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정철

정철[鄭澈]

가사문학의 대가, 서인의 영수

1536년(중종 30) ~ 1593년(선조 26)

정철 대표 이미지

송강집 목판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정철은 1536년(중종 31) 서울의 장의동(藏義洞)에서 정유침(鄭惟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이며, 호는 송강(松江)이다. 그의 유년기는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며 크게 요동치게 된다. 정철의 누이는 계림군 이류(李瑠)의 부인이었다. 을사사화 때 이류가 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의 부친 정유침 역시 계림군의 처부로 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의 큰형과 당시 어렸던 정철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정평(定平), 영일 등지를 전전하다 1551년(명종 6) 부친이 귀양에서 풀려남에 따라 창평(昌平)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부친이 야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정철 역시 재야에서 여러 인물들과 사승관계 및 교분을 맺게 된다. 1551년에는 김인후(金麟厚)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기대승(奇大升)과도 교유하였다.

17세 때에는 부인 문화 유씨와 혼인하였다. 1556년에는 훗날 함께 서인으로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게 된 이이(李珥)와 처음 만나 교분을 나누기도 하였으며, 1560년에는 역시 훗날 같은 서인의 주도자로 활동한 성혼(成渾)과 시로 교분을 나누었는데, 이전부터 성혼과는 교류가 있었다. 이처럼 어린 시절 재야에서 학문에 힘쓰며, 이이와 성혼 등 훗날 서인의 거두들과 교류하였는데, 이는 훗날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일들이었다.

26세 때인 1561년(명종 16)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는 문과에 합격함으로써 비로소 관직에 나아가게 된다. 이후 실무직을 역임하였으며,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아가 지방의 군사 문제에 대한 서계를 올리는 등 지방 사무와 관련된 활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는 을사사화 때 피화되었던 인물들의 신원을 요청하는 등, 젊은 관리로서 명종 말년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보였다.

2 출세와 동서붕당

선조[조선](宣祖)의 즉위는 정철과 같은 젊은 선비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정철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선조 즉위 이후 32세 때 수찬이 되었으며, 실록청 낭청을 지내는 등 젊은 관료들이 역임할 수 있는 주요 관직들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다.

그 밖에도 이황(李滉)에게 시를 지어 전송하고, 이이와는 사가독서를 함께 하며 성혼과도 꾸준히 시를 주고받는 등 사림과의 교유는 지속되고 있었다.

이조의 낭관으로, 관리 등용에 관여하며 사류를 등용하려 하자 김개(金鎧), 홍담(洪曇) 와 대립하는 등, 이이와 함께 사류의 선봉으로 조정에서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정철의 정계 활동은 두 번의 부모상으로 인해 다소 주춤하게 되는데, 35세였던 1570년(선조 3) 부친을 여의고 삼년상을 치렀으며, 38세 때인 1573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 역시 삼년상을 치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모친상을 탈상한 40세 때까지는 대부분의 정계 활동을 중단한 상황이었다.

모친상을 마친 1575년(선조 6) 정철은 다시금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 해는 조선 중기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리고 정철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해였다. 이미 전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열이 점차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미 앞서부터 이이와 깊은 교분을 맺고 있던 정철은 이이와 함께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김효원(金孝元) 일파를 정치적으로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며 점차 동서 대립의 중심인물로 부상해 나갔다.

붕당의 와중에 사당(邪黨)으로 배척되는 등 정쟁에 휩쓸리기도 하였으나, 이이가 그를 옹호하는 등 정철은 대립에 점차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가 단종[조선](端宗)의 묘소를 개수할 것을 아뢰는 등 지방관으로서의 활동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기간은 그의 문학활동에도 중요한 시기였다.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며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관동별곡(關東別曲)〉, 연시조의 하나인 〈훈민가(訓民歌)〉를 지으며 문학 면에서 손꼽히는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문학의 성취와는 별개로, 붕당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정철 역시 복잡한 정치 대립을 이어나갔다. 정인홍(鄭仁弘) 등 동인과의 대립은 끊이지 않았으며, 이이와 함께 정철은 계속 동인의 공격을 받았다.

