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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中宗]

정쟁과 혼란의 한가운데에 서다

1488년(성종 19) ~ 1544년(중종 38)

중종 대표 이미지

정릉 근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의 제11대 국왕(재위 : 1506~1544)으로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이다. 아버지는 조선의 제9대왕 성종[조선](成宗), 어머니는 성종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이다. 성종의 첫번째 부인인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딸 윤씨는 성종의 첫째 아들 연산군(燕山君)을 낳은 후 폐비가 되어 사저로 쫓겨났으니 폐비 윤씨(廢妃 尹氏)이다. 윤씨의 폐비사건 이후 성종은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濠)의 딸 정현왕후 윤씨를 맞아들였다. 정현왕후는 순숙, 신숙 두 공주를 낳은 후 1488년(성종 19) 진성대군(晉城大君, 후의 중종)을 낳았다.

중종대에는 정치적으로 조선전기 사회가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이러한 과도기적 모순은 훈구세력과 신진사림세력의 갈등, 훈구세력내 척신세력의 분립과 전횡 등으로 나타났고 그 중심에 놓인 국왕 중종은 훈구세력, 사림세력, 척신세력을 번갈아가며 움직이면서 정국운영의 중심을 잡아가고자 하였으나 정국운영의 큰 방향을 세우지 못하여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2 중종반정과 중종의 새로운 모색

성종이 죽은 후 성종의 첫째 아들인 연산군이 즉위하였는데 갖은 폐정을 일삼았으며 특히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성종대 이후로 지속적으로 성장해가고 있던 신진 사림세력들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연산군대 2차에 걸친 사화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대립이라는 정치 구도 하에서 일어났지만 사림을 싫어한 연산군의 성향 또한 주효하게 작용되었다. 유교 왕도정치 이념에 기반한 조선왕조의 정치운영 방식을 근원적으로 거부한 연산군의 폭정은 결국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에 의한 반정(反正)을 불러 일으켰고 이들에 의해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이 옹립되었다. 이것이 곧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반정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연산군대의 폐정을 개혁하는 개혁정치를 추진하게 되는데, 그 대체적인 방향은 연산군대 사화로 밀려난 신진 사림세력들을 다시 불러들여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도학정치를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중종은 연산군대 폐지되었던 조선조 유학의 상징인 성균관의 위상을 회복시키고 홍문관을 강화하였으며 문신월과(文臣月課)·춘추과시(春秋課試)·사가독서(賜暇讀書)·전경(專經) 등을 통해 문신들에게 성리학적 소양을 강조하였다. 또한 앞서 사화를 겪으며 귀양갔던 유숭조(柳崇祖) 등을 소환하여 중용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재차 사림들이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영수격으로 조광조(趙光祖)라는 인물이 부상되었다.

조광조는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김굉필은 성종대 이후 신진사림세력의 상징적 인물이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이러한 인연을 통해 조광조는 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정통 계보를 잇게 있었다. 그는 사림파의 정통 계보를 잇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림들의 이상인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누구보다도 강렬한 지향성을 지녀 신진 사림들의 여망을 한 몸에 받았다. 성균관 시절부터 조광조는 이미 ‘사림의 영수’로서 그 자질을 인정받고 있었다. “무오사화를 겪은 뒤부터 사림이 다 죽어 없어지고 경학이 씻은 듯이 없어지더니 반정 뒤에 학자들이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조광조는 소시에 김굉필에게 수학하여 성리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는 기사는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3 기묘사림의 등용과 ‘지치주의’ 개혁 정치

중종은 즉위 초에는 반정공신들의 견제로 인해 본인이 의도한 정치 개혁에 착수하지 못하였으나 즉위한 지 1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주요 반정공신들이 사망하게 되자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개혁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 중종이 선택한 정치적 동반 세력이 바로 온 신진 사림세력이며 또 그 영수가 조광조였다.

