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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趙憲]

칠백의총에 잠든 의병장

1544년(중종 39) ~ 1592년(선조 25)

조헌 대표 이미지

칠백의총

칠백의총관리소(문화재청)

1 조헌의 일생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어릴 적부터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문에 대한 자세도 남달랐다. 당시 정치의 잘못된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자주 올렸다. 일본이 접촉해오자 관계를 끊을 것을 강경히 주장했고, 전쟁이 일어나자 곧 의병을 일으켰다. 승장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관군의 견제로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해 일전을 벌였고 장렬히 전사했다.

2 시대적, 가문적 배경

선조대는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가 국왕으로부터 스승대접을 받았으며,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조정에 진출하여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던 시기였다. 또한 성리학이 성숙하면서 학파도 갈리어 정파로 이어졌고, 그들 간의 갈등도 표면화되던 때였다.

조헌의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김포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황(璜), 조부는 세우(世佑), 부친은 응지(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처의 부친은 신세함(辛世諴)이다. 이이·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서인으로 분류된다.

3 유년기의 조헌

조헌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공손히 섬겼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조헌의 계모가 그를 매정하게 대우하여 외조모가 험담을 하였는데, 몇 달 뒤에야 가서 외조모를 뵈었다. 외조모가 왜 오랫동안 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지난번에 우리 모친의 일을 말씀하셨는데 자식이 된 입장으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오지 못했을 뿐이다.’ 하였다. 외조모가 부끄럽게 여기며 감복하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조헌이 정성을 다하여 계모를 섬기자 계모도 감동하여 이 아이가 참으로 내 아들이며 다른 사람이 대신해 낳았을 뿐이라고 했다고 한다.

12세에 비로소 김황(金滉)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친 조응지는 김포현의 교생이었는데 농사를 짓고 살았다. 집이 가난하였지만 조헌은 겨울에도 헤진 옷과 신으로 추위를 견디며 글을 배웠으며, 밭농사를 돕는 중에도 근처에 책을 두고 쉴 때마다 읽었다고 한다.

4 관직생활

1565년에 성균관[조선](成均館)에 들어갔다. 성균관 유생들과 더불어 보우(普雨)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1567년에 병과 제9인으로 급제했다.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가 되었고, 1570년에는 파주목 교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당시 파주에 거처하던 성혼에게 학문을 청하였고, 이듬해 이이를 만났다. 관직활동 초반부터 강직한 상소를 자주 올려 국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으나, 때문에 조정의 동료 뿐 아니라 백성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574년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서 정사 박희립(朴希立), 서장관 허봉(許篈)과 함께 명나라 북경에 파견되었다. 8월 북경에 도착하였고 조회에 참석하였다. 8월17일에 황극전(皇極殿)에서 열린 만력제 신종의 성절하례식(聖節賀禮式)에 참석했다.

또 국자감과 문묘를 방문하였고 예부에 글을 올려 문묘의 위차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조헌은 예부제독 회동관주사에게 글을 올려 주돈이·정호·정이·주희의 위차가 낮은 이유, 공백료 등이 언제 어떻게 파출되었는지, 등등 위차의 상하관계와 문묘에 들지 못한 이유 등에 대해 질문했다.

한편으로 양명학이 유행하는 명나라의 학문 현실에 실망하기도 했다. 조헌과 허봉은 명나라 사람을 만나 명나라 학자들의 왕양명에 대한 평가를 물어보았고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11월에 조정에 돌아와 8개조의 상소를 올렸다. 〈質正官回還先上八條疏〉 명나라의 의례, 풍속 등에 대한 최신의 상세한 보고였다. 조헌은 명나라의 문묘배향, 의관(衣冠) 제도, 음식과 연향, 사대부들의 인사예절, 스승과 제자의 예법, 지방의 풍속, 군대의 기강 등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 및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이후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횡포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1577년 부평으로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이이를 찾아가 몇 달 동안 학문을 배웠다. 이로 인해 동인이었던 이발(李潑), 김우옹(金宇顒) 등과 사이가 벌어졌으며, 이이에게 사론의 분열을 아쉬워하는 시를 올렸다.

