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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顯宗]

조선의 위기 극복을 이끈 국왕

1641년(인조 19) ~ 1674년(현종 15)

현종 대표 이미지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시대배경

『현종실록』「현종대왕행장」에 전하는 현종(顯宗)에 대한 평 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비록 좋지 못한 운과 어려운 때를 만나, 홍수・가뭄・서리 등의 재해가 없는 해가 없었고, 백성들이 병들고 외세가 핍박하였다. 그러나 왕은 근심하고 수고함으로써 하늘을 감동시키고, 걱정하고 진심으로 아끼면서 백성의 생명을 지켰다. 안으로는 여색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유희나 사냥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임금이 국가와 백성을 위해 자제하며 노심초사 했다는 수사는 국왕을 기리는 행장에서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표현이다. 중요한 사실은 현종이 다스렸던 시기가 조선의 흥망을 결정할 수도 있을 만큼 어렵고 위태했던 치세였다는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두 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졌고, 현종은 이 난세를 수습해야 하는 시기의 최고 책임자였던 만큼 그 여정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일부 연구에서는 17세기 전 세계적인 기후 이상으로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따른 생산량 저하와 인구감소가 전반적인 추세였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현종의 치세에도 기상이변은 여러 기록에서 자주 발견된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종대가 조선 후기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때 활동한 인물들, 이때의 정치적 사건, 이 시기 지식인들의 사상적인 면이 뒤 시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중심의 현실적 국제관계 속에서도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중화가 아닌 오랑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이 중화의 정통성을 자처하고 이에 맞는 실천적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른바 ‘조선중화주의’는 이 시기 더욱 원숙해져서 조선사회 깊숙이 뿌리내렸다. 예송(禮訟)이나 외교문제 등의 정치적 사건은 각 정치세력들의 국가운영 노선이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에 따른 정치세력의 결집 현상도 생겼다. 사상적 측면에서 보자면 성리학이라는 큰 틀 속에서 다양한 경향성을 가진 연구들이 지속되었다. 소론 계열 학자들이 새로운 경전 해석과 경세론은 이 시기 성리학 연구의 지평을 한층 넓히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국초에 마련한 여러 제도들이 시의성을 상실하는 경우도 생기면서, 이를 보수하고 새로 정비하기 위한 갖가지 제도의 마련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2 삼종혈맥

현종의 이름은 이연(李棩), 자는 경직(景直), 시호는 순문숙무경인창효(純文肅武敬仁彰孝)이다. 아버지는 조선의 17대 왕인 효종(孝宗)이고, 어머니는 조선후기 4대 문장가 중의 하나인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딸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현종은 1641년(인조 19) 청나라 심양의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관저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인조(仁祖)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은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했었는데, 이 때 현종이 태어난 것이다. 이 때 아버지인 효종은 세자의 신분이 아닌 대군이었지만,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34세의 나이로 급사했기 때문에 동생이었던 봉림대군이 급거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다. 이것이 1645년(인조 23) 6월 2일의 일이다.

평범한 왕실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현종의 삶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정 반대로 바뀌었다. 더구나 현종은 효종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소현제자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되었을 때 조선의 미래를 책임 질 막중한 운명이 현종에게 주어졌다. 현종은 아버지인 효종이 세자로 책봉된 이후 9살의 나이로 1649년(인조 27) 2월 18일에 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전례에 따라 강서원과 강관이 배속되어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이 해 5월 8일 할아버지인 인조가 승하하면서 아버지인 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인조의 삼년상이 끝난 후인 1651년(효종 2)에는 11살의 나이로 청풍 김씨 김우명(金佑明)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는데, 이 사람이 현종의 정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김우명은 조선후기 유능한 관료였던 김육(金堉)의 아들이었으며, 형제였던 김좌명(金佐明)과 함께 외척으로서 이 시기 적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현종은 부왕인 효종의 뒤를 이어 1659년(효종 10) 5월 왕위에 올라 약 15년 동안 조선을 통치하다가 1674년(현종 15) 8월에 승하하였다. 현종은 후궁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이 많지 않았다.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로 왕통을 이었는데, 그 역시 외아들로 숙종(肅宗)을 두었다. 훗날 영조(英祖)는 인조 이후 왕위를 계승했던 효종-현종-숙종 이 3명의 왕들을 ‘삼종혈맥’이라 하며 자신도 이 혈통을 잇는 군주로서의 자부심을 표현했다. 현종의 공주는 3명이었는데 첫째 명선공주(明善公主)와 둘째 명혜공주(明惠公主)는 혼인을 하기 전에 천연두로 일찍 사망하여 유일하게 막내인 명안공주(明安公主)만이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와 혼인하였다.

