 의견을 묻는 내용이 들어 있다. 다음날에는 대신들을 불러 모아 똑같이 물었다. 승지들이나 대신들 모두 선대왕들이 묘호를 올리지 않은 데에는 뜻이 있었을 것이라며 은근히 반대의 입장을 나타냈다.

성종 대에는 후손들에 의한 묘호 요청이 여러 차례 있었다. 1475년(성종 6) 정종의 장남 무림군(茂林君)이 묘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1481년(성종 12)에는 후손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이 상소를 올려 묘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1482년(성종 13)에도 후손 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이 공정대왕에게 묘호를 올리기를 주장하였지만 예조판서 이파(李坡)가 적극 반대해서 시행하지 못했다. 후손들의 연이은 요청에 조정에서도 이 논의를 피할 수는 없었는데 대체로 선대왕이 하지 않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논리로 반대의견이 일방적이었다.

중종 대에도 왕실의 후손들이 연대하여 공정대왕에게 묘호를 올릴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공정대왕의 후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논의는 보다 보편성을 띠게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공정대왕이 묘호를 받지 못하고 온당한 대우 역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부당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예조에서 반대하고 중종도 그대로 따랐는데 당시 이와 같은 결정을 개탄하는 사관의 논평이 있어서 주목된다. 또 1519년(중종 14)에는 시강관(侍講官) 이연경(李延慶)이 공정대왕을 국왕으로서 온당하게 대우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처럼 연대 상소와 사관의 논평, 시종신의 문제제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중종 대에는 성종 대와 달리 공정대왕의 묘호 문제를 다시 보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음이 감지된다.

공정대왕 묘호 논의는 숙종 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구체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단종의 종묘 배향 등 숙종대 취해진 일련의 왕실 정통성 바로 세우기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 세종을 비롯하여 선대왕들은 왜 공정대왕에게 묘호를 올리지 않았는지, 예종 대에 묘호를 정해서 올리려고 했던 것은 맞는지 그 어떤 것도 정확한 고증이 없는 상황에서 1681년(숙종 7) 지춘추(知春秋) 조사석(趙師錫), 검열(檢閱) 이여(李畲) 등 사관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본 후 보고하였다. 이 보고가 있은 지 약 석 달 만인 1681년(숙종 7) 9월 18일 드디어 공정대왕에게 묘호가 내려졌다. 공정대왕의 묘호는 ‘정종(定宗)’으로 결정되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염려하였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 묘호를 받기까지 262년이 걸렸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