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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

사림파, 도학 정치를 꿈꾸다

1482년(성종 13) ~ 1519년(중종 13)

조광조 대표 이미지

조광조 영정(국오 정홍래 작, 1750경)

개인 소장

1 개요

조광조(趙光祖)의 자는 효직(孝直)이고, 스스로 호를 정암(靜菴)이라 하였다. 그는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이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연산군(燕山君) 때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할 적임자로 사림 세력에 의해 추대되었다. 중종 10년(1515) 과거 급제 이후 중종[조선](中宗)에 의해 개혁 정치 추진의 중심인물로 발탁되어, 짧은 기간 동안 승진을 거듭하면서 개혁 정책의 추진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사림 세력의 급진적인 개혁 추진은 국왕과 공신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는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조선의 정치는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결국 사림 세력이 주도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개혁 정치가요 조선 도학의 정통으로 추숭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종 원년(1545)에 관작(官爵)이 회복되었고, 선조 2년(1569)에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광해군 2년(1610)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2 가계와 학문적 연원

조광조의 고조는 조온(趙溫)인데,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으로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양절(良節)이었다. 증조는 조육(趙育)으로 의영고 사(義盈庫使)를 지냈고, 조부는 조충손(趙衷孫)으로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다. 조광조의 아버지는 조원강(趙元綱)으로 벼슬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고, 뒤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현감(縣監) 권의(權誼)의 따님이다. 이처럼 조광조는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지낸 당시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조광조의 가계(家系)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에 포함되어 있는 ‘정암선생세계지도(靜菴先生世系之圖)를 참고할 수 있다. 이 도표에는 조광조의 10대조로부터 후손들에까지 직계의 가계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조광조는 성종 13년(1482) 8월 10일에 태어났다. 연산군 4년(1498) 17세의 나이로 어천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갔다가 마침 희천(熙川)에 귀양을 와 있던 김굉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는 18세 때인 연산군 5년(1499) 결혼을 하였으며 이듬해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결혼과 부친상 때에 서울에 있었으므로 김굉필의 문하에서 공부한 기간이 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광조의 생애에 대한 기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가 각각 쓴 두 종류의 행장(行狀)이 있고,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쓴 묘지명과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쓴 신도비명에도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있다. 또한 그의 생애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연보도 있어 참고하기에 편리하다.

중종 5년(1510)에는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다음해 모친상을 당하였다. 당시 조광조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으며, 그에 따라 자신의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실천을 중시하였다.

중종 5년 10월 경연 참찬관 김세필(金世弼)은 중종에게 옛 선인들은 사표가 될만한 사람을 가리켜 '유자(儒者)의 영수(領袖)'라 하였다고 하며, 마땅한 사람을 뽑아 오늘날의 유자의 영수로 삼으라고 권유하였다. 그 기록에 부가되어 있는 사론을 보면, 생원 김식(金湜)과 조광조 등이 김굉필의 학문을 이어받아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고, 관대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마치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하여 본받는 이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3 관직 진출과 개혁 정치 추진

중종 10년(1515) 여름에 조광조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제수되었고, 이해 가을에 실시한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여 을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얼마 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다.

조광조의 문집에는 그가 알성시에 급제할 때의 책제와 그 답안인 대책문이 남아 있다. 과거의 문제는 요순시대의 이상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조광조는 먼저 공자의 가르침이 사회의 명백한 목표가 되어야 함을 전제한 다음, 정치의 근본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정치의 근본은 올바른 도리에 근본을 두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리학의 이념적 목표를 분명히 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가치를 엄격하게 지키며 살아간다면 성현의 이상 정치가 현실에 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함께 상소하여, 중종의 폐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의 자리를 회복시킬 것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조정의 의론은 이들이 말할 사안이 아니라고 여겨 체포해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박상과 김정이 유배되자 당시 과거 급제 후 막 관직에 진출하여 사간원정원으로 있던 조광조는 상소를 올려 구언 상소를 올린 이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한 대간은 본분을 상실하였으므로 모두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간원의 하급 관료인 정언에 지나지 않는 조광조가 자신이 속한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 전원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상소를 통해 조광조는 유교 이념의 주창자로 사림 세력이 생각하는 시대적 요구를 실현할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조광조는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박상과 김정의 주장이 옳다고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들 주장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고 다만 대간이라면 언로를 잘 열 수 있게 하는 것이 직분인데, 지나친 말을 했다고 해서 나서서 죄주기를 청하였으니 대간은 그 직분을 잃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처럼 직분을 잃은 대간과 같이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두 기관의 관원들을 모두 파직하여 언로를 다시 열 것을 요청하였다. 중종은 대신들과 의논한 다음 조광조의 요청에 따라 대간의 관원을 교체하였다.

