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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許穆]

육경고학에 밝았던 남인의 영수

1595년(선조 28) ~ 1682년(숙종 8)

허목 대표 이미지

허목 초상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고, 예송 정국을 주도하다.

17세기 초 비주자학적인 학풍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성리학자들이 다시 중용되고, 이어 두 차례의 호란을 거치면서 반청감정이 고조되자 지금까지의 학풍은 냉각되고 주자성리학이 다시금 학계의 주류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대세인 흐름 속에서 새로운 학풍의 양상도 드러나는데, 서울 근교 농촌에서 생활하던 남인 계열을 중심으로 춘추시대 여섯 가지 경서인 『역경』, 『서경』, 『시경』, 『춘추』, 『악기』, 『예기』 육경(六經) 중심의 고학풍, 천기(天機)를 중요시하는 당시(唐詩)와 진한(秦漢) 고문(古文)의 유행, 도교에 대한 관심 등 사상 문화적 측면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대표성을 보인 인물이 바로 허목이라 할 수 있다. 허목은 경학, 서예, 예학 등에서도 고학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고, 특히 고례에 기반을 둔 그의 예학은 예송의 과정에서 서인과 대립된 양상을 보임으로써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 허목은 남인 내부에서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어졌을 때에도, 서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남인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보이고자 하는 청남의 대표로서 활약하였다. 그의 학풍은 이후 이익(李瀷)을 주축으로 성립된 경학 중심의 학풍이 정약용(丁若鏞)에게 까지 전수되었다.

2 17세기 근기남인 중심의 새로운 학풍 형성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와해된 사회질서를 재건하고, 상처 받은 자부심을 회복함으로써 도덕국가를 건설한다는 방향 설정 아래 일로 매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제압하고 중원의 주인이 된 여진족인 청에 대한 복수설치를 해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과 전쟁으로 실추된 국가와 개인의 도덕심을 고양하기 위한 예치가 대외, 대내 정책의 기본 방향이 되었다. 17세기 후반 현종[조선](顯宗)과 숙종[조선](肅宗)에 이르러서 예의 구체적인 실현이 정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는데, 두 차례의 예송(禮訟)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예송을 주도한 두 세력인 남인과 서인의 다른 학풍에서 기인한 것으로, 서인은 주희의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원형으로 17세기 전반기에 쏟아져 나온 『가례집람(家禮輯覽)』 등의 예서를 중요시하고, 국가 의례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을 근거로 내세웠음에 비해, 남인은 고례 즉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차별성은 서인 계열이 주자성리학을 신봉하고, 남인 계열이 고례인 육경을 근거로 하는 고학풍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고학풍은 이미 17세기 초 서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새로운 학풍의 형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 시기 서울에서는 성리학 본래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이단적 조류들을 절충하여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수광(李睟光),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유몽인(柳夢寅), 허균(許筠), 신흠(申欽), 이식(李植), 이정구(李廷龜), 한백겸(韓百謙)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문학에서 당나라 시와 진한의 고문에 능하였고, 경학에서는 6경을 중시하면서 제자백가와 도가, 양명학, 선불교 등에 대해서도 포용적 태도를 취하였다.

