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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憲宗]

세도정치를 극복하고 정조(正祖)를 꿈꾸던 청년 국왕, 23살의 젊은 나이에 스러지다

1827년(순조 27) ~ 1849년(헌종 15)

헌종 대표 이미지

헌종가례진하도 병풍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19세기 초중반, 순조(純祖)의 뒤를 이어 8살의 나이에 헌종이 국왕에 즉위하였다. 재위 7년 만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헌종은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조(正祖)를 모범으로 삼아 왕권 강화를 시도하였으며, 그 맥락 속에서 낙선재(樂善齋)를 건립하는 등 고군분투하였다. 그러나 2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헌종 사후 철종(哲宗)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가문의 위세는 절정에 치달았다.

2 8살, 어린 국왕 헌종이 즉위하다.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큰 희망을 걸고 1827년(순조 27) 대리청정을 시켜 국정을 담당하게 하였고, 효명세자는 기대에 부응하여 대리청정을 정력적으로 수행하였다. 같은 해 7월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의 탄생은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어갈 적통 후계자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온 국가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헌종이 4살이 되던 1830년(순조 30), 대리청정을 하던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4년 뒤 국왕 순조마저 훙서하자 8살, 조선왕조 전체를 합쳐서 가장 어린 나이에 헌종이 즉위하였고, 어린 헌종이 세도가문에 의에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헌종이 즉위한 후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의례에 따라 수렴청정을 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 김씨 일파는 정국을 주도하고자 하였으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神貞王后) 가문인 풍양 조씨 일파가 안동 김씨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두 외척의 경쟁 구도가 짜여졌다. 특히 순조가 생전에 헌종 보도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이 정국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안동김씨를 견제할 수 있었다.

3 헌종의 친정(親政)과 왕권 강화 시도

안동 김씨 가문에서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던 시도는 1841년(헌종 7) 헌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저지될 수 있었다. 헌종은 풍양 조씨를 지지함으로써 안동 김씨를 견제하였고,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왕권 강화를 위해 정조를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력과 근신(近臣)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안동 김씨가 비변사에 포진하여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헌종은 친위세력 육성에 한계를 느꼈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절차를 생략한 국왕의 직접적인 관리 임명, 이른바 특지(特旨)라는 수단을 사용했다. 헌종은 조인영·조병구(趙秉龜)·조병기(趙秉夔) 등 풍양 조씨를 대거 특지로 임명했고, 1845년(헌종 11) 규장각 출신인 서희순(徐憙淳)·서기순(徐箕淳)·서좌보(徐左輔)와 김학성(金學性)·윤정현(尹定鉉) 등을 특지로 임명했다.

이처럼 헌종은 안동 김씨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약소한 외척인 풍양 조씨 일파를 이용했다. 대리청정 기간 동안 아버지 효명세자가 그랬던 것처럼 헌종 역시 안동 김씨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약한 외척인 풍양 조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외척을 통해 외척을 견제하는 상황, 이는 당시 왕권 강화 시도가 갖고 있던 기본적인 한계였다.

특지로 풍양 조씨 계열을 등용하여 왕권강화에 이용하려 했던 헌종은 정조대 장용영과 같은 새 군영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비밀리에 진행되던 새 군영 설치는 1846년(헌종 12) 초 기존 군영의 반발을 불러와 신료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헌종은 그해 7월 궁중 경비가 소홀하다는 이유로 정조의 장용영 설치를 본 따 기존 총융청을 궁궐 숙위를 담당하는 총위영으로 승격하고, 총위영 절목을 만들어 이를 정례화 하였다.

