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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이성계[太祖李成桂]

새로운 왕조의 주인공이 된 변방의 무장

1335년(충숙왕 복위 3) ~ 1408년(태종 8)

태조이성계 대표 이미지

조선 태조 어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이성계는 고려 말의 홍건적의 난과 왜구 격퇴에서 무공을 세워 유명해졌으며,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한 손에 쥐었다. 신흥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고려를 대체하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통상적으로는 묘호를 따라서 태조라고 부른다. 1392년부터 1398년까지 7년간 재위하였으며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제2대 임금인 정종에게 양위하였다.

2 이성계의 가계와 탄생, 그리고 무장으로 이름을 날리다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처음에는 자가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었는데 이것은 이색이 지어준 것이다.

등극 후에 이름은 단(旦), 자는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전주에서 강원도를 거쳐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로 옮겨가면서 그 지역에 정착하였다. 당시 원(元)이 쌍성(雙城) 이북 지방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이안사는 따르던 무리 1천여 호를 거느리고 원에 항복하였고,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안사는 다루가치, 천호(千戶) 등으로 활약하면서 기반을 닦았다.

이공숙(李公肅)의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이행리(李行里)로 이안사가 죽은 이듬해인 1275년 3월에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이행리는 원의 세조(世祖)가 추진한 일본 정벌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삼살천호(三撒千戶), 몽골의 대탑실(大塔失) 등과 함께 참여한 바가 있었다. 이후 여러 여진(女眞)의 천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이행리는 알동을 떠나 적도(赤島)를 거쳐 의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뒤에도 이행리는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軍民)을 다스리는 다루가치의 일을 맡고 있었다.

이행리는 등주(登州) 호장(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등주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 최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이선래(李善來)이다. 이선래가 이후에 이름을 이춘(李椿)으로 바꾸었고, 몽골 이름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였으며 이행리가 죽은 후에 그 관직을 이어받았다.

이춘이 박광(朴光)의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으니 이자흥(李子興)과 이자춘(李子春)이다. 이춘이 1342년 7월에 죽자 큰 아들인 자흥, 몽골이름 탑사불화(塔思不花)가 관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탑사불화는 죽고, 그 아들은 아직 어렸다. 이에 이춘의 첩 조씨(趙氏)와 아들 나해(那海)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다. 이것을 막고 이자춘(李子春)이 관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기철(奇轍) 일파를 처단하고 기철 일파와 연계되어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는데, 이자춘, 몽골이름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가 이 때 내응하여 쌍성을 쳐부수었다. 이로 인하여 고려는 화주(和州)·등주·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와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홍헌(洪獻)·삼살(三撒)의 땅을 수복할 수 있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이자춘에게 대중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의 관직을 내리고 집을 주어 개성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후 이자춘은 1361년(공민왕 10) 봄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지만 그 해 4월 죽었다.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4) 화령부(和寧府)에서 이자춘과 최한기(崔閑奇)의 딸 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활솜씨가 뛰어났는지 이를 전하는 설화가 상당히 여러 편 전해온다. 이성계는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가 1361년(공민왕 10) 9월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목을 벤 일이었다.

그해 11월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성은 함락되고,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이듬 해 정월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 등 9원수(元帥)가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수도를 탈환하였는데, 이때 친병(親兵) 2,000명을 거느리고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2월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삼살(三撒)·홀면(忽面)의 땅에 쳐들어 왔는데 막지 못하게 되자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되었고, 나하추와 맞서 여러 차례 싸워 마침내 물리쳤다.

1364년(공민왕 13)에는 최유(崔濡)와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기황후가 원나라 황제를 움직여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고려왕으로 삼으려 하였고, 이를 위해 요양성(遼陽省)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 왔다. 이에 이성계는 최영(崔瑩)이 이끄는 군대에 우익으로 참여하여 수주(隋州)의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무렵 이성계의 외종형제이면서 여진 땅에서 나고 자란 삼선(三善)과 삼개(三介)가 이성계가 동북면을 비운 사이 여진족을 이끌고 쳐들어와 함주(咸州)를 함락시키고 화주(和州) 이북 지방을 차지하였다. 이성계는 이들을 무찔러 화주(和州)와 함주(咸州) 등 고을을 수복하였고, 왕은 이성계를 승진시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고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기철의 아들인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가 김백안(金伯顔)과 더불어 망한 원나라의 잔당을 모아 동녕부(東寧府)를 점거하고 고려의 북쪽 변방을 침범하고자 했다. 이에 공민왕은 이성계를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로 삼았고 이듬 해 이성계는 기병 5천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으며,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동녕부로 쳐들어 가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1372년(공민왕 21)에는 동북계(東北界)에 침입한 왜구를 방어하라고 화령부 윤(和寧府尹)에 임명되었다.