17세기 초반 고학풍을 위시한 비성리학풍은 인조반정과 호란 이후 서울 중심의 새로운 학풍은 냉각되고, 오히려 주자성리학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남송의 이민족에 대한 반감을 배경으로 성립된 주자학의 명분론이 북벌주의를 내세우며 자강을 도모하던 서인층에 호소력을 주었으며 호란으로 상처받은 정서를 통합하는데 기여하였다. 서인과 노론이 집권하던 17세기 후반은 주자성리학이 주도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서인과의 정쟁에서 밀려나 서울 부근 100리 권의 농촌에서 생활하던 근기남인들은 17세기 초반 새롭게 등장한 학풍을 꾸준히 계승 발전시키면서 서인 주류와 다른 야당의 학풍을 형성하였다. 사화와 당쟁을 겪으며 향촌에 은거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심신의 연마를 위한 수련도교가 유행하였다. 수련도교의 유행은 당시 성리학주류 사회에서도 도교에 대한 관심을 가진 학자들을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경학에 있어서 이들은 고문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켜서 6경 중심의 고학을 성립시켰다. 문학에서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인 천기(天機)를 중요시하는 당나라의 시와 진한 고문이 유행하였다. 17세기 중후반 새로운 학풍을 주도한 세력은 근기남인이었다. 근기남인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북인 정권이 몰락한 후 남인에 편입된 세력으로, 허목은 바로 근기남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북인은 서경덕과 조식 계열로서 비성리학적인 학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허목 역시 주류 성리학과는 다른 학풍을 보이게 되었다.

3 古學에 대한 심취와 고학풍의 형성

허목은 1595년(선조 28) 한양 창선방에서 현감 허교(許喬)의 3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허목의 본관은 양천이다. 양천 허씨는 공암(孔巖) 허선문(許宣文)을 시조로 한다. 허선문은 수로왕(首露王)의 자손인데, 수로왕의 부인이자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의 성을 하사받았으며 그 후에 여러 본관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허선문은 허왕옥의 30세손이다.

「자명비음기(自銘碑陰記)」에 의하면 수로왕이 나라를 통치해 온 지 158년인 신라 말엽에 허선문이 있었는데, 나이 90세에 고려 태조를 섬기면서 견훤을 정벌 할 때 군량을 조달한 공을 인정받아 공암의 촌주가 되었고, 자손이 그대로 공암의 씨족이 되었다고 한다.

즉 허선문은 공암현의 대부호로 고려 건국에 공헌하여 공암 촌주로 봉해졌고, 공암현을 식향으로 하사받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공암을 본적으로 삼았다. 이후 공암이 양천으로 고쳐짐에 따라 양천 허씨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었다.

허목은 1895년(선조 28) 서울 창선방(彰善坊)에서 태어났는데, 허목은 태어날 때부터 손바닥에 문(文) 자가 새겨져 있어서 자를 스스로 ‘문보’라 하였고, 눈썹이 길어 눈을 덮은 늙은이라는 뜻으로 호를 ‘미수(眉叟)’라 하였다.

허목에 대한 일화로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지는데, 이때 왜구(倭寇)가 막 물러가고, 명나라 장졸들이 모두 서울에 모였었는데, 선생의 보모(保母)가 선생을 업고 구경하러 가니, 한 중국 사람이 선생을 어루만지며 ‘작은 나라에서 이런 대인(大人) 될 사람이 출생했다.’고 감탄했다.

허목은 1603년(선조 36) 9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서당에 입학하였는데, 처음으로 읽을 때는 100번을 읽지 않으면 외지 못하였는데, 겨우 1책을 마치게 되자 문의에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1613년(광해군 5) 19세에는 완선군(完善君) 이의전(李義傳)의 딸이자,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와 혼인을 하였다. 이원익은 허목의 자질을 보고 몹시 기대감을 드러내어 허목을 보면 반드시 일어나 관대를 갖추고는 “언젠가 내 자리에 앉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고 공언하였다.

허목은 어려서 종형 허후(許厚)에게 수학하였고, 23세에 그와 함께 성주에 있던 정구(鄭逑)를 뵙고 스승으로 모셨다. 비록 3년 후에 정구는 타계하였지만 허목은 정구의 수제자로 꼽혔던 만큼 남인 예학자인 정구의 학문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허목은 1624년(인조 2) 30세에 경기도 광주 우천에 있는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광범위한 독서와 학문을 섭렵하였다.