새로 편성된 총위영의 규모는 장용영에 미치지 못했지만 체제는 상당 부분 장용영의 것을 따르고 있었다. 총위영의 재정과 군사력은 훈련도감에서 옮겨왔으나 그 격은 훈련도감보다 높았다. 이는 총위영 설치 목적이 안동 김씨가 실권을 장악한 훈련도감을 약화시키고 헌종 자신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새 군영을 만드는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조의 장용영을 본 따 총위영을 만든 헌종은 1846년(헌종 12) 8월 정조 사후 폐지되었던 초계문신제도를 부활시키면서, 정조대의 구례(舊例)를 다시 따른다고 했다. 초계문신은 정조가 당대의 인재를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다. 1846년(헌종 12) 영의정 권돈인(權敦仁) 주관 하에 20명, 1848년(헌종 14)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주관 하에 36명의 초계문신을 발탁함으로써 인재들을 모아 근신으로 양성하려 했다. 헌종은 이때 발탁된 초계문신 중 일부를 암행어사로 파견하는 등 국정을 파악하는데 이용했다.

또한 헌종은 1849년(헌종 15) 김정희·조병현(趙秉鉉)·이기연(李紀淵)·이학수(李鶴秀) 등 안동 김씨에 의해 유배되었던 사람들을 안동 김씨 일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하였고, 유배지에서 죽은 이지연(李止淵)을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 효명세자의 훙서에 충격을 받고 정계진출을 포기했던 박규수(朴珪壽)도 1848년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헌종은 안동 김씨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을 등용했다.

헌종은 이와 같이 친위세력을 육성함과 동시에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높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는 궁궐 내에 건물의 영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4 정조와 같은 성군을 꿈꾼 헌종의 낙선재 영건

헌종대 새로 지어진 궁궐 내 건물은 낙선재이다. 낙선재가 건립된 시기는 1847년(헌종 13)으로 헌종이 한창 왕권강화를 시도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지금도 창덕궁에 남아있는 낙선재 일곽은 단청칠을 하지 않아서 사대부가의 건물과 일견 유사해 보인다.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새로 지어진 의두합과 연경당 역시 단청칠을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건축적 특징은 정조대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정조는 자신이 주로 기거하는 건물에 사대부가처럼 단청칠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대부 문화를 궁궐 안으로 흡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조는 이를 통해 예악형정(禮樂刑政)을 총괄하는 동시에 사류(士類)를 이끌어가는 주도자인 ‘군사(君師)’를 자처했다. 효명세자와 헌종 같은 후대 지도자들 역시 이를 계승하여, 단청칠을 하지 않은 건물들을 궁궐 안에 새롭게 지었다. 그런 맥락에서 낙선재 역시 국왕이 정치나 유교의례의 의무를 벗어나 후궁과 한가롭게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지어졌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낙선재는 단순히 국왕의 취미와 휴식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정조를 계술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건물이었다. 낙선재 일곽은 소주합루(小宙合樓)에 기대어 건립되었다. 소주합루는 그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정조대 세워진 주합루를 모범으로 삼아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직후 건립하여 개혁의 공간으로 삼았던 규장각 2층 명칭으로 이곳에 수많은 책과 선왕의 어진을 보관하였다. 소주합루는 1782년(정조 6) 세자의 공간으로 건립된 중희당에 연접하여 있으면서, 주합루와 같이 책을 수장하여 세자의 학습처로 삼았다.

소주합루는 헌종대 승화루로 개칭되었는데, 헌종은 바로 이 곁에 자신의 처소인 낙선재를 건립하였다. 헌종은 낙선재에 많은 책을 수장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고, 실제로 낙선재 영역 안에 포함된 승화루에 많은 서책을 보관했다. 헌종은 죽음 직전까지 낙선재를 주요 활동 공간으로 이용함으로써 규장각을 건립한 정조를 본받아 호학군주의 면모를 갖추고자 했다.

낙선재 건립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 8월 11일 헌종은 낙선재 옆에 석복헌(錫福軒)이라는 건물을 지었다. 석복헌은 헌종이 왕세자 생산을 위해 맞이한 후궁 경빈 김씨가 거처할 곳이었다. 왕비 효현왕후(孝顯王后)가 숨지고, 헌종은 1844년(헌종 10) 9월 홍재룡(洪在龍)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3년 후 헌종은 왕비에게서 후사를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후궁 경빈 김씨를 들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 8월 경빈 김씨가 거처할 석복헌을 낙선재 옆에 나란히 건립했다.