1515년(중종 10) 중종은 조광조 이하 신진 사림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하였으니 개혁정치의 시작이었다. 특히 이조판서 안당(安瑭)은 훈구신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를 위시하여 김식(金湜), 박훈(朴薰), 김안국(金安國), 김정(金淨), 송흠(宋欽), 반석평(潘碩枰)을 과감하게 발탁하였는데 이는 곧 중종의 뜻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종은 조광조가 목소리 높여 강조해오던 바, 성리학적 도학주의에 입각한 철인군주정치, 이른 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큰 공감을 표하였다. 조광조의 높은 뜻과 기개를 아낀 중종은 조광조와 긴밀히 연대, 지치주의적 개혁정치를 펼쳐나가게 된다. 기묘사림의 개혁정치의 중심에 중종과 조광조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두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급제하여 옥당에 뽑혀 들어가 경연에서 매양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아 지극한 다스림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 해 아뢰었는데, 그 말이 성실하고 간곡했으므로 중종이 귀를 기울여 들었다. 1년 동안에 정축년 홍문관 부제학에 등급을 뛰어 넘어 임명되었고, 그 해 겨울에 또 대사헌으로 승진되었다. 조광조는 마침내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이 되게 하고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건지려는 뜻을 가지고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기록이나, 또 “(조광조의 말에 대해) 상(上)이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들었고 광조 등이 서로 더불어 논설하기를 성의가 간절하게 하여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다가, 소환(小宦)이 촛불을 들고 가자 드디어 물러갔다”는 기록에서 잘 알 수 있다.

중종은 강성하지만 뜻이 높고 기개가 있는 조광조를 극히 신뢰하고 아꼈으며, 이러한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입어 조광조일파의 개혁정치는 빠르게 진전되었다. 소격서(昭格署), 천거식 인재 선발법인 현량과(賢良科) 실시, 향약(여씨향약)의 전국적 실시 등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는 조선사회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조광조일파의 개혁정치는 대단히 급진적 방식이어서 많은 기성의 훈구세력들의 반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조광조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만은 1519년(중종 14)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反正功臣 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게 된다. 조광조일파의 도학주의적 엄격성은 중종반정후 공신에 책록된 인물중에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는 반정공신 위훈삭제 주장이라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공신호 삭제는 도학적 이상에는 부합하는지 몰라도 중종반정의 명분과 기반을 뒤흔들어 놓는 위험천만한 발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훈구세력은 물론 사림세력들의 가장 든든한 지주였던 국왕 중종의 반발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 실시에 이어 동년 10월 위훈삭제론이 나오자 중종과 훈구대신들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결국 조광조일파의 논의를 수용, 사림들의 주장대로 2·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 삭탈과 토지 및 노비의 환수를 윤허하였다.

4 ‘기묘사화’와 ‘지치주의’ 개혁의 포기

애초 위훈삭제를 어려워하던 중종의 윤허는 뒤이은 사화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이기도 하였다. 중종은 위훈삭제 처분을 내린 며칠 후 전격적으로 사화를 불러 일으켰다. 홍경주·김전·남곤·심정 등은 밤에 신무문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 조광조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시키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곧바로 밀지를 내려 남곤·김전·정광필·홍경주 등 대신을 불러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게 했다. 그들은 즉각 유배되었고 위훈삭제 처분은 뒤집혀져 정국공신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중종의 급작스러운 사화 처분에 대해서는 대체로 훈구신중 조광조일파의 탄핵의 대상이 된 남곤·심정·홍경주 등이 조광조일파에 대한 사감을 갖고 계략을 꾸민 것으로 설명된다. 가령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 : 走肖는 趙의 破字)’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안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한 후 고변하여 화를 조성하였다”는 기록이나, 또 “이때에 남곤과 심정이 음험하다는 것으로 사림에 죄를 얻었다가 다시 면목을 고치고 깨끗한 선비들에게 붙으려 했으나 선비들이 끝내 받아주지 아니하니 이 때문에 분을 품었다.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공평하게 행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여 그가 거리에 나갈 때면 매양 사람들이 그가 탄 말 앞에 늘어서서 절하며 ‘우리 상전이 왔다’고 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자 남곤 등이 몰래 조광조가 민심을 얻었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홍경주의 딸 희빈(熙嬪) 홍씨(洪氏)를 통해 중종의 귀에 들어가게 하니 임금의 마음에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조광조 등의 위훈삭제 주청에) 여러 달이 지나도록 허락하지 않자 이들이 힘껏 다투어 사직까지 해가며 허락을 받았다. 이리하여 임금이 더욱 싫어하게 되니, 남곤·심정·홍경주 등이 몰래 희빈 홍씨를 통해 고하고 밤에 연추문(延秋門)을 열고 들어가 입시했는데 사관을 참석시키지 않아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임금이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을 불러 조광조 등의 죄를 논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화를 주도한 중종과 구신세력의 입장에서는 일단 사화를 일으킨 이상 그 처벌의 수위를 높여 향후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미리 방지하고자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일파의 죄목에 대해 “서로 붕비가 되어 자기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고 권세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후진을 이끌어 과격한 언사를 일삼는 것을 버릇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잘못되게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죄가 크다”며 조광조를 사사하였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김구(金絿)·박세희·박훈·홍언필(洪彦弼)·이자(李耔)·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을 유배하였다. 또한 사림세력을 두둔한 대신 정광필, 안당,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등도 좌천시키거나 파직하였다.

