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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洪大容]

수학과 과학에 밝았던 천재 실학자

1731년(영조 7) ~ 1783년(정조 7)

홍대용 대표 이미지

홍대용 초상

실학박물관

1 머리말 - 공평무사한 눈으로 다른 사상의 장점을 두루 받아들인다.

홍대용은 서인-노론-낙론 계열이고, 흔히 북학파 혹은 이용후생학파의 선구로 불려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범주화하기보다는 북학론을 사상적 지향으로 삼았다고 하는 정도가 홍대용의 사유체계를 설명하는 데는 적절할 것이다. 그만큼 홍대용의 사유체계는 독창적이다. 원래 북학이라는 용어는 박지원(朴趾源)과 박제가(朴齊家)에서 연유하며 귀속된다고 볼 수 있고, 실제로 북학파와 차별화되는 홍대용의 면모가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청나라의 문명을 허학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북학론을 사상적 지향으로 삼으면서도 북학파와는 다른 홍대용만의 독특한 학문체계와 사상적 전망을 살펴보는 것이 홍대용을 정확하게 올바르게 이해하는 태도일 것이다.

공평무사한 눈으로 다른 사상의 장점을 두루 받아들이는 개방적 학문관, 근대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한 자연관·사회관, 과학기술의 탐구 정신 등을 볼 때 북학파가 청나라의 선진기술 도입을 가장 중시했던 것에 비해 홍대용은 궁극적으로 평등사회로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홍대용의 글은 오늘날 내·외집 14권 2책의 『담헌서(湛軒書)』로 남아 있다.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을 제외한 홍대용의 현존 저작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의 전개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중국 여행의 결과물인 『담헌연기(湛軒燕記)』와 『을병연행록』, 홍대용의 철학을 집대성한 「의산문답(醫山問答)」, 그의 경세론을 종합하여 제시한 「임하경륜(林下經綸)」, 서양 과학의 근본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쓴 수학서 『주해수용(籌解需用)』, 과학적 사고의 실험적 결과물인 혼천의와 자명종, 그리고 사설천문대 농수각(籠水閣) 등이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사상가 홍대용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2 가계와 생애

홍대용의 본관은 남양이고, 청백리와 효자로 이름난 홍담(洪曇)을 중시조로 하는 정효공파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정사공신으로 책봉된 홍진도(洪振道)는 그의 6대조이다. 증조부 홍숙(洪璛)은 7세에 이미 산법에 능통했고 역사에 밝고 기억력이 좋았다고 한다. 충청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호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조부 홍용조(洪龍祚)는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송시열(宋時烈)의 효묘 배향을 청했다가 체직되었고,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되기도 하였는데 충청도관찰사, 호조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다. 부친 홍력(洪櫟)은 음보로 문경현감, 영천군수, 해주목사, 나주목사 등을 지냈다. 외가는 청풍 김씨로 노론의 핵심 가문 중 하나이다. 어머니는 군수를 지낸 김방(金枋)의 딸로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金在魯)와 6촌간이다.

홍대용은 1731년(영조 7)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서 홍력과 청풍김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두 살(1742년, 영조 18)에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나아가 미호 김원행(金元行)선생에게 배웠다. 스물한 살(1751년, 영조 28)때 윤증의 문집을 얻어 보고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련하여 송시열을 비판하고 윤증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고, 윤증의 문장에도 매료되었다.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불화와 그 원인에 대해 의혹을 품고 스승에게 질문했다가 꾸지람을 듣자 큰 의심이 없는 자는 큰 깨달음이 없다고 하며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처럼 20대 전반 무렵은 고정된 사고방식에 의혹과 회의를 품으며 학문적 성숙을 이루어나간 시기였다. 이 시기 석실서원에서 싹튼 자유로운 비판 정신은 홍대용의 개방적 학문자세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열여섯 살(1746년, 영조 22)에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홍대용을 설명하는 데에 음악을 빠트릴 수 없을 만큼 그에게 음악은 중요한 요소였다. 박지원은 홍대용을 ‘조선 거문고의 명수’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거문고 뿐 아니라 북경의 천주당에서 처음 접한 파이프 오르간을 즉석에서 연주하는가 하면, 서양의 양금을 개조하고 연주법을 개발하여 명연주가 가능했다고 한다.

