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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許楚姬]

눈 속에서 피어난 향기로운 난초, 조선의 여류 시인

1563년(명종 18) ~ 1589년(선조 22)

허난설헌 대표 이미지

허난설헌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관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명종 18)-1589년(선조 22)을 살다간 조선중기의 여류시인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이름은 초희(楚姬), 자(字)는 경번(景樊)이며 난설헌(蘭雪軒)은 당호이다.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허엽(許曄)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삼척부사, 부제학,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1575년 동서분당 당시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허엽은 첫 번째 부인 청주 한씨와의 사이에서 1남2녀를 두고 사별한 뒤, 두 번째 부인 강릉 김씨와의 사이에서 봉(篈), 초희, 균(筠)의 2남1녀를 두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은 난설헌의 동생이다. 남편은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金誠立)이다. 난설헌과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어려서 죽었다.

약 210여 수의 시와 글이 전하며 문집으로 『난설헌집(蘭雪軒集)』이 있다.

2 이름: 초희와 경번, 명(名)과 자(字)를 남기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6세기 후반을 살다간 조선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이름은 초희(楚姬), 자(字)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蘭雪軒)이다.

이 두 줄의 소개만으로 난설헌은 이미 비범하다. 조선의 여인이면서 이렇게 이름과 자, 호가 모두 전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며 심지어 양반가의 여인으로 시인이라 이름을 남긴 것 역시 조선시대에서 거의 유일하다 하겠다. 자는 관례(冠禮)나 계례(筓禮)를 치를 때 성년이 되었다는 의미로 지어주는 이름이다. 조선의 남성들은 자를 받았지만 여성이 자를 받는 경우는 특이한 경우이며,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여성은 기록 속에서 누구 아내 김씨나 이씨 등의 성씨 정도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친구들끼리 자를 불렀으며, 윗사람이 자를 불러주는 것은 존중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난설헌의 경우 여성에게 관대한 집안 분위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를 받았고 12살 차이 나는 오빠 허봉(許篈)도 난설헌을 부를 때 이름이 아닌 자를 불러주었으며 동생인 허균도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누이의 이름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난설헌의 자 경번의 의미에 대해서는 임상원(任相元)의 『교거쇄편(郊居瑣編)』 권1의 언급을 참고할 수 있다. “난설헌은 『태평광기(太平廣記)』 를 즐겨 읽었으며 그 긴 이야기를 다 외웠다. 중국 초나라 번희(樊姬)를 사모했기 때문에 호까지도 경번(景樊)이라 지었다.”고 쓰고 있다. 즉 난설헌의 이름 초희는 초나라 장왕(莊王)의 어진 아내 번희(樊姬)를 가리키며 자인 경번은 ‘번희를 사모하다’라는 뜻으로, 이름과 자를 어울리게 지은 것이다.

3 가계: 문헌의 최고봉, 허씨오문장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 허엽은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유수의 벼슬을 두루 역임하고 동인과 서인이 분당될 때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었다. 30여 년간의 관직생활을 하면서 청렴으로 이름이 나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허엽의 첫 번째 처 청주 한씨는 좌의정 한확의 현손으로 왕실과 혼맥을 이루던 명문가의 딸이었다. 한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허성(許筬)이고 사위로는 훗날 의병장이 된 우성전(禹性傳)이 있었다. 난설헌의 배다른 형 허성은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통달하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관직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난설헌의 작은 형부였던 우성전은 퇴계의 문인이면서 동인으로 분류되며 나중에 남인의 거두로 활약하였다.

허엽은 한씨와 사별한 후, 예조참판, 안동부사,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김광철의 딸 강릉김씨를 부인으로 맞았고 그 사이에서 허봉, 허초희, 허균의 2남 1녀를 두었다. 난설헌은 이들 동모형제들과 각별한 우애를 유지하였다. 특히 12살 터울 오빠 허봉은 난설헌의 공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허봉이 교우한 사람으로 김첨(金瞻)과 송응개(宋應漑)가 있는데, 이들은 나중에 난설헌의 시아버지와 시외숙이 된다. 허봉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가 대표적인 동인으로 서인과 대립하였는데, 병조판서 이이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갔고 거기서 객사하였다. 허봉의 죽음은 난설헌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허봉이 죽은 다음해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난설헌이 요절한 것은 그 충격도 한 몫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난설헌의 동생은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다. 허균 역시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형조판서, 예조판서까지 역임하기도 하지만 뛰어난 문재로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자자하였다. 특히 허균은 명나라 사신들과 교우하면서 난설헌의 시문들을 전해 주어 그 시들이 세상에 나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난설헌은 대략 15세 경에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데, 남편은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金誠立)이었다. 김성립은 난설헌이 죽던 해에 2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을 지낸 인물이며 당대에 문명이 높았다고 한다.