중종이 영의정 정광필 등 조광조의 사사를 반대한 많은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광조를 사사한 처분에 대해 실록에서는 “(조광조가)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고 하였다.

아직 사림정치가 조선사회에 정착되기 이전 중종은 조선정치 운영체제의 정점에 자리한 국왕으로서 조선후기 국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게 훈구세력이나 사림세력을 번갈아가며 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사림세력을 통해 개혁정치를 표방하고 이를 적극 후원하였지만, 그것이 국왕권의 강화와 배치된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철저하게 배제하였던 것이니 이는 왕조사회의 권력의 정점에 놓인 국왕의 기본적인 속성이었다.

5 기묘사화후 척신정치 등장의 배경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도 중종의 사림세력에 대한 입장은 대체로 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1521년(중종 16)에는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남곤의 당인 송사련(宋祀連)의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났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일파를 두둔하다 파직된 좌의정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남곤·심정 등에 비판하자 송사련이 안처겸 모친상에 모여든 조문객의 명단인 조객록(弔客錄)을 근거로 안처겸 일당이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하였다. 이로써 안당·안처겸·안처근(安處謹) 3부자를 비롯하여 권전·이정숙·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이약수(李若水) 등 많은 사림들이 처형되었다.

기묘사화 이후 정국은 훈구세력에게로 넘어갔고 중종 치세말까지 사림세력들은 철저하게 도태되었던 것이다. 사림세력은 도학정치를 표방, 정국운영의 이념과 원칙이 상대적으로 분명하였지만 다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훈구세력의 경우 이러한 부분에서 상대적인 취약성을 지녔고 따라서 기묘사화 이후 훈구세력 내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해져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특히 중종후반기로 가면서는 훈구세력 내에서 척신세력이 등장하여 정치를 농단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소생인 세자(후의 인종[조선](仁宗))과 제2계비 문정왕후의 소생인 경원대군의 왕위 계승 경쟁을 둘러싸고 양측의 척신세력이 쟁투하였던 때문이다.

중종은 세 명의 부인을 두었다. 첫번째 부인은 좌의정 신수근(愼守勤) 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이나 중종반정후 반정에 동조하지 않은 가문 내력으로 인해 왕비 책봉후 곧 폐비되었다. 제1계비는 반정공신 윤임(尹任)의 여동생이자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로 중종과의 사이에 효혜공주(孝惠公主)와 세자(후의 인종) 두 자녀를 두었는데, 세자를 낳다가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이다. 중종과의 사이에 네 공주들인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 경현공주(敬顯公主), 인순공주(仁順公主)를 출산한 끝에 1534(중종 29)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 후의 명종)을 낳았다. 문정왕후는 어머니를 잃은 세자를 양육하고 보호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자신의 소생인 경원대군을 낳은 후에는 세자가 아닌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고심하게 되었고 이러한 야망을 이루기 위해 동생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을 내세워 세자의 입지를 약화시켜나갔다. 세자의 외숙 윤임세력은 이를 극력 경계하여 양세력간의 긴장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6 김안로의 전횡

기묘사화후 정국 운영에서 국왕권이 정점에 놓이게 된 결과 차기 왕위 계승자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척신정치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즈음 윤임계와 윤원로·윤원형계의 척신간 대립 국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권신 김안로(金安老)이다. 김안로는 중종의 맏딸이자 세자의 누나인 효혜공주와 결혼한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의 아버지이다. 처음에 아들이 부마가 되자 벼슬이 뛰어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권력을 농단하다 심정·이행 등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아들로 인해 세자의 인척이 된 자신의 처지를 십분 활용하여 정계에 복귀할 계획을 세웠다. 곧 문정왕후나 여러 비빈들에게서 지위를 위협받고 있던 ‘세자의 보호’를 내세운 것으로 그 과정에서 1527년(중종 22) 작서의 변(灼鼠-變)을 일으켰다.

