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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닦다

1367년(공민왕 16) ~ 1422년(세종 4)

태종 대표 이미지

헌릉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출생과 성장

태종은 본명이 이방원(李芳遠), 자(字)는 유덕(遺德)이다. 1367년(공민왕 16) 5월 16일 신묘일에 함흥부(咸興府) 귀주(歸州)에서 태조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무렵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공민왕(恭愍王)의 신임을 얻어 원의 침입을 막아 내고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던 시기였다.

다른 형제들이 그다지 문재(文才)가 있지 않았던 것에 비해 이방원은 어렸을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태종은 일찍 죽은 동생인 방연을 제외하고 태조의 자식들 중 유일한 문과 급제자였다. 그는 16세인 1382년(우왕 8)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이듬해인 1383년(우왕 9)에 병과 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문과의 좌주(座主)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우현보(禹玄寶),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민(李仁敏)이었으며 당시 같이 급제한 동년(同年)으로는 김한로(金漢老), 심효생(沈孝生) 등이 있었는데, 김한로는 태종의 사돈으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장인이 되었으며, 심효생은 방석의 장인으로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야사에서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가 태종의 영특함을 부러워하였으며, 태조는 태종의 과거 급제 당시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며, 문한을 담당하는 제학(提學)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그 임명장을 소리 내어 몇 번씩 읽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태조가 문신들을 초청할 때면 시를 짓는 등의 일을 담당함으로써 교유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등 무장 출신인 태조가 할 수 없었던 영역을 태종이 보완할 수 있었다.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民氏)의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민제(閔霽)의 딸이다. 6대조 민영모(閔令謨) 이래로 유력한 중앙 관료 집안이었다. 민제는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 검소한데다가 성리학을 존숭하여 이단을 물리치는 데 힘썼다. 또한 평생 존귀함과 영화로움이 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부귀한 티를 내는 바가 없어 태종이 평생의 사부로 존경하였다고 전한다.

2 조선 개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조선 개국 전까지 태종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1388년(창왕 1) 태종은 이색(李穡)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明)에 다녀왔다. 당시 이성계를 중심으로 정도전 등 훗날 조선을 개국하는 세력들과 대립하고 있었던 이색은 명에서 고려를 감국(監國)해 줄 것과 창왕(昌王)의 입조를 청하기 위해 이숭인(李崇仁), 김사안(金士安) 등과 명에 가게 되었다.

이색은 자신이 사신으로 고려를 떠난 사이에 정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태조의 아들을 함께 데려가길 청하였고 이때 23세인 태종이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발해(渤海)에서 풍랑을 만났으나 태종은 매우 태연자약했다고 전한다.

공양왕대인 1390년 밀직사(密直司)의 대언(代言)을 맡았으나, 이듬 해 어머니 상을 당하여 속촌(粟村)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시기 이성계 세력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1391년 3월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던 이성계가 낙마하였는데, 이 기회에 정몽주(鄭夢周)가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조박(趙璞), 윤소종(尹紹宗), 남재(南在) 등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시묘살이 하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벽란도(碧瀾渡)에 유숙하고 있었던 태조를 찾아가 빨리 성 안으로 들어가도록 재촉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정도전, 조준 등의 죄를 묻는 탄핵 상소는 이성계를 조준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태종은 머뭇거리는 태조를 대신하여, 조영규(趙英珪)·조영무(趙英茂)·고여(高呂)·이부(李敷)등 자신의 휘하 인사를 동원하여 정몽주를 그의 집 동구에서 살해하였다.

이는 이성계 세력의 마지막 위기이자 개국의 걸림돌을 해결한 것이었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백관들의 추대와 왕대비의 교지, 공양왕의 선위라는 형식 속에서 왕좌에 즉위하였다.

3 개국 후의 위기부터 제1차 왕자의 난까지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은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다.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새로운 권력 구조에서는 배제되었다. 왕실과 종친을 배제하는 속에서 군권에서도 제외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에도 책립될 수 없었다. 또한 세자로 책봉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1394년(태조 3) 명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하자, 태종이 사신으로 떠났다.

명은 조선이 여진인들을 유인하여 요동을 침범하려 한다는 의문을 품고, 조선 사신을 요동에서 저지하고 맞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이때 사신으로 가 남경에서 직접 홍무제를 만나 명의 의구심을 풀었다.

