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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홍길동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꿈꾸다

1569년(선조 2) ~ 1618년(광해군 10)

허균 대표 이미지

허균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머리말 - 나는 하늘이 내려주신 천성을 따를 것이오.

허균의 집안은 문장가 집안이었다. 허균은 아버지 허엽(許曄), 큰형 허성(許筬), 작은형 허봉(許篈),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오문장가로 불렸다. 또 사림파의 정치력이 형성되던 시기의 동인 집안이었다.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영수이고, 장인 김효원(金孝元)은 동인의 선봉장이며, 작은형 허봉은 율곡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귀양을 갔다.

이처럼 학문적(문학적) 자산과 정치적 자산을 모두 갖춘 허균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득권 안에 안주하지 않았다. 주변의 소외받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스승이, 그의 친구가, 그의 제자가 서얼이었다. 그는 「호민론」으로 말했다. 백성을 두려워하라고. 「유재론」으로 말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홍길동전』으로 말했다. 이상국가를 건설하자고.

허균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문장과 식견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만 사람됨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에 대해 그는 일갈한다. 하늘이 성인을 내렸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감히 어길 수는 없다고.

역적모의의 혐의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후 그는 끝내 역적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 끝마다 부정적인 평가가 따라붙는다. 그의 삶과 관직생활에서 일부 보이는 태도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시대를 앞서서 내다볼 줄 아는 혜안과 문장가로서의 능력에는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2 가계와 생애

허균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동인의 영수였고,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등을 지냈다. 이복형 허성은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순탄한 관료생활을 하였고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둘째형 허봉 역시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후 최초의 연행일기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남겼다. 두 형과 누이 허난설헌까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허균은 1569년(선조 2) 11월 3일 초당 허엽과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3남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 즈음 『논어』와 『통감』을 읽었고 아버지로부터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웠다. 1580년(선조 13)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은 허균은 아버지 같은 형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둘째형은 자신의 친구인 유성룡(柳成龍)과 이달(李達)을 스승으로 소개시켜주었다. 이달은 삼당시인(三唐詩人)중의 하나인데 서얼출신으로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후에 허균은 스승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짓기도 하였다. 과거공부에만 매달리던 허균을 진정한 문학의 세계로 이끌어준 인물이다.

둘째형은 좋은 스승을 소개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스승의 역할도 했다. 1586년(선조 19, 18세) 허균은 둘째형을 따라 본격적인 글공부를 시작했다. 둘째형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 중에 허균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한 사람이 더 있는데 유정[사명대사](惟正(四溟大師))이다. 허균은 사명당과 형제같이 사귀면서 그에게서 불교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임진왜란은 그의 생애에 굴곡을 남긴 사건이었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만삭 아내와 함께 피난생활을 하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겼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국방의 문제점에 대하여 고민도 하고 그의 첫 저서 『학산초담(鶴山樵談)』을 펴내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허균은 1594년(선조 27, 26세)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7년(선조 30, 29세)에 예문관검열이 되고 세자시강원설서를 겸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예문관검열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직책으로 엄격히 선발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그의 문장과 실력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즈음 문과 중시에 장원을 하였고 그 덕분에 예조좌랑으로 승진한 후 중국길에 올랐다.

중국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병조좌랑으로 임명되었고 중국 장수들을 접대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31세)에는 다시 황해도도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지방 관리의 부정과 불법을 사찰하여 규탄하고 과시를 맡아보는 임무를 띠고 임지인 해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6개월 만에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허균은 약 18 여년의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파직을 당하였다.

1600년(선조 33, 32세)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그는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고 싶었다. 조관 자리라도 얻어달라고 부탁하던 차에 1601년(선조 34, 33세) 호남의 시관으로 임명되었다. 호남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수령들에게 대접받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서 그들의 문장을 시험해보는 일이었다.

1601년(선조 34, 33세)에 해운판관에 임명되면서 바라던 조관 자리를 얻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미를 거둬들이며 배에 실어 운반하고 감독하는 일이었다. 1601년(선조 34) 7월 8일부터 1602년(선조 35) 1월 5일까지 조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하여 『조관기행』이라는 일기로 남겼다. 여기에 매창(梅窓)과의 유명한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이 해(1601년, 선조 34) 12월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가 자신을 종사관으로 천거하여 이듬해 원접사 일행과 함께 중국 사신을 접대하게 되었다. 이정구의 추천의 변은 허균이 시를 잘 짓고 성품도 총명하고 민첩하며 옛일도 많이 알고 중국에도 정통하다는 것이었다.