3 산림을 초빙하다

현종 대에는 조정에 출사를 하지 않거나 출사하더라도 관료 생활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막후에서 사대부들의 정신적・정치적 버팀목 역할을 한 이른바 산림(山林)의 존재가 정치적으로 두드러졌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 등이 당시 산림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조정 밖에 있었지만, 국왕이 징소(徵召)하면 국정의 현황과 해결 방안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출사하였다는 점에서 결국 국가를 향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산림으로 대우받고 사대부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성리학적 정치이념이 당시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지지되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는 국초부터 사회의 근본이념으로 선언된 성리학이 정치 사회 전반에 굳건하게 정착되면서 조선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시기이다. 자기 수양과 학문의 연마가 결국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은 사대부들에게 만연하였고, 산림에 대한 인정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능하였다. 현종은 산림이 가지는 정치적・학문적 권위를 인정하고, 신병 치료차 온천에 행차하는 길에 이들을 만나 조언을 경청하고 중앙의 관직을 주는 등 이들이 가진 국가 운영의 청사진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

4 예(禮)의 실천 방식으로 논쟁이 벌어지다

현종 대에는 인조반정 이후의 정계구도가 대체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서인과 남인이 연합정국을 형성하여 국정의 전반과 개혁의 방향을 두고 그 의견이 일치되거나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현종 대에 일어난 갑인예송・기해예송 두 번의 예송과 사대부 집안의 전례문제를 둘러싸고 견해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이 논쟁들은 치열한 논의 와중에 정치적으로 과열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여, 후에 서인의 노론・소론 분기의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현종이 즉위하던 해에 일어난 1차 예송인 기해예송과 14년 후에 벌어진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효종과 효종 비인 인선왕후의 상에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효종이 장자가 아닌 둘째 아들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남인은 왕이 되었으니 왕가의 예를 적용하여 장자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서인은 왕가의 특수한 예의 적용을 반대하고 보편적인 예를 적용하여 본래대로 차자로 대우하기를 주장했다. 각자가 근거로 삼는 전례와 근거가 있었던 만큼 학술 논쟁이라는 측면도 있었으나 국왕의 권위와 관계있는 정치적 발언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정치 대결로 흘러가기도 하였다. 특히 갑인예송에서는 현종이 당시 신임하던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남인 주도의 정국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국왕이 가진 결정권이 견해가 대립되는 논의를 종결시키는 데에 유효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673년(현종 14)에 벌어진 ‘민신대복’ 사건은 사대부가의 상례에 대한 문제였다. 민신(閔愼)은 정신병에 걸려 온전치 않은 아버지 민세익(閔世益)을 대신하여 할아버지 민업(閔業)의 초상에 아버지의 복을 대신 입었다. 이를 두고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은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하며 비판했고, 송시열은 이에 맞서 민신의 행동이 경전에 근거가 있는 일이라며 옹호하며 논쟁이 벌어졌다. 현대 우리 입장에서 보면 명분에 집착하는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예(禮)의 실천에 관한 위의 논쟁들은 현종 대 이후 정국 흐름의 방향을 결정할 만큼 당대 사람들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의례는 세상의 마땅하게 실현되어야 할 질서의 모습이 형식으로 표출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경세(經世)의 의무를 지고 있던 지배층들에겐 바로 현실의 문제였다.

5 청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존주의리를 내세우다

1666년(현종 7) 청나라 사신이 현종과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사신이 조선에 온 이유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이 청나라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도망 왔기 때문에 이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조정 신료들과 현종은 조선인 포로들을 숨겨주지도, 그렇다고 사실대로 진상을 얘기해 주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에 있었다. 이들은 이전부터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였으나,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여 사신에게 거금의 뇌물을 주면서 사태를 무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현종은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사신에게 직접 조사를 받고 은으로 벌금을 내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일대 파란이 일었다. 국왕이 청나라에 벌금을 내게 된 상황을 곁에서 보고만 있었다는 이유로 송시열・송준길・허적 등 많은 신료들이 사직을 청하였다. 이 일은 현종의 좋은 말로 마무리 되었지만, 당시 강대국인 청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그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야 했던 엄혹한 대외관계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들은 강대국인 청나라가 무력을 내세워 억압하는 것에 순순히 굴종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오랑캐는 중원을 차지해 봐야 백년을 가지 못한다.’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조선 지식인들은 청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기대도 하였다. 이 믿음은 지금 생각하면 허무맹랑한 것이지만 당시 사람들의 청나라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에게 청나라는 중화의 질서와 제도를 무너뜨린 오랑캐일 뿐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생각하기에 오랑캐가 오래 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무력과 경제력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바로 그들의 문화가 중화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중화’란 유교문화의 총 집합이었다. 유교문화는 대표적으로 중국 주나라의 왕도정치이념과 이때의 각종 문물・제도・예악 등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존주의리’(尊周義理)를 내세우며 더더욱 중화의 가치를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존주의리는 김만균(金萬均) 사건에서 표면화되기도 하였다. 김만균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왕의 행렬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사직하였다. 그의 할머니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기 때문에 손자 된 도리로 그 자리에 나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승정원에서는 그의 사정이 부모자식 간의 일이 아니며, 더구나 공무 수행은 관료에게 우선시 되어야 하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만균은 명을 이행하지 않고 하옥되었다.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이 일은 ‘청나라 오랑캐들에 대한 복수를 세상사람들이 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송시열이 김만균을 적극 옹호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존주의리가 보편적으로 정당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종의 치세에는 노비종모종량법, 양반 호포론, 대동법의 효율적 운영 등 국가의 인프라 구축과 보완을 위한 논의들도 조정의 관료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것들이 가지는 의미 또한 작지 않겠지만, 이시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념적으로 굳건하게 결정하는 것이었다.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각종 전례논의와 존주의리의 확립이 그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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