곧 세자의 탄일에 누군가가 쥐의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주둥이·귀·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東宮)의 북쪽 뜰에 있는 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일이 일어났는데 다음 달에는 대전(大殿)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 결국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박씨와 그 소생인 복성군(福城君) 미는 사사되고 두 옹주는 폐서인이 되었다. 이때 좌의정 심정은 박빈과 결탁했다 하여 사사되는 등 많은 자가 연루되었는데, 이는 김안로가 조작하여 자신의 정적을 제거한 것이었다.

이렇게 ‘작서의 변’을 계기로 김안로는 ‘세자 보호’라는 보호막을 내세워 정국에 재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기와 좋지 않은 자를 해치려면 반드시 동궁을 보호한다는 말로써 먼저 옥사를 일으켜 모든 사람을 그 속에 몰아 빠뜨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세자 보호’를 내세운 김안로의 계획은 주효하여 1531년(중종 26) 중종은 세자의 보호를 위해 김안로를 다시 불러들이게 되었고 이후 김안로는 최고의 권신이 되어 권력을 농단, 정국은 더없이 혼미해져갔다. 김안로가 권력을 전횡하는 과정에서 정광필·이언적(李彦迪)·나세찬(羅世纘)·이행(李荇)·최명창(崔命昌)·박소(朴紹) 등 사림계 인사들이 다시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다.

당시 김안로의 권세에 대해서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안로의 지위가 극히 높고 권세가 높아지자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임금에게서 나오지 아니하고 안로가 마음대로 하니, 혹 자기의 허물을 의논하려는 자가 있으면 사람을 사주하여 조정을 비난했다는 죄목을 씌웠다. …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이무선(李茂先)이 매와 사냥개가 되었다.”

김안로 일파의 정권 농단으로 인해 세자 보호를 위해 김안로를 등용한 중종의 원래 의도가 무색해지게 되었으며 김안로에 대한 비판은 중종에 대한 비판으로 전화되어갔다. 곧 “김안로·채무택·허항 등의 죄를 배척하는 글이 종루에 붙어 있었는데, 택(擇) 자는 임금의 이름자인 역(懌)을 쓰고, 항(沆) 자는 항(抗)자를 썼으니 모두 임금을 무시하는 말이었다.”는 기록은 당시 김안로 일파의 발호로 인해 중종의 권위가 바닥에까지 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1537년(중종 32) 김안로는 문정왕후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중종에 의해 제거, 사사된다.

김안로가 권세를 마음대로 전단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켜 왕실의 지친과 공경 대신들까지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이 계속되었으며 심지어는 국모(문정왕후)를 폐하고자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윤안인(尹安仁) 참판은 바로 문정왕후의 당숙인데, 몰래 김안로 내쫓을 것을 도모하여 비밀리 왕비에게 아뢰기를 ‘안로가 모의하여 왕비께 해를 끼치려 합니다’고 했다. 왕비가 크게 두려워하여 임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우니 임금이 까닭을 물었다. 이에 왕비가 대답하기를 ‘오랫동안 좌우에 모시고 있었는데 이제 폐함을 당하게 되니 슬퍼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왕비가 안로의 계교를 고하니 임금이 크게 노해서 즉시 죽이려 하였으니 그 권세가 큰 것을 두려워하여 윤안인에게 밀지를 내려 도모하라고 하였다.”

“김안로가 심정과 이항을 제거하고 나서 흉악하고 방자한 것이 날로 쌓여 갔는데, 정유년에 왕비(문정왕후)의 친족인 윤안인·윤원로(尹元老)가 김안로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았고 위에서도 김안로가 나쁜 줄 알았으나 누르기 어려웠다. 마침내 윤임이 대사헌 양연에게 말해 논핵·주벌하였다”는 기록은 그 과정을 잘 보여 준다. 1537년(중종 32)은 정유년이니 김안로는 허항·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진다.