당시 남경에 가는 길에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영락제(永樂帝)를 만났는데, 서로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태종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특히 1398년 진도(陣圖) 연습과 요동 정벌을 계기로 휘하의 사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였는데, 마침 그 당시는 아버지 태조가 병석에 누워있던 때였다. 이에 태종은 8월 26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과 세자인 방석, 그 형인 방번 등을 일거에 제거하는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를 계기로 일거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세자 추대를 사양하고, 장자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형인 영안군(永安君)을 세자로 세웠다. 자신은 단지 정안공(靖安公)으로 개봉하면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였고, 정사공신(定社功臣)을 논의 결정하여 1등에 올랐다. 이어 개국공신에도 추가로 올랐다.

4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즉위하다

1399년(정종 1)에는 조례상정도감을 설치하였는데, 태종이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다.

또한 강원도와 동북면의 군사를 나누어 맡고 다른 형제들과 종친, 조영무, 조온(趙溫) 등 자신의 세력 일부에게만 군권을 집중시켰다.

정종[조선](定宗)은 자식이 많기는 하였으나, 적처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조박의 친척인 불노(佛奴)를 원자로 하여 궐 안에 들이기는 하였으나, 결국 이듬해인 1400년(정종 2) 초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태종이 세자로 책봉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노린 회안군 방간과 태종 사이의 대결이었다. 이들은 개성 시내의 남산(자남산이라고도 함)에서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는 일대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결국 태종이 승리하였다.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며 이제 태종 이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다. 시가전이 종료된 3일 후인 2월 1일에 하윤의 주청에 따라 방원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약 9개월 후 정종은 방원에게 선위하였다.

세자로 책봉되고 선위를 받기 전까지 태종은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건국 후 계속 문제가 되었던 군권을 일원화하여 사병을 혁파하여 삼군부로 일원화시켰으며, 이어 관제를 개정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議政府)로 개편하였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쳐 삼군부와 의정부에 군권을 적절히 배속함으로써 군권의 쏠림이나 지나친 분산을 막았다. 또한 승정원(承政院)을 따로 두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은 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고, 태종 때의 왕권 강화 기반을 조성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었다.

5 조공-책봉 관계의 성립

조선 건국 후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명과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태조대에는 조선이 요동을 침공할지 모른다는 명의 의구심을 기본으로 표전문 문제 등 여러 사안으로 인하여 명과 관계가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즉위 이후 1401년(태종 1)에 건문제(建文帝)로부터 국왕으로 책봉 받는 고명과 인신을 받았으며, 영락제가 건문제를 몰아낸 후에는 영락제로부터 다시 책봉을 받았다.

이후 조선과 명 사이에 거주하는 여진인의 귀속 문제를 두고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었고, 또한 조공 문제에서 처녀·환관·말·소 등에 대한 무리한 명의 요구가 있기도 하였으나, 서적·약재·역서 등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나라의 기강을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었다. 이로써 조선과 명은 조공-책봉의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6 관제의 정비

태종은 즉위 전 관제 개정을 통해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립한 데 이어, 1401년(태종 1)에는 문하부(門下府)를 혁파하여 이를 의정부에 귀속시키고, 그 때까지 의정부합좌에 참여했던 삼사·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삼군총제를 제외하였다. 이로써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였다. 한편 간쟁을 관장하던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독립시켰다. 삼사와 삼군부는 사평부(司平府)와 승추부(承樞府)로 개정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다시금 이를 개정하여, 의정부-각사 총관, 사평부-재정, 승추부-군정의 삼자 체제로서, 육조가 사실상 유명무실하였던 것에서 사평부와 승추부를 혁파하여 각각 호조와 병조로 그 권한을 돌리고, 인사에 있어서도 의정부 정승이 겸직하는 방식을 없앴다. 육조 장관의 직급을 정2품 판서로 높임으로써 전반적으로 육조의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외에도 육조의 각 조마다 세 개의 속사(屬司)를 설치하고, 의정부·사헌부·사간원·승정원·한성부(漢城府)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이렇게 육조가 관장하거나 지휘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屬衙門制度)를 정하였다. 여기에 육조를 각각 관장하는 대언(代言 : 이후 承旨로 개칭됨)을 두게 함으로써, 육조의 기능을 강화하고 국왕이 이를 직접적으로 관장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한 것이다.

1414년(태종 14)에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계문하도록 함으로써, 왕-의정부-육조의 국정체제를 왕-육조의 체제로 전환해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중앙관제 뿐만 아니라 지방 제도도 개편하였다. 1413년(태종 13)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西北面)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로 고치고,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고쳤다. 아울러 군·현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 ‘산(山)·천(川)’자 등으로 바꾸면서 1유도부(留都府)·6부(府)·5대도호부(大都護府)·20목(牧)·74도호부·73군·154현으로 지방 행정을 정비하였다.

이듬 해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였다.

