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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許浚]

조선 의학의 신기원을 이루다

1539년(중종 34) ~ 1615년(광해군 7)

허준 대표 이미지

허준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신유학과 허준의 등장

조선시대 의료는 신유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질병을 보다 적극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이 이용하기 쉬운 치료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고, 구하기 쉬운 약재 중심으로 의학서가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이 그런 이념 속에서 탄생한 의학서이다. 허준은 조선시대 구축된 의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는 역작을 만들어낸 조선 최고의 의사였다.

2 허준의 어린 시절

허준은 1539년(중종 34)에 아버지 허론(許碖)과 어머니 손씨(孫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허옥(許沃)은 허론의 적처 영광 김씨 소생이며, 허준의 배다른 동생 허징(許澄)은 또 다른 작은 어머니에게서 출생하였다. 허준과 허징은 출생에서부터 서자로서 받는 사회적 차별을 피할 수 없었다. 서자로서 신분의 제약은 허준과 허징이 모두 극복해야 할 최대의 난관이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자란 허준은 일찍이 심약(審藥)으로 전라도의 약재를 진상하는 일을 맡아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서 해남과 담양을 왕래하며 거주하던 학자이자 관인인 유희춘(柳希春)과 안면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유희춘의 부탁이라면 전라도 다른 지역으로까지 그의 친구들을 치료차 방문하였다. 예를 들어 1569년(선조 2) 유희춘은 당시 허준에게 나주에 사는 나사침(羅士忱)과 그의 아들 나덕명(羅德明)의 병을 진찰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남원에 거주하는 신흔(申昕)의 질병을 치료하도록 주문하기도 했다.

허준이 유희춘을 방문할 때에 치료와 의학적 문제로 찾아가는 경우가 제일 많았지만 이외에 서책을 선물하는 등 다른 의관과는 사뭇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허준이 의관직에 본격적으로 출사하기 이전인 20대 초반에는 이러한 모습이 자주 보인다. 전라도 지역에서 성장한 허준이었지만 20대에 이미 서울지역에까지 의술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래서 유희춘은 그를 불러 자신은 물론 부인의 병 치료를 부탁하였으며, 친구나 친지들의 병문안을 허준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3 허준의 관직 진출

1569년(선조 2) 윤6월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의 내의원직 천거를 부탁하였다. 허준의 첫 번째 내의원 출사였다. 그동안 그의 의술이 서울의 양반들에게 매우 훌륭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직함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는데, 이제 허준은 유희춘의 도움으로 모든 의원들의 선망인 내의원에 출사하게 되었다.

당시 내의원 의관 중에서도 최고의 의원은 어의 양예수(楊禮壽)였다. 유희춘 역시 최고 의관 양예수를 잘 알고 있었다. 1573년(선조 6) 양예수는 유희춘의 부인이 질병으로 고생하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유희춘의 집에 들르기도 했다. 거의 매월 양예수는 유희춘을 문안하였으며 1570년(선조 3) 8월에는 양예수와 허준이 모두 유희춘을 방문하였다. 따라서 양예수와 허준은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유희춘을 매개로 자연히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양예수의 나이는, 그 아들 양홍무(楊弘茂)가 1559년생이고 양예수의 의과 합격연도가 1549년인 점을 감안하면, 40대에서 50대까지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허준은 20대 전반의 젊은이였으므로 양예수는 허준의 아버지뻘 되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소설과 드라마 등을 통해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던 유의태는 허준 사후 100여 년 후인 숙종 대 유의(儒醫) 유이태(劉爾泰)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허준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특히 양예수의 의술은 당대 최고였으며 그가 남긴 《의림촬요(醫林撮要)》가 후일 《동의보감》의 기초가 되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양예수를 만난 것은 허준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 시기 양예수의 의학적 맞수인 어의 안덕수가 있었기 때문에 양예수에게도 허준과 같은 젊고 능력 있는 제자를 키워 자신의 의학론을 전수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1571년(선조 4) 11월 허준은 내의 첨정에 올라 있었고, 27세가 되던 1573년(선조 6) 11월에는 정3품직에 해당하는 내의원정에 올랐다. 1574년(선조 7) 허준은 의과에 합격했다. 30세가 된 1575년(선조 8), 허준은 내의원 의원으로 왕의 진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4 허준의 입지 강화

1581년(선조 14)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맥경(脈經)을 왕명에 의하여 직접 교장 출간함으로써 허준의 내의원 생활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때 정리한 맥경은 의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기본서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으로, 이를 허준이 손수 정리하면서 허준의 내의원 내 위치는 점차 상승하였던 것이다.