경빈 김씨를 간택함에 있어서 풍양 조씨는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병현은 조만영(趙萬永)의 사돈인 광산 김씨 김재청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847년(헌종 13) 10월 후궁 책봉 과정에서 조병현은 안동 김씨에 의해 탄핵 받았다. 그러나 헌종은 조병현을 비호하면서 10월 20일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책봉했다. 정치적 논란을 무릅쓰고 헌종은 친위 세력을 동원하여 후궁을 들이고자 했다. 그만큼 헌종은 한편으로 안동 김씨 세도가문을 제어하면서, 국가를 이끌어갈 후사에 대한 의지가 각별했다고 할 수 있다. 헌종은 후궁을 들이는데 있어서 정조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를 간택했던 전례를 따랐으며, 정조가 수빈 박씨를 맞아 들인지 꼭 60년 만인 정미년에 경빈 김씨를 맞이하였다.

석복헌의 건립도 정조대와 유사하게 이루어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건물인 자경전 근처, 왕의 침전이라고 하기에는 소박한 영춘헌에 주로 기거하였다. 그리고 영춘헌 옆에 집복헌(集福軒)에서 수빈 박씨가 순조를 낳았다. 어린 시절 순조는 집복헌에서 돌잔치·스승과의 상견례·관례와 책봉례·세자빈 초간택 등 중요한 행사를 치렀다. 헌종 역시 정조를 따라 자신의 처소 낙선재 가까이에 후궁이 원자를 생산할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이곳을 장차 원자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였다.

국왕의 거처 가까이에 원자의 처소를 마련하여 원자의 지위향상을 꾀했던 것은 정조대 중희당 건립에서 시작되었다. 영조대 세자의 처소인 시민당은 창덕궁의 동편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민당 소실 이후 정조는 시민당 중건이 아니라 내전 인접한 곳에 동궁 처소인 중희당을 지었다. 이는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갈등과 파국을 직접 목격한 정조가 내린 결단이었다. 공간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동시에 원자의 지위 향상을 꾀했던 것이다. 자신의 처소 근처에 원자의 처소를 두는 사례는 정조대 집복헌 건립과 헌종대 석복헌 건립으로 이어졌다.

헌종은 석복헌을 새로 지으면서 그 옆에 수강재도 함께 중수하였다. 수강재는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를 위한 공간으로, 정비가 아닌 후궁 경빈 김씨의 건물과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건물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경빈 김씨의 위상을 높이고 그를 통해 얻을 후사의 권위와 정통성을 함께 상승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짓고 자신은 자경전 근처 영춘헌에 기거했으며, 영춘헌 서쪽 집복헌에서 수빈 박씨가 순조를 낳은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옛 궁인들 사이에서 전해내려 오는 헌종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있다. 헌종이 계비 간택 과정에 참여하다 홍재룡의 딸보다 김재청의 딸에게 더 끌렸으나 대왕대비와 왕대비의 의견에 따라 삼간택에서 김재청의 딸은 낙선하고 명헌왕후 홍씨를 왕비로 들였으며, 김재청의 딸을 잊지 못한 헌종이 결국 3년 만에 그 여인을 후궁으로 들였다는 것이다. 그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든 건물이 낙선재라는 것인데, 헌종의 로맨틱한 면을 부각시켜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는 이야기꺼리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이와 달랐다. 헌종의 계비 간택에 참여했던 명단에 김재청의 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헌종의 사랑보다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적 후계구도를 형성하려 했던 헌종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해야 당시의 역사적 실체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헌종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 23살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훙서함으로써 그의 왕권 강화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헌종 사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철종으로 대통을 잇게 함으로써 어떠한 견제세력도 없이 안동 김씨가 독주하는 세도정치의 극성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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