이후 조광조는 승진을 거듭하였는데, 중종 11년(1515)에는 호조·예조·공조 3조의 좌랑을 거쳤으며,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가서 수찬(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한(典翰)을 지냈다. 중종 12년(1517) 여름 5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다가 다시 홍문관으로 돌아와서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이처럼 조광조는 사림 세력과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고속 승진하였다. 중종 11년 봄 홍문관에 들어갈 때 종6품의 부수찬이었는데, 2년이 채 지나기 전에 정3품의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던 것이다.

중종은 반정 이후 정국공신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지만 자신의 지지 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그는 사림 세력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조광조를 발탁하였다. 중종이 조광조를 발탁하여 유교적인 이상 정치를 추구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연산군의 학정을 겪은 뒤의 상황에서 인심을 수습하는 면에서나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있어 매우 효과적인 방책이었을 것이다.

중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면서 정치에 입문한 조광조는 당시 무너져 내린 지배층의 도덕성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나라를 중흥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다스리는 사람이 유교적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군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조광조는 주로 홍문관에 근무하면서 경연(經筵)에 참여하였는데, 그때마다 중종에게 임금의 마음은 통치의 근본이 되며, 근본이 바르지 않으면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로 인해 백성들에게 교화가 행해지지 못한다고 간언하였다.

조광조는 경연 석상에서 제왕의 학문에 대하여 논하였다. 그는 정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 근본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위해 임금의 학문은 한갓 문자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요체를 체득하여 마음을 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삼대의 성왕과 같은 다스림을 이루겠다는 뜻을 세운다면 마침내 그러한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아랫사람들을 진작시키는 것이 윗사람에게 달린 것이라고 하면서, 임금이 먼저 덕을 닦아 감동시킨다면 아래서도 감동되지 않는 사람이 없어, 지치(至治)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정치의 요체는 덕을 닦는 것이니, 이에 힘쓰면 그 나머지는 수고할 것 없이 스스로 다스려지는 것이나, 근본에 힘을 쏟지 않고 말단에서만 노력하면 수고롭기만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중종에 의해 발탁된 조광조는 당시의 정국을 헤쳐 나가면서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중종 12년 8월에는 정몽주(鄭夢周)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조광조 일파는 정몽주가 성리학의 성립 시기에 큰 공을 세웠으며, 김굉필은 정몽주의 학문적 정통을 이은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정몽주와 김굉필은 절의의 덕목을 자신의 삶을 통해 구현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들에 대한 문묘 종사를 주장한 것은 그러한 논의를 통해 성리학적 가치를 중시하는 기풍을 진작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왕 및 대신들의 논의 과정에서 김굉필의 문묘 종사는 거부되었지만, 정몽주의 문묘 종사는 실현되었다.

당시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주장한 것은 성리학의 도통이 이들에 의해 이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려 때에는 성리학에 대해 잘 몰랐는데, 고려 말에 오직 정몽주가 빼어나서 이학(理學)의 연원(淵源)을 조금 열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김굉필이 스스로 송유(宋儒)가 남긴 실마리를 얻어서 익히고 행하여 성취한 바가 바로 정자(程子)·주자(朱子)와 같았다고 본 것이다. 당시 정몽주의 문묘 종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지만 김굉필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저술이 없는 것을 지적하며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조광조는 문묘 종사의 추진에 대해서, 연산군 대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별 탈 없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풍조가 생겨 선비의 기상이 날로 흩어지고 말았는데,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면 그들이 사표가 되어 후대의 학자들을 이끄는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해 여름에는 소격서(昭格署) 폐지와 관련된 논쟁이 전개되었다. 소격서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도교 사당이었는데 천재지변이 있을 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이들이 보기에 소격서는 규범에 맞지 않는 곳이었고 폐지해야 마땅한 곳이었다. 하지만 선왕 때에 만들어져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중종 또한 소격서 폐지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대해 조광조는 중종이 소격서 폐지를 망설이는 것은 아직도 중종이 성리학에 입각한 정치 이념을 완전히 따르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였다. 이러한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중종은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중종이 소격서 폐지에 굳이 반대하며 폐지를 주장하는 대간을 교체하는 명령을 내리자 조광조는 연산군 때의 일을 들어 이를 비판하였다. 조광조는 소격서의 폐지가 당시 형성되고 있던 성리학적 기풍의 진작과 관련이 있으며, 이를 굳이 반대하는 중종의 태도는 그러한 형세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으로서 연산군 같은 폭군이 다시 나올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조광조는 그러한 중종의 행동을 끝내 용납할 수 없으며, 소격서 폐지에 중종이 동의하기 전에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중종 13년(1518) 봄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시험의 방안은 사장(詞章) 뿐 아니라 학문과 덕행을 중시하여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지방 수령과 홍문관, 육경, 대간의 추천을 받을 자들을 대상으로 대책을 시험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렇게 선발된 이들을 과거 급제자와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였다. 관리를 천거로 뽑자는 주장은 이후 조정에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중종 14년 4월 천거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책으로 시험을 거치고 최종 28명의 합격자를 선발하였다.

