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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韓明澮]

수양대군의 책사, 세도가가 되다

1415년(태종 15) ~ 1487년(성종 18)

한명회 대표 이미지

한명회선생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압구정의 주인

현재 대한민국의 대표적 부촌 중의 하나인 압구정동의 이름은 한명회(韓明澮)가 말년에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으로 한강 가에 지은 정자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압구정(鴨鷗亭)과 관련하여 한명회가 오만한 행동으로 인해 변을 당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당시 한명회의 압구정은 풍광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조선에 온 중국의 사신이 그곳에 가서 놀기를 청하였다. 한명회는 사신을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궁중에서 쓰는 햇볕을 막는 차일을 빌리려 성종[조선](成宗)에게 청했는데 허락받지 못하자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일어났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대간들이 임금을 우습게 여겨 그렇게 행동한 것이라며 한명회를 죄 줄 것을 청하여 귀양을 갔다고 한다.

이렇듯 압구정은 당대 제일의 명승지였다. 성종을 비롯하여 서거정(徐居正), 김종직(金宗直), 남효온(南孝溫) 등 한명회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김성일(金誠一), 이황(李滉), 김창협(金昌協), 안정복(安鼎福), 정약용(丁若鏞) 등 후대의 사람들까지 방문하여 시를 읊어 현전하는 압구정을 노래한 시가 수십 편이다.

압구정에 관련된 일화만 보더라도 한명회는 당시에 최고의 부귀를 누리면서 살았던 권력의 실세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그는 생전에 공신에 4번이나 책봉되고, 두 딸을 각각 예종[조선](睿宗)과 성종의 왕비로 들였으며, 자신은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서도 드문 영화를 누렸던 사람이다. 한명회가 이러한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타고난 지략으로 세조[조선](世祖)를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이자 세조가 믿고 의지하는 최측근의 책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과 단종[조선](端宗) 폐위를 사실상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이라는 것, 축재와 사치를 즐기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따른다. 이렇듯 상반된 평가 속에서 그의 삶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다뤄졌다.

2 칠삭둥이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본관은 청주, 자는 자준이며 아버지는 한기(韓起), 어머니는 이적(李逖)의 딸이다. 그는 일곱 달 만에 태어난 칠삭둥이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사지와 얼굴이 미쳐 다 완성이 되지 않아서 집안에서는 그를 기르지 않으려고 하였고, 그의 집 하녀가 그를 솜으로 싸서 지극정성으로 길렀다고 한다.

한명회의 집안은 고려 말 이래로 명문거족이었다. 종조부인 한상경(韓尙敬)이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고, 그의 집안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집안과 3중의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세조의 며느리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아버지인 한확(韓確)과는 9촌 관계이다. 그러나 한명회는 어릴 때 부모가 모두 죽어 일찍 고아가 되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아 종조부인 한상덕(韓尙德)에게 의탁하였다고 한다. 한상덕은 어린 명회의 기상을 높이 사서 ‘집안을 일으킬 아이’라고 기대를 했다.

한명회는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면서 40살이 가까이 되도록 이렇다 할 밥벌이를 하지 못한 채 한가한 삶을 지냈다. 그나마 충순위(忠順衛)에 소속되어 국왕의 측근에서 호위하는 여러 무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진법을 익힌 것이 후일 그의 행보에 도움이 되었다.

한명회는 38살이 되던 1452년(문종 2)에 개성의 경덕궁 지기로 드디어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미관말직이었고, 그나마 그 곳에서도 동료 관원들에게 멸시를 당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한명회의 초년 운은 좋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단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평생 친구 권람(權擥)과 함께 전국을 유람하며 마음을 나눴다는 것이다. 권람은 권근(權近)의 손자로, 1450년(문종 즉위년)에 장원급제하여 병서를 교정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 일의 책임자가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권람은 이때의 만남을 계기로 수양대군의 식객이 되었고, 한명회를 그에게 소개하였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치 오래 알던 사이인 양 친근하게 대했고, 이 자리에서 한명회는 자신의 모든 책략을 남김없이 말하였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말을 듣고 큰일을 도모하기로 결심하고 앞으로의 모든 은밀한 계획과 모의는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게 되었다.

3 세조의 자방

한명회는 친구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을 만나 명실상부 그의 자방이 되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계유정난은 한명회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한명회는 일을 계획할 때 자신이 충훈부에서 만났던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유수(柳洙) 등의 무인 30여명을 대거 추천하였다.