1377년(우왕 3) 3월에는 왜구가 강화부에까지 나타나니 이성계가 의창군(義昌君) 황상(黃裳) 등과 함께 서강(西江)에서 군사력을 시위하였으며, 5월에는 창궐한 왜구를 지리산에서 섬멸했고, 8월에는 서해도(西海道)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해주(海州)에서 격퇴했다. 1378년(우왕 4)에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를 통해 장차 개성을 침입할 상황이었다. 최영이 군대를 통솔하여 해풍군(海豐郡)에서 맞서 싸우다 패퇴하였는데 이성계가 합세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적을 섬멸하였다. 1380년(우왕 6년)에는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5백 척 규모의 왜구가 침입해 와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성계는 양광도(楊廣道)·전라도·경상도 3도의 도순찰사가 되어 변안열(邊安烈)·왕복명(王福命)·우인열(禹仁烈) 등과 함께 군대를 지휘하였으며 남원(南原)으로 내려가 아기발도(阿其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섬멸했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 부르는데,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1382년(우왕 8) 7월 여진인 호발도(胡拔都)가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였다. 이성계가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가 되어 이듬 해 호발도가 다시 침입하자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길주평(吉州平)에서 궤멸시켰다. 이어서 변방을 편안히 할 계책을 건의했는데, 군사 훈련하여 전쟁에 미리 대비할 것과 호(戶)의 크기 대신 경작지를 기준으로 지세를 걷게 하여 군량미 확보를 안정적으로 할 것, 권세 있는 가문이 수령의 자리를 독점하는 대신 공정하게 선출하는 방식으로 하고 장수할 만한 사람을 뽑아 군사를 거느리게 해야 한다는 것 등을 언급하였다.

1385년(우왕 11) 9월 함주(咸州)·홍원(洪原)·북청(北靑)·합란북(哈闌北) 등지에 왜구가 침입하니 자청하여 함주(咸州)로 가서 이지란·고여(高呂)·조영규(趙英珪)·안종검(安宗儉) 등과 함께 적군을 대파했다. 이 공로로 정원십자공신(定遠十字功臣)의 칭호가 더해졌다. 1388년(우왕 14)에는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 이인임(李仁任) 일당을 제거하였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 이후로 임견미나 염흥방이 임용했던 사람에 대한 처리문제나 형살(刑殺)의 중지 문제 등으로 최영과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3 위화도 회군에서 정몽주의 죽음까지

같은 해 명나라에서 요동 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였다.

이 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고, 이것은 원에서 명으로 중원의 패자가 변화하는 상황과 고려와 원의 특별한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비롯된 문제였다. 이에 우왕과 최영이 주도하여 요동정벌이 결정되었고, 이성계는 이에 반대하여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가지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니 네 가지 옳지 못함입니다.”라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다. 하지만 최영은 함께 가지 않고 조민수와 이성계만이 군대를 통솔하였는데 정벌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의 위화도까지 나아갔다. 위화도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다시 한 번 네 가지 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단행했다.

개성에 돌아와 숭인문(崇仁門)으로 입성하여 최영을 물리치고 고봉현(高峰縣)에 유배시켰다. 우왕은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이성계를 우시중으로 삼기도 하고 이성계와 조민수를 살해하기 위한 계책도 써봤지만 모두 실패한 후 왕위에서 폐하여졌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우왕이 왕씨가 아니고 신돈의 핏줄이라는 논리가 제기되었지만, 조민수가 우왕의 장인인 이임(李琳)의 인척인 관계로 이색과 논의하여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했다. 창왕은 이성계를 동북면삭방강릉도도통사(朔方江陵道都統使)로 삼고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그리고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면서 정치·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 해 다시 우왕과 창왕의 혈통을 문제 삼아 우왕은 강릉으로 옮기고 창왕은 강화로 내쫓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신종(神宗)의 7대손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옹립하니, 이가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이성계를 수시중(守侍中)으로 임명하였고, 우왕과 창왕을 죽인 다음에는 심덕부(沈德符)·정몽주(鄭夢周)·지용기(池湧奇)·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박위(朴葳)·조준·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9 공신 중 한 명으로 봉하였으며,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으로 화령군개국충의백(和寧君開國忠義伯)이 되었다.