허준은 대개의 입진에 참가하여 상을 받았으며, 1590년(선조 23) 12월 광해군을 구료한 공으로 당상관의 가자를 명받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이 두창에 걸려 고생하자, 다른 사람들이 고치지 못하는 것을 그가 고쳐냈던 것이다. 당시 허준은 의원정이라는 3품직에 근무하고는 있었으나 당하관직에 머물러 있었다. 서자로서 의관이라는 천직의 기술관인이 당상관의 품계를 받는 것은 많은 조관(朝官)들에게 불편한 일이었다. 사간원에서 허준에게 부여된 품계를 환수하기를 집요하게 요구하였으나, 선조의 의지는 확고하였다.

이 일로 선조의 굳은 신임과 함께 광해군의 깊은 애정을 받을 수 있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에도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양예수는 이미 나이가 많아 의주까지 호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허준은 실질적으로 내의원을 주도해나갈 수 있었다. 허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호성공신 3등에 책훈되었다. 이후 왕실의 모든 침구는 허준이 도맡아 입진했다.

1595년(선조 28) 4월 선조의 침구 시술도 허준이 수의(首醫)로써 입시하였는데 한 달 여 동안 거의 이틀에 한 번 씩 선조를 만났으며 그때마다 선조에 대해 의료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1596년(선조 29) 3월 선조는 허준에게 동반직을 제수하였다. 내의원에 줄곧 봉직하던 허준은 드디어 내의원 수의라는 최고의 직책에 오르게 된 것이다.

《쇄미록(瑣尾錄)》의 저자 오희문(吳希文)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날 무렵 지방을 떠돌다 약재를 사러 서울 내의원에 올라와 이때 들은 내의들의 이름을 듣고 기록해 두었는데 여기서도 허준이 제일 처음 거론되었다. 허준이 55세가 되었던 1600년(선조 33) 수의였던 양예수가 사망하면서 허준은 명실상부한 수의로 대접받게 되었다.

이후 계속되는 선조의 깊은 애정과 그의 높은 지위는 다른 신료들로 하여금 시기의 대상이 되어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다. 거기에 1607년(선조 40)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선조가 10월 9일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허준은 부적절한 약재를 사용했다는 혐의로 인해 사간원 사간 송석경(宋錫慶)에 의해 탄핵을 받았다.

결국 선조는 어의 허준에게 마지막 진찰을 받고 1608년(선조 41) 2월 1일 훙서하였다.

허준은 국왕 선조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로 삭직 당하고, 도성 밖으로 쫓겨나는 문외출송(門外出送)의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은 허준에 대한 깊은 신뢰로 형벌 1년 만에 석방하고 내의원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5 동의보감의 탄생

허준은 그 사이에 《동의보감》을 비롯한 의서 편찬에 주력함으로써 조선 최고의 의사라는 명성에 부합하게 되었다. 동의보감은 원래 1596년(선조 29) 선조의 명으로 허준을 중심으로 하여 정작(鄭碏), 이명원(李命源), 양예수, 김응탁, 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면서 중단되었고 1610년(광해 2)에 와서야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조선의 의학 수준과 의료 환경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반면 후일 의학 발전을 저해하였던 아이러니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동의보감》은 《향약집성방》과 같은 전통 의학의 토대 위에서 명나라의 새로운 의학을 도입함으로써 조선 의학의 자립과 발전을 가져온 반면 《동의보감》에 대한 의존과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다른 의학 이론과 의서 발달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의보감》이 없었다면 이를 모태로 해서 조선 후기 다양하게 간행되었던 수많은 의서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른 의학의 발달과 의료 혜택의 확산 또한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허준은 《동의보감》 외에도 많은 의학서적들을 다시 보완하여 펴냈으며, 한편으로는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의학 서적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문본 서적을 한글로 출판하기도 했다. 《창진집(瘡疹集)》을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 간행하였다. 또한 1608년(선조 41)에는 세종대 의관 노중례(盧重禮)가 편찬한 《태산요록(胎産要錄)》을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613년(광해 5)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의 치료를 위하여 이미 전해오던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 《신찬벽온방(新撰辟瘟方)》1권과 《벽역신방(辟疫神方)》 1권을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허준은 1615년(광해 7) 7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1품인 익사공신 보국숭록대부(翼社功臣 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이후 동의보감의 영향을 받은 많은 의서들이 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1724년에 주명신(周命新)이 편찬한 《의문보감(醫門寶鑑)》, 1790년에 이경화(李景華)가 편찬한 《광제비급(廣濟秘笈)》, 1799년에 편찬된 내의원 수의 강명길(康命吉)의 《제중신편(濟衆新編)》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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