이들은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 정난공신에 봉해진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가장 인생 역전에 성공한 사람은 당연히 한명회였다. 그는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되고 계유정난이 일어난 해에 일약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동부승지가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세조가 단종의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어 한명회는 다시 좌익 1등 공신에 책봉되고 우승지로 승진하면서 세조의 최측근에서 승진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듬해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단종 복위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명나라 사신을 위로하는 연회 자리에 국왕을 호위하는 운검으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이 선발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왕과 세자를 비롯하여 핵심 인사들을 주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미리 낌새를 눈치 챈 한명회가 기지로 이를 막으면서 복위 모의는 수포로 돌아갔고 한명회는 이 일로 세조의 더 큰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단종을 따른다는 혐의가 있는 단종의 외가, 금성대군(錦城大君) 등의 정치세력을 차례차례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왕위는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단연 큰 공을 세운 한명회는 이후 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처벌된 신료들의 재산과 노비를 상으로 받아 남부럽지 않게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이어서 병조판서 겸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지방, 특히 북방 4도에서 군무를 통괄하며 여진족과의 충돌을 진정시키고 국방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세조의 한명회에 대한 신임은 대단하여 북방 지역의 군사 업무는 모두 세조의 특명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의경세자(덕종)의 사망으로 해양대군(예종)을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명나라로의 사신 업무도 한명회가 맡았다. 결정적으로 그의 딸이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한명회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2년 뒤 한명회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이 때 나란히 영의정, 좌의정에 임명되었던 신숙주(申叔舟), 권람과는 혼인관계로 돈독한 사이였다. 신숙주의 아들에게는 한명회의 딸이, 권람의 딸에겐 한명회의 동생이 각각 배필이었다.

한명회는 세조의 전폭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공신들과는 혼맥을 통해 확고한 정치적 지위를 다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李施愛-亂)으로 무소불위일 것 같던 그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난이 일어나자 각 지방에서 수령을 죽이고 이시애에게 호응할 정도로 나라 전체가 크게 술렁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시애는 자신들의 일에 한명회와 신숙주가 연루되었다는 소문을 냈고, 이 소식을 들은 구치관(具致寬) 이를 세조에게 보고하여 한명회는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혐의가 없다고 판단되어 곧 풀려났지만, 이 사건으로 한명회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는 난을 평정한 공이 있는 사람들을 적개공신에 봉할 때 한명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위기를 한명회는 예종의 즉위 직후 남이(南怡) 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면서 익대 1등 공신에 책봉되어 성공적으로 극복,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4 임금의 장인, 조정의 원로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한명회의 사위인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바로 성종이다. 자을산군의 즉위에는 장인인 한명회의 후광이 큰 역할을 했다. 예종 승하 당시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자연스레 왕위의 후보자로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의 아들들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장자인 월산군(月山君)이 아닌 자을산군이 선택된 데에는 아마도 한명회가 그의 장인이었던 까닭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즉위 당시 12살 밖에 되지 않았기에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한명회도 임금의 장인이자 국가의 원로대신으로서 원상과 군권을 관장하는 병조겸판서(兵曺兼判書)로 재직하였다. 이 때 다시 한번 좌리 1등 공신에 봉해져 그의 정치적 지위는 국왕 말고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듯 보였다. 이 공신 책록에 대해서는 딱히 이룬 공이 없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려한다는 이유로 대간에서 이의 제기를 하였지만 성종이 강행하여 성사시켰으며, 한명회의 친인척들이 대거 포진되어 한명회 입장에서는 다소 떳떳하지 못한 이력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명회는 왕의 친부인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고 명나라로부터 책봉 받고, 종묘에 부묘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 한 번 왕실 척족으로서의 위상을 확인한다. 신료들 대부분은 의경세자를 추존하는 것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명나라에 주청하는 문제는 사안이 다른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한명회는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덕종을 종묘에까지 부묘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명회의 막강한 정치적 지위는 대간의 집중적인 견제 대상이 되었다. 그의 딸이자 성종의 왕비였던 공혜왕후(恭惠王后)가 후사도 없이 사망하고, 성종이 성년이 되면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한명회의 처지도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한명회는 청정을 거두는 사안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표명하면서 뜻하지 않게 성종의 친정을 반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이를 투고 유자광(柳子光)을 비롯한 대간들이 한명회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결국 한명회는 좌의정에서 면직되었다.

이후 명나라에 몇 번 사신으로 파견되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기는 하였지만, 1474년(성종 5)을 기점으로 한명회의 정치적 생명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압구정과 관련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간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1487년(성종 18)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세조의 최측근으로, 국왕의 장인으로, 국가의 원로로 화려한 삶을 살다 간 한명회는 물론 그 자신의 탁월한 지모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혈연과 공신 책록을 통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창출하던 세조대의 정치문화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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