허균에게는 딱 맞는 자리였다. 당시 원접사 일행의 면면을 보면, 종사관은 허균, 이안눌(李安訥), 홍서봉(洪瑞鳳)이었고 제술관은 차천로(車天輅), 권필(權韠)이었으며 사자관은 한호(韓濩)이었다.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종사관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의 벼슬은 병조정랑, 성균관사예(정4품), 사복시정(정3품)으로 승승장구하였다.

1604년(선조 37, 36세) 수안군수에 임명되어 그가 그토록 바라던 수령 자리를 얻게 되었다.

1606년(선조 39, 38세)에는 원접사 유근(柳根)의 추천을 받고 다시 종사관으로 나갔다.

당시 정사로 온 주지번과의 만남은 허균의 문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장이 되었다. 주지번은 허균에게 매료되어 돌아갈 때 『양천허씨세고』와 난설헌의 시집에다 머리말을 써주기도 하였다. 허균이 주지번을 접대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은 『병오기행』이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1607년(선조 40, 39세) 삼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불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평소 허균을 신임하고 있던 선조는 사헌부의 탄핵을 두 차례나 만류하다가 어쩔 수 없이 따랐다.

파직 과정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선조[조선](宣祖)의 신임을 받고 있던 허균은 다시 관직에 돌아갈 수 있었다. 내자시정을 거쳐 공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는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라 파직되었다. 이처럼 그는 파직과 복관을 반복하며 파란만장한 출세기를 보냈다.

1609년(광해군 1, 41세) 원접사 이상의(李尙毅)의 추천을 받고 세 번째 종사관으로 나가서 그 공로를 인정받고 정3품 당상관 형조참의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병으로 천추사를 사퇴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고,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지만 곧 취소되었으며, 녹봉만 받던 정6품 군직인 사과 벼슬에서마저 파직되는 등 그의 관로가 평탄하지 못했다. 뒤이어 전시 대독관이 되었을 때는 조카와 조카사위를 급제시켰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고 전라도 함열현으로 유배를 가기에 이르렀다.

1614년(광해군 6, 46세) 호조참의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다.

이해 여름에 천추사가 되어 중국을 다녀왔고 이듬해에도 동지겸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을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귀국할 때에 많은 책을 가지고 오고 변무사에 대해서도 다방면으로 견문하여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사행의 공로로 그는 가자되었고 형조판서(정2품)에까지 올랐다.

이렇게 해서 그는 광해군의 신임을 받으며 권력의 핵심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1617년(광해군 9, 49세) 폐모론 정국에서 폐모를 주장한 허균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허균은 폐모론을 성사시킨 공으로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奇俊格)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역적은 오히려 허균이라고 하면서 그의 혁명계획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허균이 다시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고발과 탄핵 정국으로 돌변하였다. 대질심문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허균과 손을 잡았던 이이첨(李爾瞻)이 등을 돌리면서 허균은 역모를 꾸민 죄인으로 몰렸다. 결국 그는 1618년(광해군 10, 50세) 8월 형신도 받지 않고 결안도 없이 사형을 당했다.

이후 허균은 조선시대 내내 역적이라는 이름을 벗을 수 없었다. 허균의 거사 계획은 확실치 않아서 실제로 그가 어떤 식으로 혁명을 이루려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남긴 기록과 행적으로 보아 혁명의 주역은 조선왕조의 사회체제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었을 거라는 추정을 할 뿐이다.