이외에도 전라도의 임내(任內)를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하면서 혁파하였고, 향·소·부곡도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시켰다.

7 한성 재건설 – 창덕궁과 준천, 시전 행랑

정종은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으로 되돌아갔다. 태종은 즉위 후 부왕인 태조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를 위한 가장 큰 당면과제로 대두된 것이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대에도 한양 재천도는 쉽지 않아서 4년여의 진통 기간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1404년(태종 4) 천도를 결정하고 1405년(태종 5) 이를 실행하였다.

천도를 결정한 후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이궁을 건설하고 이곳에 입어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창덕궁(昌德宮)이다.

한양 재천도를 통해 태조와 관계를 개선한 태종은 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득이한 것 외에 대규모의 건축행위를 하지 않았고, 별다른 기념물도 조성하지 않았다. 이는 부왕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태조 사후 이러한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면서 태종은 본격적으로 한양에 대한 정비에 들어가, 자신의 왕권을 적극적으로 표상하였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사는 개천(開川)(청계천) 준천에 이어 시전 행랑을 건설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한양으로 천도하던 당시에도 개천을 준설하고 도로를 닦는 작업이 벌어지기는 하였으나 관리들로부터 많지 않은 정부(丁夫)를 차출하여 약간의 수리를 가한 정도에 불과하였다.

본격적인 개천준설은 1411년(태종 11)에 들어서 진행되었는데, 윤12월 14일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여, 이듬해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1달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공사는 충청, 전라, 경상도 삼도에서 5만 2천 8백 명의 군인을 동원할 정도로 큰 규모의 공역이었다. 시전 행랑의 건설은 도성에 필요한 상업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역 와중에 행랑을 건설하는 인부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에는 거창한 규모로 경회루(慶會樓)를 새로 지었다.

또한 1차 공역 때 원래 예정 구간인 혜정교~종묘 동구 앞이 아니라 창덕궁 앞에 조방이 들어설 행랑을 먼저 조성하였다. 또한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건설하여 이곳에 종을 주조하여 달았다. 이 종은 태조대 종루(鐘樓)의 종에 대응할 만한 것이었으며, 태종을 칭송하는 명문을 새겼다.

그 결과 태종 14년 무렵에는 성곽을 제외한 전반적인 도성 내 설비가 완료되었다. 또한 태종 13년부터 14년에 걸쳐 중사(中祀) 이하 소사(小祀)까지 사전(祀典) 체제가 정비되면서 사전에 올라간 수도 주변의 제단들도 이 무렵까지는 대부분 개축되거나 신축되었다. 태종 스스로도 이 무렵 ‘경읍(京邑)의 체모’가 대체로 완성되었다고 여겼으며, 하윤은 도성형승지곡(都城形勝之曲)과 도인송수지곡(都人頌禱之曲) 2편을 올렸다.

하윤의 악곡은 태조대 정도전(鄭道傳)이 올린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에 짝하는 것이라 하겠다.

태종은 마지막으로 상왕으로 있으면서 성곽까지 보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양의 모습을 일신하였다.

8 불교계를 정비하고 오례의 기틀을 마련하다

1405년(태종 5) 한양 천도 후 대대적인 불교 개혁에 착수하였다. 국가가 지정한 사원 이외의 사원전(寺院田)과 노비를 환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킨 것이다. 당시 11종 242사만 공인하고 사원전 3,4만 결과 노비 8만 명이 몰수되었다.

이는 전체 사원전과 노비 규모의 약 8할을 국고로 귀속시킨 것이었다. 2년 후에는 7개로 종파를 축소하였으며, 왕릉 옆에 사찰을 두는 능사 제도도 혁파하였다. 또한 1415년(태종 15)에는 고려 이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상원 연등회(燃燈會)를 폐지하였다.

불교계를 정비하는 것과 동시에 전국의 향교(鄕校)를 강화하는 조처를 내렸다. 1406년(태종 6)에는 향교의 진흥책을 마련하였고, 1407년(태종 7)과 1411년(태종 11)에는 권학사목(勸學事目)과 국학사의를 정하고, 4부 학당을 건축하였다. 또한 외학제를 정하고 재사(齋舍)를 갖추었다. 이러한 제도 정비와 함께 1417년(태종 17)부터는 학당의 경비를 지급하였다.

한편 국가 의례도 정비되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한 조선에서는 사전의 정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태조대부터 종묘, 사직의 건설 등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대중소사의 전체적인 체계가 조정되고 길례의 종류가 마련되어 등급별 세세한 규정들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태종대였다. 이러한 틀은 세종대의 일부 수정을 거쳐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계승되었다.

