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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周世鵬]

조선 성리학의 판액을 걸다

1495년(연산군 10) ~ 1554년(명종 9)

주세붕 대표 이미지

주세붕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을 건립한 인물

주세붕(周世鵬)은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으로,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열었다. 이후 서원은 전국 각지에 세워져 선현(先賢)에 대한 제향(祭享), 성리학 연구와 교육, 정치 세력 결집, 향촌 교화 등 조선 사상계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서원은 이후 국왕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판액을 하사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2 효심 깊고 우애 있는 아이

주세붕은 1495년(연산군 1) 10월 25일 경상도 합천군 천곡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가문은 상주에 거주하였으나, 고조부 대에 합천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한편 주세붕이 칠원(漆原)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는데, 문집에 실린 연보에는 그가 일곱 살 때 부친 주문보(周文俌)가 칠원 무릉리로 옮겨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세붕의 호 중의 하나가 무릉도인(武陵道人)인 것으로 보아, 실제 출생지가 어디였던지 그에게는 합천보다는 칠원 무릉리가 더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주세붕은 어렸을 때부터 효심이 깊고 우애 있는 아이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에 모친 황씨(黃氏)가 오랫 동안 병을 앓는 바람에 빗질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빗질을 하지 못하면 머리에 이가 들끓게 되었는데, 모친의 머리에 이가 돌아다니는 것을 본 주세붕은 자신의 머리를 어머니 머리에 대어 이가 자신에게 건너오게 하였다고 한다.

또 다음과 같은 형 주세곤(周世鵾)과의 일화도 전한다. 주세붕이 네 살 때 주세곤의 다리가 부어 침을 맞게 되었는데, 주세붕이 이를 보고는 울기 시작하였다. 옆에 있던 이가 그것을 보고 왜 우느냐고 하였더니, 주세붕은 이렇게 말하였다.

“형이 고통스러워 하는데, 동생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침을 맞는 모습이 무서워서 운 것이 아니라 동생의 도리를 생각하고 울었으니 네 살배기 아이가 형을 생각하는 마음이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3 순탄한 관직생활

주세붕은 1522년(중종 17) 사마시와 문과 별시에 연달아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관직을 제수 받아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이후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 등을 거쳐 병조좌랑, 사간원 헌납 등에 임명되었다. 주세붕이 홍문관에 있을 때 당시 직제학(直提學)이 바르지 못한 말을 하자, 주세붕이 ‘공은 직제학이 아니라 곡제학(曲提學)이로군.’이라 비판하였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굳은 심성을 바탕으로 그는 엘리트 관원의 길을 걸었다.

주세붕의 벼슬길이 완전히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530년(중종 25) 당시 좌찬성 이항(李沆)이 벼슬자리를 얻고자 여러 곳에 부탁하는 분경(奔競)의 죄를 범한 것에 연루되어 주세붕 또한 파직 당하였다. 또한 1538년(중종 33) 곤양군수로 재직할 당시 주변 군수가 남형(濫刑)하여 사람이 죽은 일이 있었는데, 주세붕이 이를 비호하였다가 같이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몇 번의 굴곡이 있기는 하였지만, 주세붕은 도승지, 황해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등 내외직을 골고루 거치며 계속 승진하였다. 비록 정승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였지만 종2품의 아경(亞卿), 즉 참판의 자리에까지는 올랐으니, 대체적으로 순탄한 벼슬살이를 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4 백운동서원 건립

주세붕은 대체적으로 원만한 벼슬살이를 하였고, 그러한 만큼 특별한 사건을 겪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사화(士禍)와 같은 피해를 입지도 않았고, 중앙정계에서 특별히 뛰어난 업적을 세운 인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세붕이 역사서에 큰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백운동서원 건립이라는 상징적인 사건 때문이다.

주세붕은 1541년(중종 36) 경상도 풍기의 군수로 임명되어,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 37)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안향(安珦)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지었다. 일 년 뒤인 1543년(중종 38)에는 사당 앞에 서원을 지었으니, 바로 백운동서원이다. 이는 성리학의 대학자 주자의 백록동서원 설립을 본 딴 것이다.

안향은 한국 성리학의 기원으로 꼽히는 고려 시대의 대학자로 이곳 풍기 출신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향은 순흥부 출신이었으나, 세조 대에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당하고 순흥부 또한 역도(逆徒)들의 고장이라 하여 혁파되어 풍기, 영주 등에 속하게 되었다.

백운동서원을 설립하는 작업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주세붕이 부임한 해에 풍기 지역에는 큰 가뭄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큰 기근이 연달아 이어져 고을의 민심과 재정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세붕 스스로 백운동서원의 설립 경위를 적은 『죽계지(竹溪志)』에는 이러한 사정이 문답 형식으로 잘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서원 건립을 반대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안향의 제사는 성균관에서 지내고 있으니 사당을 다시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 둘째, 마찬가지로 이미 학교가 있으니 서원을 다시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 셋째, 기근을 당하였기 때문에 제 때가 아니라는 것. 이상의 세 가지 근거를 대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주세붕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주자께서 남강에 일 년 머무르는 사이에 백록동서원을 수리하고 또 선현들의 사당을 세우기를 여러 번 반복하셨다. 이때는 금나라 오랑캐가 중원을 함락시켜 크게 어지러운 때였고 또한 기근까지 겹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께서 서원과 사당을 세운 것이 하나에 그치지 않았으니, 백성이 사람이 되는 까닭은 바로 교육에 있기 때문이었다. 사당을 세워 유덕한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하게 하는 것이 난을 그치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당장의 기근을 구하는 것은 일, 이년을 위한 계책이지만 서원과 사당을 세워 민심을 교화시키고 성리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천년, 만년을 위한 계책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주세붕이 당장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서원을 세우기 위해 터를 닦는 와중에 구리 수 백 근을 캐내어 밑천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업을 통해 그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세붕이 떠나간 후 지방관들의 노력에 힘입어 백록동서원은 발전을 거듭하였다. 1548년(명종 3)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의 전통을 뿌리내리고 성리학 발전의 기틀로 삼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재정 지원을 청하였다. 1550년(명종 5) 명종(明宗)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판액을 내리고, 사서오경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국가로부터 공인된 서원이라는 타이틀은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지방 사림들이 뭉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바야흐로 서원은 지방 교육과 교화를 담당한 기관을 넘어서 지방 사림들의 정치적‧사회적 중심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서원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어, 조선 시대 정치‧사상‧사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주세붕은 해주에도 서원을 설립하여 고려 말의 학자 최충(崔沖)을 배향하였다. 서원 설립을 통해 백성들의 교화를 꾀한 것이 바로 주세붕이 지방관으로서 지향했던 정책 방향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주세붕은 ‘고무 격려시킬 것을 생각하여 교화를 존숭했고 상례의 격식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554년(명종 9) 주세붕은 세상을 떠났으며, 1633년(인조 11) 자신이 설립한 소수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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