3 허균의 문학과 사상

허균은 시인이었다. 그의 형과 누이도, 그의 스승도 모두 시인이었다. 그는 일찍 죽은 형과 누이를 위해 그들이 남긴 시를 모아 『하곡집』과 『난설헌집(蘭雪軒集)』을 냈다. 또 스승을 위해 그의 시집 『손곡집』을 간행하였고 최고의 학당파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임진왜란 피난 시절인 1593년(선조 26, 25세)에 『학산초담』을 지었다. 동시대 시인들에 대한 시화와 시평이 주요 내용이다. 전라도 함열현 유배시절에는 『성수시화(惺叟詩話)』를 지어 최치원(崔致遠)부터 동시대 시인들까지 약 800여 년에 걸친 시화들을 모아 품평하며 우리나라 시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1607년(선조 40, 39세)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펴냈다. 책 뒤에 덧붙인 제시산후(題詩刪後)에서 그는 시산(詩刪)과 시선(詩選)의 차이점을 설명하며 시산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큰 바다에 구슬이 하나 빠졌다고 비난할 사람은 있을 테지만 물고기 눈깔과 진주가 섞여 있다고 꾸짖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넣을 것은 있을지 몰라도 뺄 것은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시산 작업에 의의를 부여했다. 이 책은 조선 초 정도전(鄭道傳)부터 당대의 권필에 이르기까지 35명의 시를 분류하고 비와 평을 붙였는데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조선조 최고의 시산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벼슬이 바뀌거나 신변에 변화가 생길 때마다 한 권의 시고로 엮었다. 이를테면,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지은 시 15수를 모아 ‘남궁고(南宮藁)’를 엮거나, 내자시정 재직시 지은 시 18수를 모아 ‘태관고(太官藁)’를 엮거나, 형조참의 재직 시 지은 시 13수를 모아 ‘추관록(秋官錄)’을 엮은 것 등이다.

그의 시평(詩評)과 시작(詩作)에 대한 열정은 이렇듯이 대단했지만 1612년(광해군 4, 44세)에 친구 권필이 시 때문에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절필을 선언하고 말았다.

유배시절 그의 나이 43세에 그는 자신의 문집을 스스로 직접 엮어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 이름 지었다. ‘부부고’라 칭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양웅에 빗대고 있는 모습이 엿보인다. 대부분의 문집이 본인 사후에 가족이나 제자들에 의해 간행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생전에 편집하였다.

그는 5편의 전을 지었는데 모두 유교적 신분사회에서 소외당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현실고발소설의 성격을 띤다. 「손곡산인전」의 이달이 천첩소생의 서얼이고, 「남궁선생전」의 남궁두는 아전이며, 「장생전」의 장생은 비렁뱅이 천민이다. 또 「엄처사전」의 엄처사는 몰락한 양반이고 「장산인전」의 장산인은 중인이다.

허균은 이 5편의 전 이외에도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로 인정되고 있다. 허균이 『수호전』을 모방하여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그의 제자 이식(李植)이 밝힌 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스승 이달과 자신을 따르던 서양갑(徐羊甲)이나 심우영(沈友英) 같은 이들이 모두 서얼로서 소외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신분제도의 불평등과 사회체제의 부조리를 비판하기 위해 『홍길동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은유하여 현실을 비판하는 소설 말고 논설을 통해서도 직접적인 사회비판을 시도하였다. 「호민론(豪民論)」, 「유재론(遺才論)」, 「관론(官論)」, 「정론(政論)」, 「병론(兵論)」, 「학론(學論)」이 그것이다.

「병론」에서 그는 양반 사대부들이 군대에 가지 않기 때문에 군사가 적다고 하면서 조선에 군사가 없는 책임을 왕에게 돌렸다. 학론에서 참다운 학자를 등용하여 경륜을 펼치게 할 책임도 왕에게 돌렸다. 정론에서 당파싸움에 성행한 것에 대한 책임도 왕에게 돌렸다.

천하에 두려워할만한 자는 오직 백성뿐인데 그 중에서도 호민이 가장 두려운 존재라는 「호민론」에서 그는 사회가 어지러울 때 호민을 중심으로 응집하여 봉기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가 소설에서 구현한 홍길동과 같은 자가 바로 호민이다.

하늘이 재능 있는 사람을 내었는데 사람이 문벌과 과거로써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유재론」에서는 부당한 신분제도와 서얼차별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의 취지는 차별받고 소외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지만 불교, 도교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그가 불경을 읽는 것은 부처를 섬겨서가 아니라 그 문장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반야심경』에 심취하여서는 한석봉에게 금글씨로 그것을 베끼게 하고 그의 친구 화원 이정(李楨)에게는 부처와 보살들의 그림을 그리게 하여 서첩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그의 불교관은 왕궁의 원찰로 개수된 도솔원 미타전 비문에 잘 드러나 있다. 위에서는 유학을 높여 선비의 습속을 맑게 하면서, 아래로는 부처의 인과와 화복으로 인심을 깨우친다면 그 다스림은 결국 같다는 것이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한정록(閑情錄)』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은일(隱逸), 한적(閒適), 퇴유(退休) 등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은둔하며 매인 데 없이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섭생이나 치농과 같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문학과 사상을 살펴보건대 그는 다양한 문화를 포용한 위에 핍박받고 소외된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사회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이자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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