7 대·소윤의 대립

김안로 일파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정국의 기본 구도가 바뀌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곧 세자와 경원대군을 둘러싼 정쟁 구도는 여전하였고 다만 정쟁의 축은 세자를 둘러싼 윤임 세력과 경원대군을 둘러싼 문정왕후·윤원로·윤원형 세력의 대립으로 구도를 잡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모두 파평 윤씨 일문이기에 윤임세력은 대윤(大尹) 세력, 문정왕후 세력은 소윤(小尹) 세력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의 대립은 중종의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되었다. 대·소윤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거론되는 것은 중종이 사망하기 직전인 1543년(중종 38년)이다. 당시의 “(대사간 구수담具壽聃이 이르기를) 풍문에 의하면 간사한 의논이 비등하여 윤임을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이라 하는데 각각 당여를 세웠다고 합니다.”는 기록은 중종말 대·소윤의 대립이 가시화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중종 말년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사자(嗣子)가 없음을 보고 (윤원형이) 형 윤원로와 함께 서로 어울려 헛소문을 만들어 동궁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문정왕후가 안에서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대윤이니 소윤이니 하는 말이 있게 되어 중종이 이 걱정으로 승하하였다.”는 기록은 중종말년 중종이 대·소윤의 척신정치로 인해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었음을 알게 한다.

8 대·소윤 대립의 연장, 정릉의 수난

1544년(중종 39) 중종은 57세의 나이로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서 사망하였다. 시호는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묘호는 중종(中宗), 능호는 정릉(靖陵)이다.

정릉은 원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소재 장경왕후릉인 희릉(禧陵)의 동원(同原)에 조성되어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명종대 현재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리로 이장되었다. 곧 중종 사후 세자(인종)가 즉위하였으나 수개월 만에 사망하고 경원대군(명종)이 신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중종비 문정왕후가 실권을 장악, 수렴정치를 행하게 되었는데 문정왕후는 자신의 사후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를 들어 중종릉을 희릉에서 분리해 현재의 자리로 이장, 정릉(靖陵)을 조성하였다. 새로운 정릉 자리는 지대가 낮아서 거액을 들여 흙을 쌓아 지대를 높였으나 매년 여름이면 강물이 능의 앞까지 들어오고 재실마저도 침수가 되어 다시 능을 옮기자는 논의까지 있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새롭게 조성된 정릉 옆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지대가 낮아 물이 나옴으로써 뜻을 이룰 수 없었고, 결국 문정왕후가 죽자 서울시 공릉동 자리에 새롭게 문정왕후릉인 태릉(泰陵)이 조성됨으로써 결국 정릉은 단릉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자 정릉은 파헤쳐지고 왕의 관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중종은 죽기 직전까지 대·소윤의 대립으로 마음을 졸여야 했으며 사망한 이후에도 여지없이 대·소윤 대립의 중심에 놓여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9 척신정치하 사림정치의 성장

중종은 치세 전반기 사림세력을 등용, 성리학의 도학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이것이 국왕권 강화라는 자신의 입지와 배치되자 기묘사화를 일으켜 개혁정치를 포기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중종은 앞서의 경험을 통해 사림세력을 계속 견제하였고 훈신세력 위주의 정국을 꾸려갔다. 이처럼 중종 중·후반기 정치운영에서 국왕권 강화의 문제가 가장 중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차기 왕위 계승자가 중요해지게 되었고 세자와 경원대군을 둘러싼 권력쟁탈전으로서의 척신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척신정치의 와중에도 기묘사림이 제시한 도학주의적 개혁 방안들은 서서히 조선사회에 뿌리내려갔다. 기묘사림의 도학주의는 조선의 국가이념이자 시대이념이었던 성리학이념과 일치,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세력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때문으로 중종 후반기 향약의 전국적 보급, 『소학(小學)』·『이륜행실(二倫行實)』·『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 등 유교 교화서의 광범한 보급,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시작된 서원건립운동 등을 그 중요한 지표로서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중종대는 기묘사화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사림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이자 기반 조성기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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