한편 이성계는 정치적 권력을 손에 넣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살해당할 위기가 있었는데, 이는 기존 세력과의 충돌이었다. 1389년(창왕 1) 토지 겸병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고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사전(私田)을 혁파를 주장한 것도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었는데, 기존 세력은 이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였다. 이러한 논란은 당시 기존 세력과 신흥 세력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1390년(공양왕 2) 5월 윤이(尹彝)·이초(李初)가 명나라 황제에게 “이성계가 자신의 인척으로 가짜 왕을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고 무고한 것에서 비롯된 이초의 옥(彛初─獄)으로 이색(李穡)·조민수(曺敏修)·이임(李琳)·변안열(邊安烈)·권중화(權仲和)·우현보(禹玄寶)·우인열(禹仁烈)·정지(鄭地)·김종연(金宗衍)·권근(權近) 등이 옥에 갇히거나 유배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문제를 두고 공양왕과도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정몽주도 기존과 달리 반이성계 노선을 분명히 하게 된다.

두 진영의 대결은 점차 심화되어 1392년(공양왕 4) 3월 정몽주는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정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난 것을 틈타 정도전·조준·남은(南誾)·윤소종(尹紹宗)·남재(南在)·조박(趙璞)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여 삭탈관직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어 사람을 보내 이들을 처형하고자 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타개하였고, 이후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 등을 조정에서 몰아내었다. 정몽주 일파가 제거된 후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공양왕도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찾아오고 이성계와 맹약을 맺겠다고 하면서, 스스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하였으나 이미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4 건국, 한양천도 그리고 왕자의 난

왕대비인 공민왕의 비 안씨의 교지를 받드는 형식을 빌어 공양왕을 원주(原州)로 쫓아내고 배극렴(裵克廉)·조준·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남은·장사길(張思吉)·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 등이 국새(國璽)를 들고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가 왕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였고, 1392년 7월 17일 마침내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가 즉위한 처음에는 즉위교서에서 밝힌 바대로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종묘를 옛 제도에 맞게 할 것·좌주문생의 폐해를 개혁하여 문무 과거제를 정비할 것·관혼상제와 관련된 풍속을 바로잡을 것·수령은 천거로 선발할 것·충신 효자 의부(義夫) 절부(節婦)를 권장할 것·국둔전(國屯田)을 폐지할 것 등과 같은 정치 개혁을 표방하였으며, 건국과정에서 죄를 받은 사람들의 벌을 감하여 주는 조치도 뒤따랐다. 물론 고려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기로(耆老)와 백관을 모아 국호를 논의하게 한 다음 명나라의 재가를 받는 형식을 취하여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확정하고 1393년 2월 15일부터 사용하였다.

이어 사대(四代)의 조상에게 존호를 올려 목왕(穆王)과 효비(孝妃), 익왕(翼王)과 정비(貞妃), 도왕(度王)과 경비(敬妃), 환왕(桓王)과 의비(懿妃)라고 하였고, 문무 백관의 관제(官制)를 정비하고 품계별 관복의 복식도 정하여 새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공신도감을 두어 건국과정에서의 공로를 치하하고 개국공신으로 삼아 포상하였다. 개국공신과 별개로 유만수(柳蔓殊)·최영지(崔永沚)·최단(崔鄲)·김입견(金立堅)·조임(趙琳)·윤사덕(尹師德)·황희석(黃希碩) 등을 원종공신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사이에서 이방우(李芳雨)·이방과(李芳果)·이방의(李芳毅)·이방간(李芳幹)·이방원(李芳遠)·이방연(李芳衍)·경신공주(慶愼公主)·경선공주(慶善公主)를 두었고,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와 사이에서는 이방번(李芳蕃)·이방석(李芳碩)·경순공주(慶順公主)를 두었는데, 즉위 후 왕자들을 군으로 봉하는 조치가 취해져서 이방우는 진안군(鎭安君)·이방과 영안군(永安君)·이방의 익안군(益安君)·이방간 회안군(懷安君)·이방원 정안군(靖安君)·이방번 무안군(撫安君)·부마인 이제(李濟) 흥안군(興安君)·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의 아들 이양우(李良祐)는 영안군(寧安君)이 되었다.