조광조가 천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려는 것은 당시의 과거 제도가 문장에만 치중하여 덕행을 갖춘 인재를 발굴하는 데 취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천거의 제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과거 급제자가 진출하는 요직을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천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조광조는 지방에서 추천된 인재를 모아 책문으로 시험하여 그가 가진 경륜을 알아보고 과거 급제자와 동등하게 진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종 14년 4월 13일 천거된 선비들을 대상으로 책문을 시험하여 김식 등 28명을 선발하였다. 이것이 오랫동안 찬반 논란을 거친 현량과의 시행이었다. 하지만 이때 선발된 사람들은 숨어 있던 인재가 아니라 이미 관직을 가지고 있었거나 서울과 그 인근에 살던 주요 문벌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급제 후 바로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결국 현랑과는 조광조 세력의 확대를 위해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등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비판받게 되었다.

4 기묘사화와 죽음

조광조와 그의 세력이 추진하는 개혁 정책은 당시 조급하게 효과를 보고자 하여 개혁의 내용이 장황하거나 과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구신(舊臣)들 중에는 이들에게서 공격을 받게 되자 원한을 갖게 되는 사람도 있었다. 조광조는 그러한 조짐을 보고 여러 차례 직위를 사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중종 13년 겨울 조광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이때에도 조광조는 관직이 너무 빨리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조광조는 대사헌 직에 나왔으며, 사림 세력이 추진하는 개혁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조광조는 대사헌에 제수되자 스스로 과거 급제 후 40개월도 되기 전에 종2품의 대사헌이 되는 것은 너무 외람된 일이라고 하며 사퇴하고자 하였다. 그는 급제 이후 대부분의 관직 생활을 홍문관에서 시종직으로 보냈기 때문에 행정과 법률에는 서툴다는 것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행정과 법률과 같은 일은 말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경력이 없어도 할 수 있으며, 대사헌과 같은 중요한 자리에 조광조 이외의 적임자가 없다고 하며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광조는 이날 하루 동안 다섯 차례나 사직하겠다고 요청하였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 14년(1519) 가을 조정에서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에는 공이 없는 자가 많으니 그러한 자는 공신호를 다시 박탈하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이때 조광조는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이러한 논의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지금까지 조광조 세력의 개혁 추진 과정에서 소외되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침해받게 되었다고 생각한 정국공신들의 본격적인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발이 결국 기묘사화라는 정치적 파탄을 몰고 왔다.

조광조는 정국공신 중에 연산군 때의 총신들이 많으며 그들은 반정 때 특별한 공을 세우지도 않았으면서 공신에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공신의 책봉이 문란하게 이루어져 부귀를 추구하는 길이 열렸으며, 이러한 근원을 끊는 계기를 지금 만들지 않으면 영영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한 번 정한 공신을 개정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기며 허락하지 않았다. 공신 개정 논의는 결국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조광조의 죽음을 불러오게 되었다.