공주 교수로 재직하던 1586년과 1587년 정여립(鄭汝立) 등의 흉패한 모의와 간사한 무리를 논박하는 만언소를 지어 올렸다. 당파의 옳고 그름과 정치 풍토의 폐단을 비판하는 장문의 상소는 당시 정치 현황 속에서 서인을 옹호하고 동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조헌은 이 상소에서 정여립을 이발, 이길과 함께 스승을 배반한 자로 맹비난하였다.

그러나 수차례 상소에도 불구하고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옥천으로 귀향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5 일본과의 접촉을 배격하다

이해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 통신사를 요청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쓰시마를 시켜 조선의 사신을 일본에 불러오기를 요구했다. 1587년부터 요구가 시작되었고, 조선 조정 내에서는 파견여부를 두고 많은 논의가 펼쳐졌다.

조헌은 일본사신을 배척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 임금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자이니 의리를 들어 이들의 요청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사신을 구류하고 찬탈을 모의한 자의 머리를 베어 명나라에 보내고, 다른 종자들은 일본으로 돌려보내 일본으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자고 하였다.

1589년에는 당시의 시대적 폐단를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길주 영동역으로 귀양을 가기도했다. 백성이주의 문제와 그의 주된 원인인 부역과 조세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산해, 윤탁연, 김응남, 유성룡 등 당시 조정의 고위관리들을 비난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1590년에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보냈다. 통신사가 돌아온 후 1591년 조헌은 일본사신 현소(玄蘇)를 목 벨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을 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의도가 전국에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조헌은 빨리 일본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 조정에 보내는 한편 류큐(琉球) 등 이웃나라에 침략위협을 알려 함께 일본에 대응하자는 의견을 올렸다.

이 외에도 명나라에 보낼 글, 류큐(琉球)와 쓰시마(對馬島), 일본유민 등에게 보낼 글, 영호남지역의 일본방비책 등에 대한 상소를 연이어 올렸으나 답을 듣지 못했고, 결국 옥천으로 돌아왔다.

6 임진왜란의 발발과 의병활동

1592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6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문인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각지에 의병참여를 호소하였고 이에 응하여 사람들이 모였다. 지방관들의 방해가 있자, 자신을 따르는 전참봉 이광륜(李光輪), 선비 장덕개(張德盖), 신난수(申蘭秀), 고격우(高擎宇), 노응탁(盧應晫) 등과 다시 의병을 모집했고 모여든 사람이 1,600명에 이르렀다. 7월 5일 웅진에서 군사들과 국난극복과 진격을 맹세했다.

이후 의병을 이끌고 회덕(懷德)으로 진군했다. 앞서 호남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금강 중류인 형강(荊江)을 건너 일본군을 무찌르기로 약속하였으나 고경명은 1차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고경명은 의병 6~7천을 데리고 북상하다가 일본군이 호남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선 이를 막기로 하였다. 일본군은 금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고경명이 방어사 곽영과 금산성 밖에 진을 쳤다. 전투가 시작되어 성을 공격하였는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공격했고, 선봉장이 도망치면서 전열이 무너졌다. 고경명 등이 의병장들이 모두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듣고 조헌은 고경명을 위한 추도시를 지었다.

이후 일본군이 청주를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헌은 승장 영규(靈圭)의 군대와 연합하여 8월1일 청주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전투결과를 전승업과 아들 완도(完堵)를 시켜 당시 선조가 머물던 의주의 행재소에 보고하였다.

8월15일 조정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조헌을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조헌은 관군의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8월16일 영규의 군대와 함께 청주를 떠나 금산으로 전진했다. 이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은 18일자로 약속된 금산성 공격 날짜를 미루자고 하였으나 조헌은 이에 따르지 않고 금산으로 진격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은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교대로 공격해왔고, 조헌의 700의병은 수에서 밀려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것을 2차 금산성 전투라고 부른다.

10월에 조정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증직하였다. 조헌과 김제갑, 남정유, 승장 영규를 증직하였다.

1593년 11월에 광해군이 아들 완도를 불러 포상하고 황신(黃愼) 등을 보내 치제하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1971년에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문집으로 〈중봉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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