1413년(태종 13)~1414년(태종 14) 사이에는 사전(祀典)이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는데, 대중소사 등급에 따른 재계(齋戒) 규정, 문묘 등급 조정, 여러 단유(壇壝) 개정, 향관(享官) 법식, 소사(小祀) 의식 개정 및 악해독과 명산대천 등 산천제 체계 조정 등이 대표적으로 이 시기 이루어진 정비였다.

9 양전과 토지제도의 개편

태종대에는 양전사업을 통해 국가적으로 세금을 거두어드릴 토지를 확보하였다. 1405년(태종 5)부터 이듬해까지는 6도를, 1411년(태종 11)부터 1413년(태종 13)에는 평안·함경도까지 양전을 시행해 모두 120만여 결 이상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이는 고려 말 왜구 침입 등으로 인해 연해 지역이 전황지여서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에서 매우 늘어난 양이었다.

또한 면세전을 축소하고 과전의 결수를 줄임으로써 세금을 거두어드릴 토지를 확대하였다. 1401년(태종 1)에 별사전(別賜田)을 혁파해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였고, 1405년(태종 5)에는 1∼18과의 과전에서 5결씩 감하여 군자전(軍資田)으로 충속하였다. 외방 거주를 원하는 전직 관리의 과전은 5∼10결로 제한하였다. 1409년(태종 9)에는 과전법(科田法)을 개정해, 세를 물지 않았던 사원·공신전(功臣田)을 유세지로 편입시켰다.

사원전 역시 혁파하여 3만~4만여 결을 확보하였으며, 1409년(태종 9)에는 한량관의 군전을 몰수해 군자전으로 하였다. 그리고 공신전전급법(功臣田傳給法)을 정해 공·사 천인의 자손과 기첩(妓妾) 및 천첩이 공신전을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외에도 1412년(태종 12)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으며, 1414년(태종 14)에는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지급 액수를 줄였다. 또한 군자전의 과전 절급을 중지하였고, 겸직이 없는 검교(檢校)를 폐지하였다. 평양·영흥 토관(土官)의 수를 반으로 줄이면서 녹과의 3분의 2를 줄였다.

1417년(태종 17)에는 1403년(태종 3) 이래 7차에 걸친 사전의 이급 논의를 매듭지었다. 즉, 각종 공신전·과전 등 총 11만 5,340결의 3분의 1을 충청·경상·전라도로 이급하고, 이속된 토지는 군자전으로 귀속시켰다.

10 숙청과 왕권 강화, 그리고 세자 교체

태종은 즉위 과정에서 경쟁상대가 될 인물들을 이미 제거한 데다가 즉위 이후에도 외척, 종친, 공신세력들을 차례차례 제거하였다.

1404년(태종 4) 가장 먼저 제거 대상이 된 것은 이거이(李居易) 부자였다. 이거이는 태조와 태종의 사돈이었으나, 3년 전 사병 혁파를 놓고 불만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이거이와 이저(李佇) 부자를 귀향시켰다. 1407년(태종 7)에는 그의 처남으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1406년(태종 6) 세자에게 선위할 의사를 표시했을 때 이들이 세자를 끼고 집권을 시도했다는 명목이었다.

1409년(태종 9)에는 이들과 연계하여 이무(李茂)·윤목(尹穆)·유기(柳沂) 등을 목 베었으며, 1415년(태종 15)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閔無恤)·민무회(閔無悔) 형제를 서인으로 폐하고, 이듬 해 사사하였다. 같은 해 공신으로서 제1차 왕자의 난 때 군사력의 기반이었던 이숙번(李叔蕃)도 축출하였다.

1414년(태종 14)에는 다른 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해 정치 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을 견제할 만한 신권이 없었다. 이어 1418년(태종 18) 모범적인 행실을 보이지 않은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세종을 즉위시키고, 상왕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도 제거함으로써 아들의 왕권에 도전할 세력도 제거하였다.

11 태종의 자손, 죽음 이후

태종은 아들 12명과 딸 17을 두었는데, 그중 원경왕후 민씨와 사이에서 아들 넷과 딸 넷을 두었다. 아들은 첫째부터 양녕대군, 효령대군(孝寧大君), 세종(世宗),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서 후사는 셋째인 충녕대군, 곧 세종(世宗)이었다. 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 경정공주(慶貞公主), 경안공주(慶安公主), 정선공주(貞善公主)다.

1418년(태종 18)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았으며, 1421년(세종 3)에는 성덕신공태상왕으로 가봉(加封)되었다. 시호는 공정예철성렬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恭定睿哲成烈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며, 묘호(廟號)는 태종이다.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으며, 사적 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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