3 지속된 부침 : 동서 대립의 한 가운데 서다

선조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던 이이가 사망하고 난 이후, 정철은 박순(朴淳)과 함께 정여립(鄭汝立) 등 남인의 거센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사직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비록 조헌(趙憲) 등이 상소를 올려 이이와 정철 등을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이이 사후 정국은 지속적으로 동인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때의 은거생활 역시 정철의 문학활동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다.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있던 사이 정철은 자신의 충성을 강조하고자 임금을 그리는 가사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이다. 이러한 시조들은 정철 자신의 정치적인 상황을 은유하는 한편 임금을 향한 마음이 드러난, 양면적인 성격을 지니는 대표적인 가사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철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온 것은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였다. 정여립의 모반에 대한 비밀 장계가 들어오자 정여립을 둘러싼 일대 옥사가 벌어지게 되었다. 정철은 이 때 비밀리에 이들을 체포할 것을 아뢰었으며, 이내 우의정이 되어 옥사를 주관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기축옥사는 그 발단과 전개, 처리에 있어 당대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온 사건으로, 동인과 서인의 입장 차이에 따라 사건 자체 및 주요 인물에 대한 평이 지금도 엇갈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 이후 정철과 서인은 동인과 원수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은 후대에까지도 동인이 정철을 비난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기축옥사 이후 좌의정에까지 오르며 정국을 주도하던 정철이었으나, 1591년(선조 24) 동인의 탄핵과 선조의 분노로 인해 정철은 파직을 당한 후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 정철의 탄핵 이유에 대해서는 남인과 서인이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남인은 정철이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지고 사당(私黨)을 만들어 국권을 농락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서인은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정철이 이산해(李山海)의 농간에 의해 선조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당시 국정을 주도하던 이산해, 유성룡(柳成龍) 등이 파직되자 정철은 임진왜란 수습을 위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조정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후 정철은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한 경험을 살려 북방의 방어에 대한 계책들을 올렸으며, 서울 수복 이후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사은사로 갔을 때 적이 남쪽에 머무르고 있는 사정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언관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강화도로 물러가 있다가 1593년(선조 26)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정국의 변동에 따라 관직의 삭탈과 신원이 반복되는 등 여전히 부침을 겪었으나, 서인 정권이 안정화된 1694년(숙종 20) 이후 더 이상의 지위 변동은 없었다.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고, 1705년(숙종 31) 창평(昌平)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4 정치가 정철과 문인 정철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정철은 16세기 후반 동인과 서인의 대립의 중심에 서 있었던 정치가였다. 그는 김효원과 심의겸(沈義謙)의 대립에서 비롯된 동인과 서인의 대립의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일 뿐 아니라, 기축옥사와 같이 양 붕당의 대립을 극단으로 몰아간 사건의 처리를 주도하였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사후에도 관직 삭탈과 신원, 추증이 반복되었던,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정치가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처리를 놓고 동인이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으로 나뉘는 계기까지 제공하는 등, 당대 정치적 논란은 그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처럼 정치가 정철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을 뿐 아니라 반대세력의 원색적인 비난까지 받을 정도로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지만, 문인으로서의 정철은 뛰어난 가사문학을 남긴 인물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17세기 후반의 뛰어난 문인이었던 김만중(金萬重)은 그가 우리말을 섞어 가사를 쓴 것을 높이 평가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18세기의 문인인 박창원(朴昌元)은 김만중과는 달리 정철이 한문으로 작품을 쓰지 않은 것은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관동별곡〉의 의미의 뛰어남과 어조가 유려함을 칭찬하며, 한문으로 번역을 남길 정도로 정철의 시가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처럼 정철의 가사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조우인(曺友仁)은 〈관동별곡〉에 영감을 받아 〈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을 지었으며, 김춘택(金春澤)은 〈사미인곡〉을 본따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을 짓는 등 정철의 영향으로 유사한 작품을 남긴 후대 문인들이 있었다.

다만 정철의 가사들은 그가 중앙 정계에 있지 않았던 시기, 예컨대 지방 관찰사로 나아가 있을 때, 혹은 낙향해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시가 내에 있는 국왕에 대한 사모와 그리움에 대한 해석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것으로, 정철에 대한 호평은 대부분 서인, 노론계 인물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철이 중세 국문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역정과 상반되는 서정적이고 섬세한 시가 작품은 정철이라는 인간이 살았던 시대의 느낌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역사적 인물 정철의 복잡하면서도 다면적인 내면을 음미해보게 만드는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