1755년(영조 31) 스물다섯 살 무렵 김원행 선생을 찾아 석실서원으로 인사 온 연암 박지원을 만나게 된 듯하다. 홍대용이 중국 북경을 다녀온 후 둘은 더욱 가깝게 교유하였다. 박지원을 만난 이듬해(1756년, 영조 32)에는 석실서원에서 이재 황윤석(黃胤錫)을 처음 만났다. 황윤석은 그를 ‘김원행의 문인’, ‘과거공부를 하지 않는 박학한 처사’, ‘중국 선비들과의 지속적 교유를 하는 자’, ‘기이한 서책과 문물의 소유자’, ‘음악가’ 라고 설명하였다. 20대 중반에 만난 박지원과 황윤석은 각각 북학파와 석실서원의 대표 인맥으로서 모두 홍대용의 학문과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1759년(영조 35, 29세)에 나주목사 부친을 따라 나주에 머물면서 화순 동복의 물염정에 은거한 과학자 석당 나경적(羅景績) 선생을 찾아가 교유하며 새로운 기술방식의 혼천의와 자명종 등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부친이 5만냥에 이르는 제작비를 전담하며 적극 후원하였다. 3년 후 혼천의와 자명종을 완성하고 고향집에 농수각을 지어서 그곳에 혼천의와 자명종을 보관하였다. 과학기술의 탐구 정신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시기였다.

1765년(영조 41, 35세) 작은 아버지 홍억(洪檍)이 중국 사행의 서장관으로 나갈 때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평생의 소원이던 중국 여행을 하게 되었다. 떠나기 전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를 탐독하며 북경에서 가볼만한 곳을 정리하는 등 모처럼 찾아온 연행 기회에 들떴다. 당시 연행은 모든 지식인들의 꿈이었다.

1766년(영조 42, 36세) 북경 천주당을 방문하여 흠천감정(欽天監正)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 신부를 만나 서양 문물을 구경하며 천문기술과 서학 등에 대해 필담을 나누었다. 필담 내용은 「유포문답(劉鮑問答)」으로 정리되어 남아 있다.

그리고 항주에서 온 선비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형제의 의를 맺었다. 홍대용의 연행 일정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였다. 전자는 의도했던 것이었지만 후자는 우연히 찾아온 것이었다.

홍대용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 우선 벗들과 나눈 필담을 정리하여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을 엮었다. 반정균은 「담헌기문」을, 엄성은 「담헌팔경시」를, 육비는 「농수각기」를 써 주었고, 홍대용은 1767년(영조 43, 37세)에 『해동시선(海東詩選)』을 완성하여 항주의 반정균에게 보내고, 1768년(영조 44, 38세) 엄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지어 보내는 등 이들의 교유는 계속 이어졌다. 북경에서 우연히 사귀게 된 이들과 귀국 후에도 계속 주고받은 편지들은 「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남아 있다.

북경여행에 대한 기록은 이후 주제별로 편집된 한문본 『담헌연기』와 일기체 형식으로 날짜를 따라 기록한 한글본 『을병연행록』으로 정리하였다. 문자와 형식을 달리하여 두 가지 본으로 작성했을 만큼 그에게 중국 여행은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담헌연기는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더불어 3대 연행록으로 꼽히고, 『을병연행록』은 서유문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과 함께 대표적인 한글 연행록으로 알려질 만큼 연행기록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기록들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북경 방문은 「항전척독」, 「유포문답」, 『담헌연기』로 기록되어 훗날 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등은 특히 홍대용이 중국선비들과 만들어가는 우정에 부러움과 감탄을 보냈는데 청나라 사람과 사사로이 친교를 맺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건정동필담」 서문에서 홍대용이 벗 사귀는 도리를 통달했다고 칭송하였다.

박제가는 이 글을 읽느라 “밥 먹으면서 숟가락질을 잊었고 세수하면서 씻기를 잊었다”라고 말할 만큼 재미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이덕무는 “천애지기(天涯知己 :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알아주는 친구)”라고 감탄하였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홍대용은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등이 중국으로 떠날 때 자신의 중국 친구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기도 하였다.

1767년(영조 43, 37세) 아버지가 돌아가신 무렵에 과거를 단념하였고 1770년(영조 46, 40세) 부친상을 마치고 금강산을 여행을 다녀온 후 1772년(영조 48, 42세)부터 1773년(영조 49, 43세) 사이에 홍대용 학문·사상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산문답」과 「주해수용」을 저술하였다. 특히 「의산문답」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허자와 실옹이라는 가상인물들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철학서로 내용과 함께 형식적인 면에서도 독특한 저술이다.

과거를 포기하고 저술에 전념하던 홍대용은 「의산문답」을 완성한 후인 1774년(영조 50, 44세) 음사로 관직에 나갔다. 처음 제수된 선공감감역과 이어 제수된 돈녕부참봉은 사양하고 동궁시절의 정조를 보위하는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 정8품)이 되자 드디어 출사하였다.

세손익위사시직으로서 동궁(정조)과 서연에서 문답을 주고받으며 강학한 내용을 『계방일기(桂坊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는데 자신의 연행경험이나 사사로이 잡담한 내용들까지도 모두 담아 대화체로 서술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에는 1776년(정조 즉위, 46세)에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1777년, 정조 1) 전라도 태인현감에, 1779년(정조 3, 49세)에 경상도 영천군수에 임명되었다.