허목은 이후에도 과거에 뜻을 버리고 산림의 길을 택해 자봉산을 중심으로 은거하면서 수행과 학문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그의 진로 선택은 광해군대 몰락한 북인계열의 성향과 외조부인 임제(林悌)의 은자적 처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학풍은 성리학 뿐 아니라 도가적 취향도 다분히 보이는데, 73세에 그가 지은 『청사열전(淸士列傳(記言集))』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책은 세속적 영달의 길을 끊고 은일의 삶을 살았던 김시습(金時習), 정희량(鄭希良), 정렴(鄭磏), 정작(鄭碏), 정두(鄭斗), 강서(姜緖), 조충남(趙忠男) 등 7명에 대한 열전으로 조선의 도가로 분류된 인물이었다. 이들은 세속적 영달의 길을 끊어 버리고 은일의 삶을 살았는데, 이것은 허목의 노장적인 인생관과 우주관에 기인한 것이었다. 허목의 도가적 취향은 그의 가풍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 허교는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인데, 박지화는 조선시대 도가의 도맥상의 주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허목은 고문에 대한 관심은 서체, 경학, 예학에 대한 그의 성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허목은 어려서부터 팔분(八分), 고문(古文), 전서(篆書)의 서체를 익혔는데, 이 때 독서를 통해 글씨와 학문 모두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허목은 과거에 뜻을 버리고 산림의 길을 택하면서 그 와중에 그의 독특한 서체인 전서체를 완성하였다. 전서체는 고체(古體)로서 그의 고학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체만이 아니라 경학 역시 고문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허목은 스스로도 평소에 고문(古文)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일찍이 자봉(紫峯) 산중에 들어가 고문으로 된 공자의 글을 읽었다. 늦게야 문장이 이루어졌는데, 그 글이 대단히 방사(放肆)하면서도 방탕하지는 않았다. 혼자 지내며 내키는 대로 즐기되 마음으로 옛사람들의 남긴 교훈을 추구하기 좋아하였다고 고문에 심취한 자신의 학문 경향을 드러내었으며, 후대 국왕인 정조(正祖) 역시 허목에 대해 “(그는) 고문을 매우 좋아하였다. 80년 동안 진한(秦漢) 이후의 글은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글이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더구나 그의 걸출한 모습과 빼어난 기상은 속세를 벗어난 점이 있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신선(神仙) 같은 사람이라고 지목한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그는 고학에 심취하였다. 이것은 당시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주자성리학도였고, 그들이 사서(四書 :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삼경(三經 : 시경, 서경, 역경)의 체제를 중심으로 두었고, 주자의 주해서로서 학문적 기초를 삼고 있던 풍토에서 허목의 고학 즉 원시경학인 육경(六經 :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학, 악경)에 대한 회귀는 새로운 문호를 여는 단초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예론 역시 고례에 근거하였는데, 이것은 예송이 정치 문제로 비화될 때, 남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그 결과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과의 대립 갈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4 예송 정국에서 서인과 대립하다.

허목의 정치적 행보는 순탄하지는 않았다. 1626년(인조 4) 32세의 나이에 동학재임(東學齋任)으로 있을 때에, 서인 전 지평 박지계(朴知誡)가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仁獻王后)를 추숭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에 대해 허목은 박지계의 행동은 임금에게 아첨을 하여 예를 어지럽히는 짓이라고 혹평하며 그를 처벌하여 유적(儒籍)에 기록하자 인조는 그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허목은 과거 정지령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과거를 기피하던 허목은 1650년(효종 1) 56세에 단릉 참봉을 제수 받았지만 곧 사직하였고, 1657년(효종 8) 63세가 되어서야 사헌부 지평으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1660년(현종 1) 효종의 사망 후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문제가 대두되었을 때에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삼년상을 주장함으로써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과 대립하였다. 이에 대해 서인은 ‘장자이든 차자이든 1년이다.’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있는 규정을 내세워 기년 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허목과 윤선도는 국왕이기 때문에 장자와 차자의 구분을 두지 않고 3년 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인은 서인의 이러한 주장이 종통은 효종에게 있지만 적통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에게 있다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음을 기회로 기년 상을 주장하는 송시열을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패배하게 되었다. 이로서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1673년(현종 14) 인선왕후(仁宣王后) 가 죽자 자의대비가 며느리인 인선왕후를 위해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것은 예송(禮訟)으로 드러났는데, 서인은 차자부의 예에 따라 9개월 상복을 남인은 장자부로 다루어 1년 복을 주장하였다. 이때는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게 됨으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었고, 허목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남인이 2차 예송에서 승리함으로써 반세기에 걸친 야당의 처지에서 집권당이 되었지만 정책과 선명성의 차이로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당하였는데, 허목은 청남의 영수로서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하는 탁남에 대한 비판을 늦추지 않고 이론적 철저성으로 남인 정권의 선명성을 제고하였다.