이렇듯 난설헌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녀가 살다간 조선시대 선조 연간은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라 일컬어질 만큼 뛰어난 문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문학사의 절정을 이룩한 시기였다. 그 중 한 가문 구성원들이 일가를 이루며 동일한 문화적 토양을 가지고 각각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집안이 바로 양천 허씨가문의 허엽과 그 자녀들이었다. 아버지 허엽과 그의 세 아들 성(筬), 봉(篈), 균(筠), 그리고 딸인 난설헌은 문장과 학문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였고 그 명성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후대인들은 이들 다섯을 아울러 ‘허씨오문장(許氏五文章)’이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집안에 대한 자부심은 허균의 글속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 선대부(先大夫)의 문장과 학문, 절행은 사림에서 추중되었다. 백형은 경전을 전해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며 무게가 있다. 중형은 박학하고 문장이 매우 고고해서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욱 청장준려(清壯峻麗)하여 개원(開元), 대력(大曆)년간의 사람들보다 뛰어났고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천신사(薦紳士)들이 모두 칭찬한다......그리하여 문헌으로 이름난 집으로서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첫째로 꼽았다.”

허균의 글 외에도 이 집안의 명성은 여러 문헌들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허엽 뿐만 아니라 그 세 아들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 김성립(金誠立)까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오르고 논의의 수준을 높였으므로......허씨가 가문들 가운데 가장 치성하다”라고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재능: 뛰어난 재주, 갑갑한 삶

허씨오문장 안에서도 그 탁월한 문학적 역량으로 특히 주목 받은 인물은 난설헌과 허균이었다. 그 중 난설헌은 여성에게 제약이 많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도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닌 부친과 형제들 사이에서 글을 익히며,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그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겨우 8세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으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광한전 주인이 여러 신선을 초청해 놓고 보니 누각이 좁을 것 같아 백옥루를 새로 짓고 난설헌 자신을 불러 상량문을 짓게 했다는 상상을 하며 지은 글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문장력이 발군인 이 작품은 난설헌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허균이 당대의 명필인 석봉 한호(韓濩)에게 부탁해 목판본으로 만들어 『난설헌집』보다 먼저 간행되어 유포되었다. 여동생의 이러한 재능을 아깝게 여긴 허봉은 당대의 이름난 문인이자 허균에게 시를 가르치기도 했던 이달(李達)에게 한시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발군의 문학적 재능에 비해 그녀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난설헌은 대략 15세경 한 살 연상의 김성립과 결혼하였는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좋지 못하였다고 알려졌다. 김성립과의 사이에서 남매를 두었는데 돌림병으로 모두 잃었고 나중에는 뱃속의 아이까지 잘못되는 불행을 겪었다. 거기에 난설헌이 크게 의지하던 손위 오빠인 허봉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는 등 슬픔이 계속되었다. 난설헌은 결국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난설헌의 작품은 꽤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임종 때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유언하여 모두 소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누이의 이른 죽음을 애통하게 여긴 허균은 친정에 흩어져 있던 시를 수집하고 자기가 외우고 있던 누이의 시를 모아 난설헌이 죽은 이듬해인 1590년에 처음 문집을 편찬하였다. 허균은 그 초고인 『난설헌고(許蘭雪藁)』를 스승 유성룡(柳成龍)에게 보이며 발문을 부탁하였는데, 난설헌의 글을 본 유성룡은 ‘부인의 말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찬탄하였다. 그러나 『난설헌집』은 조선에서 바로 간행되지 못하였는데, 그 사이 허균과 교류가 있던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에게 그 원고가 전해져 중국에서 출간되면서 큰 명성을 얻었다. 허균은 공주목사로 있던 1608년(선조 41)에야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할 수 있었다. 이후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5 평가: 조선시대 양반여인이 문명(文名)을 남긴다는 것

위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에서 허균이 직접 누이의 글을 평가하는 데에서 드러나듯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난설헌의 시문은 높이 평가받았다. 박지원(朴趾源)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서문에서 허씨 집안의 문재를 칭찬하면서 “만력 때 봉, 성, 균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누이동생 경번의 재명(才名)은 그 오빠들보다 더욱 뛰어났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훗날 난설헌의 동생 허균이 역적으로 가산이 적몰된 채 처형되면서 집안이 몰락하였다. 이후 이러한 집안 배경과 여성을 차별적으로 인식하는 유교적 분위기 하에서 난설헌의 글은 본인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거나 음탕하다거나 규방의 부인이 글을 짓는 것은 분에 넘치는 행위라고 매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논란을 넘어 난설헌의 글들은 오늘날까지 그 문학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으며 허난설헌은 우리 역사에 몇 안되는 양반가의 여류시인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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