홍대용은 내직 3년, 외직 6년 총 9년여의 관직생활을 지냈다. 과거를 단념했던 홍대용이 선공감감역과 돈녕부참봉은 사양했지만 세손익위사시직과 외직생활은 기꺼이 나아간 이유는 자신의 이상을 현실의 장에서 실현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1783년(정조 7) 모친의 병을 핑계로 영천군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 해에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미호 김원행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던 의혹과 호기심이 많았던 소년 홍대용은 20대 후반에 과학기술에 대한 탐구정신을 발휘하여 천문기구 등을 개발하였고 30대 중반에 겪은 중국 여행의 체험을 여러 기록으로 정리하면서 그의 학문과 사상을 더욱 성숙시킨 후 40대 초반 일생의 역작이 된 「의산문답」으로 자신의 독특한 사유체계를 정리하였다. 그의 저술들은 내용면에서도 독창적이지만 형식적인 면에서도 그러한데,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스스로 가장 의미있는 기록으로 들 것 같은 「건정동필담」, 「의산문답」, 『계방일기』를 모두 대화체로 썼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3 홍대용의 독창적인 사유 체계

홍대용은 정주학, 양명학, 서학, 불교, 도교, 제자백가(장자와 묵자)가 모두 진리를 구현하고 있다는 이해와 천문학, 수학, 병학 등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 위에 연행이라는 외부적 자극을 더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유체계를 확립하였다. 인간과 자연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유방식을 「의산문답」으로 종합하였고, 조선을 개혁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경세론은 「임하경륜」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공자와 주자의 참된 뜻을 잃어버렸다고 당시 조선의 학문과 사상계를 평가하였다. 나아가 동방의 유자들이 주자를 떠받드는 것 자체가 소중한 줄만 알았지 의심스럽고 논란되는 것에 대해서는 부화뇌동하여 엄호하기만 하고 온 세상의 입을 막으려고만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올바른 학문이라면 모름지기 의리의 학문, 경제의 학문, 사장의 학문을 두루 갖추어서 공리와 경박한 꾸밈에 빠지지 않고 의리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 실천을 지향하는 실용정신을 강조하여 형체가 없는 이(理)는 실재성이 없다고 하면서 이 보다는 기(氣) 중시의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사물을 보는 방법으로는 인물균론(人物均論)에서 나온 ‘이천시물(以天視物)’의 관점을 내세웠다. 인물균론은 사람, 금수, 초목이 모두 한가지라는 것으로서 인간중심적 가치론에서 벗어나 있는 태도이다. 따라서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과 물이 똑같다는 ‘이천시물’의 방법론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관점에서 물을 보고 나서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다고 하거나, 물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고 나서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고 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천시물의 관점은 나아가 화이의 차별을 타파하는 논거가 되었다. 하늘에서 보면 중국의 문화나 오랑캐의 문화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인물균론을 통해 인간중심적 가치론에서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중국중심적 가치론에서 벗어남으로써 화이론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홍대용의 과학기술 탐구 정신이 더해져서 시야가 우주로 확대되면 지구중심설을 부정하게 된다. 무수한 별들의 세계로부터 본다면 지구도 또한 하나의 별이라는 무한우주설은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홍대용은 이상과 같은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임하경륜」에서는 조선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주요 내용은 신분제 철폐, 교육제도와 인재등용, 토지제도, 군사제도, 행정제도 등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이면서 홍대용의 사유체계가 잘 드러나는 부분은 신분제와 교육제도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모든 사람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사농공상에 소속되지 않은 채 무위도식하는 자에 대해서는 관에서 형벌을 주어 세상의 큰 치욕이 되게 하고, 재능과 학식이 있다면 비록 농부나 장사치의 자식이 조정에 들어가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요컨대 자질에 따라 모두 맞는 일을 찾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사농공상 할 것 없이 누구나 일을 해야 하며 양반의 세습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임하경륜」과 같은 경세론이 저술된 데에는 홍대용의 ‘경세제민’에 대한 인식이 밑받침되어 있었다. 그는 십여 세 때부터 뜻을 고학에 두어 장구의 말절만을 닦는 우활한 유학자는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겸하여 군국의 경제사업에 마음을 두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홍대용 학문과 사상의 전개과정은 연행을 기준으로 연행 이전과 연행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연행 이전은 석실서원에서 수학하면서 정주학에 의혹과 회의를 품고 서학, 천문학, 수학, 병학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과학기술의 탐구 정신을 발전시키던 시기이다. 연행의 경험은 『담헌연기』와 『을병연행록』, 「항전척독」, 「유포문답」 등 풍부한 기록으로 정리되어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연행 이후는 그동안 갈고닦은 학문과 사상을 철학서 「의산문답」과 경세서 「임하경륜」으로 종합하면서 완성시키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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