이익이 쓴 허목의 신도비명에 의하면 영의정인 허적이 나라를 독단하자 선생이 2-3인의 대부들과 더불어 사림의 영수가 되니, 세상에서 청론파니, 탁론파니 하는 지목이 있었다. 허적의 아들인 허견은 불법한 짓을 마구 행했으나 사람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보다 못한 선생은 “영의정 허적은 소임이 크고 책임이 중하여 권세와 지위가 융성한데, 척리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내시와 인척들을 문객으로 삼아 임금의 동정을 엿보아 영합합니다. 그의 서자 허견은 무엄한 자인데, 함께 나랏일을 하니, 다스려지기는 어려운 일입니다.”라는 취지의 글을 왕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허목은 국왕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허목에 대한 숙종의 대우도 융숭하였다. 1675년(숙종 1) 허목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으며, 1678년(숙종 4)에는 왕이 직접 명하여 허목이 은퇴 후 살 집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허목은 그 집 이름을 ‘수고은거(壽考恩居)’라 하였으며 후대에는 ‘은거당’이라 불렀다. 1680년(숙종 6) 허적의 역모사건이 원인이 된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함으로써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그 후로 2년 뒤엔 1682년(숙종 8)에 사망하였고, 후손들은 그를 연천(漣川) 구동(駒洞)에 장사 지냈다.

5 근기 남인 학풍에 영향을 주다.

허목은 경신환국 이후 남인의 실각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은거당을 피해 머물렀다. 그러던 중 1688년 (숙종 14)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숙종은 예장(禮葬)을 치르도록 명령하였으며 승지를 보내 치제하도록 하였다. 숙종은 허목에 대해 “사림의 공론을 붙잡아 세우고, 산림에 있으면서도 옛 글에 마음을 두어 문장을 지어도 서한선진(西漢先秦)과 같았으며, 틈틈이 익힌 전서는 서체가 전아하고 힘찼다.”라고 극찬하였다.

1691년(숙종 17) 마전군(麻田郡)에 사당을 건립, 미강서원(嵋江書院)이라 사액하였으며 1692 (숙종 18)에는 ‘문정(文正)’의 시호가 내려졌고, 나주에 미천서원(眉泉書院)이라 사액되었다.

노론에 의해 작성된 그의 졸기에 의하면 “학식이 넓고 성품이 아담하며 옛것을 좋아하였고, 문장(文章)은 고상하고 간결하였으며, 전법(篆法)은 매우 기이하였고, 속류(俗流)에 비하여 특별히 다른 것이 있었으나, 학문은 실지의 공부가 없었다.”고 평가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학풍의 기이함은 당파를 막론하고 인정하지만 성리학을 주류로 삼았던 노론의 경우 그를 실지의 공부가 없었다는 것으로 비판하였다.

당시 학계의 주류적 학문 풍토와는 달랐던 그의 학풍을 역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허목의 육경의 원시유학에 파고드는 고학풍은 근기남인 학자들에게도 전수되는데, 성호 이익을 주축으로 성립된 경학 중심의 학풍이 다산 정약용에게 까지 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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