새 국가 건설 이후, 태조가 가장 주요하게 추진한 사업은 새 수도로의 천도였다. 즉위 직후 한양을 천도지로 언급하면서 천도할 뜻을 비쳤으나 기반 시설을 갖추지 못한 한양으로 옮기는 것은 백성들의 민가를 빼앗는 일이라고 해서 신하들의 반대를 받았다. 이후 계룡산을 비롯해서 무악, 한양, 도라산(都羅山) 터, 광실원(廣實院) 동쪽 등의 지역을 신하들을 거느리고 실제로 답사를 하고 천도 대상지로서의 가능성 여부를 확인하였다. 그런 다음 1394년(태조 3) 8월 도평의사사에서 건의를 하는 형식을 빌어 한양을 새 수도로 결정하였다.

곧바로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였고, 권중화와 정도전 등을 한양으로 보내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12월 4일 태조가 직접 지켜보는 속에서 종묘의 터를 닦는 것으로 공사가 시작되었고, 이듬해 9월 29일 마침내 종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준공 직후인 윤9월 13일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고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였고, 10월에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여 궁궐의 이름은 경복궁(景福宮), 전각의 이름은 강녕전(康寧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근정전(勤政殿)·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근정문(勤政門)·정문(正門)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해를 넘겨 1396년(태조 5) 1월부터 도성을 쌓는 일이 시작되어 2월까지 공사를 한 후, 8월에 다시 인부를 징발하여 9월까지 공사를 더 해서 성 쌓는 일을 마무리 하였다. 이 때에 숙청문(肅淸門),·흥인문(興仁門)·숭례문(崇禮門)·돈의문(敦義門)의 4대문과 홍화문(弘化門)·광희문(光熙門)·소덕문(昭德門),·창의문(彰義門)의 4소문을 두었다.

그리고 제도 정비에도 힘써, 1394년에 정도전이 육전체제(六典體制)를 따라 조선시대의 통치 조직과 통치 이념의 종합적인 체계를 제시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완성하였고, 1395년에는 정도전과 정총이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였다. 같은 해 정도전이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지어 재상, 대관, 간관, 위병, 감사, 수령 등의 제도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면서 올바르게 운영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1397년(태조 6)에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간행하여 1388년(우왕 14)부터 1397년(태조 6)까지의 법령을 수집하고 분류해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법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즉위 직후에 여러 왕자들 가운데 계비 강씨의 소생이면서 막내아들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결정함으로써 분란의 불씨를 만들었다. 이후 국가의 제도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병을 혁파하는 문제를 두고 왕자들과 정도전·남은 등의 공신세력 간의 대립이 발생하고, 그것을 기화로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다. 사병혁파로 인해 군권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이방원은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박위 등을 갑자기 습격하여 살해하였으며,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보내는 도중에 살해하였고, 방석의 동복형 방번도 함께 죽였다.

이로써 방원의 심복인 하윤(河崙)·이거이(李居易) 등이 실권을 잡고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 자신이 사양하고 장자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안군(永安君) 방과(芳果)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실권은 방원 일당이 장악하였다. 난이 일어난 지 10일도 되지 않아 태조는 드디어 방과에게 선위하였으며, 이가 정종(定宗)으로 조선의 2대 임금이다.

5 결말

1400년(정종 2)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 곧바로 2월에는 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1월 정종으로 부터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니 3대 임금인 태종이다. 이로써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정종 재위기간과 태종 즉위 초반에 태조는 서울을 떠나 오대산으로 떠난다던지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했고, 회암사(檜巖寺)에 머물면서 사찰을 중수(重修)하는 일 등을 하였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과의 거리를 두는 모양새였다. 이 때문에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사신을 보내 돌아오도록 청하였으나 정작 10여 명이나 되는 사신이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해서 이른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함흥차사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난 것 자체가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태조는 조사의(趙思義)의 난 직후인 1402년(태종 2) 12월 개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시점에 태종으로 하여금 한양으로 재천도할 것을 명함으로써 정종 즉위 후 개성으로 돌아간 것을 바로 잡고 자신의 업적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으며, 태종은 1405년(태종 5) 10월 한양으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한양은 확고한 조선의 수도가 될 수 있었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別殿)에서 죽었고, 9월 9일 건원릉(健元陵)에 장사하였다.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묘호(廟號)는 태조(太祖)라고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주어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으로 불리게 되었고, 고종대에 대한제국을 세우면서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로 고쳐 부르고 강헌이라는 말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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