중종 14년 11월 15일 밤에 임금은 병조판서 이장곤(李長坤) 등을 부른 다음 의금부에 투옥해야 할 대상을 가진 명단을 내렸는데, 거기에는 조광조와 그의 추종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광조 일파는 붕당을 맺고 자신들과 맞지 않는 이들을 배척했다는 죄명을 받았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좌의정 안당(安瑭) 등 대신들이 만류하였지만 이들을 처벌하겠다는 중종의 의지를 꺾지 못하였다. 중종은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송질(宋軼), 김전(金詮) 등이 무사들과 함께 행동에 나서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위협을 느꼈고, 지금까지 자신이 지지했던 조광조 세력과 결별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날 밤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尹自任) 등이 밖이 소란하여 나가 보니, 연추문(延秋門)이 활짝 열리고 궁궐 주변에 군졸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전(金詮),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화천군(花川君) 심정(沈貞), 병조참지(兵曹參知) 성운[전기](成雲) 등이 합문 밖에 불려와 있었다. 곧 성운을 승지로 임명한다는 명령이 내렸는데, 성운은 궐내로 들어갔다가 종이쪽지를 들고 나와 쪽지에 적힌 이들을 모두 의금부에 하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 쪽지에는 승정원(承政院)과 홍문관(弘文館)에 숙직하던 관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곧이어 우참찬(右參贊) 이자(李耔),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정(金凈), 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 도승지(都承旨)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同副承旨) 박훈(朴薰)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중종은 처음 조광조에게 사사를 명했으나 정광필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를 죽일 수 없다고 하자 유배를 명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8세이었다.

중종이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전교를 내리는 실록의 기사에는 조광조의 최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려주는 사관의 기록이 덧붙여져 있다. 그에 따르면 조광조는 중종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인물이 자신을 모함하여 죽게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끝내 중종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으로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이 하였다. 밝은 해가 땅을 비추듯 나의 충정을 밝게 비춰 주리라.’ 하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5 학문 세계

성리학은 이미 고려 말에 전래되어 학자들에게 알려졌으나, 절의와 사장을 넘어 전적으로 성리학 이론에 의지하여 그것을 실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성종[조선](成宗) 때 김종직의 문인들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훤당 김굉필이 그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된다. 조광조는 김굉필을 스승으로 섬겼다. 하지만 김굉필과 조광조 모두 험난한 세상에서 안온하게 학문과 저술에 매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학문적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저술을 풍부하게 남길 수는 없었다.

조광조의 학문적 성향은 주로 지치(至治)로 설명되어 왔다. 지치란 이상적인 정치를 뜻하는 것으로, 지치주의는 유교적 이상이 구현되는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이념이요 실천적 지침이다. 그런데 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이 나오는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 조광조는 다스림의 근본인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치의 주체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경연 자리에서 임금이 스스로 도를 체득하여야 교화가 이루어져 그 은택이 백성에게 베풀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6 추숭과 문묘 종사

중종 말년 김안로(金安老)가 실각하자 여론이 조광조의 누명을 벗겨주고자 하였으며 중종도 은택을 내릴 뜻이 있었다. 이어서 인종[조선](仁宗)이 즉위하자 묘당(廟堂)의 거듭된 논의와 유생의 호소로 말미암아 마침내 조광조의 관작을 예전처럼 회복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인종이 내린 조광조의 복관 명령은 그의 유언이었다. 인종은 죽기 하루 전에 조광조의 복권을 명령하였다. 그는 조광조를 복권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부왕인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병이 깊어 죽음이 닥치자 유언의 형태로 조광조를 복권하고 현랑과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조[조선](宣祖)가 즉위하자 기대승(奇大升), 이황 등이 기묘사림에 대한 추숭에 나섰으며, 그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요청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선조 원년(1568)에 조광조는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편 기묘사화를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되어 오던 남곤은 이때에 이르러 관작이 삭탈되었다.

선조는 신료들의 조광조 추숭 요청에 대해, 즉위 초에 국시(國是)를 정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일의 일환으로 이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곧 선왕의 뜻을 잇고 사업을 계승하는 일이며 세상의 도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하였다.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죽게 한 원흉이라고 지목되던 남곤은 선조 원년 9월 23일 관작을 삭탈 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선조실록』에는 이보다 이틀 앞선 날짜 부분에 남곤이 조광조를 모해한 전말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중종실록』에는 실려 있지 않은 내용으로, 남곤이 꿀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로 흘려보내 중종이 보게 하였다고 한다.

광해군 2년 9월 5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라는 교서가 내렸다. 이른바 5현 종사였다. 문묘는 성균관에 있는 사당으로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모시고 매년 정기적으로 석전을 지내는 곳이다. 동방의 현인으로는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가 모셔져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5현이 한꺼번에 종사되었으며, 거기에 조광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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